아모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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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지 못하는 이유
깨닫지 못하는 이유
심판이라는 의미는 어떤 하나의 의미만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교회가 하기 힘든 오랜시간을 심판의 종합판이라는 선지서를 살펴보면서 조금은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줄넘기를 하면 다리가 아플 것 같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실제로 해 보면 팔이 더 아프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심판이라는 용어 자체가 위압적이고 부정적으로 느껴지기에 아는 것의 차이는 크다 특히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5개월을 살폈지만 우리의 이해가 팔이 아픈 정도의 경험은 했을지라도 건강해지는 운동의 최종목표가 있듯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는지까지 연결는 목표가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선지서를 읽고 들으며 우리 생각 어디즘에선가 요한복음의 메시지들이 연결되는 느낌/ 또는 어떤 장면들 - 예를들어 대표적인 사마리아 여인,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왔지만 용서 받은 여인, 9장의 눈 먼 자, 11장의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이 그것입니다. 특히 3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든지 연결되는 18절에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말씀에 대한 이해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은 최종이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물론 문 자체가 힘들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지난 5개월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를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 정의, 인애’라는 단어로 함축적 표현을 할 수 있고 미가서에 중심 구절을 두고 확장되는 방식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호세아부터 순서적으로 보았다면 읽은 내용처럼 결혼 상대로 볼 수 없는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라는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됩니다.
아모스서는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신데 공정하다는 의미를 앞서 공연성 즉 세상에 드러남을 통해서도 분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표——)꽤 자주 언급했기에 이 부분도 이제 ‘이미 아는 이야기’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에 대한 심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아모스서는 담고 있습니다. 그 핵심이 ‘언약’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이죠. 마치 우리가 부모 자식의 관계가 가장 유사한 비유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그보다 농도가 더 진해야 한다면 자신은 죽음이지만 자신의 장기를 기증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가까운 비유라고 지난 주 예를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맺는 계약과 유사하지만 계약은 합의한 내용이 깨지면 계약은 사라지고 잘못한 쪽에서 합당한 법적 책임과 배상만 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이 책임과 배상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편에서 언약의 완전성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제 제목에 부합하게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심판 경고를 앞두고서 깨닫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는 한 단어를 놓고 이만큼이나 어려운 단어가 있을까요? 어려운 이유에는 저는 개인적으로 ‘감정’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이성의 영역에서만 작동하지 않고 감정이 이성의 앞뒤에 작용을 하면서 마음의 움직임이 이성을 통해 판단된 지식이 받아들이는 유기적인 역동성이 섞여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경우는 지식이 없는 감정의 요동으로 또 어떤 경우는 지식의 열거로만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지식과 감정 둘 동시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의미에 담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전 인격적인 변화를 유일하게 말씀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을 믿는 것이죠. 히브리서 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첫 번째로, 아모스는 우리에게 지난 주 하나님께서의 심판에 대해서 ‘너희도 생각해봐라’ 하는질문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사고하게 만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그게 말이 되니’하는 것처럼 보편적인 질문과 답의 과정이라면 본문 4절은 좀 다른 표현을 씁니다.
4절부터 - 죄를 지어라.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새벽기도 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쳐라(헌금드려라) 누룩 넣은 빵을 감사제물로 불살라 바치고(각종 제사를 드려라), 큰소리로 알리면서 자원 예물을 드려 보아라(어쩌면 기뻐하며 찬양예배에 감정적인 분위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게 맞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들입니다. 제사 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보편적인 내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만 해당되는 것으로 넘어오면서 ‘이게 왜, 무슨 문제지’라는 사고를 자극합니다. 그리고 5절 중반에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 다시 말하면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좋아한다. 기뻐한다는 표현에 유의하시면 앞서 말씀드린 이미 지식이 그들의 감정에 깊이 자리 잡힌 상태 아닙니까? 사실은 어떤 일에 대해서 우리가 바라는 바가 이것 아닙니까? 어떤 일, 취미, 행동을 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기뻐하는 바와 연결된다면 소위 말해서 베스트의 상태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소위 말하는 ‘늬앙스’를 보세요.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제사라는 방식을 주신 분이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게 맞다고 지금 기뻐하며 하는 입장에서는 요즘 표현으로 멘붕이 온 것이죠. 이해를 위해 말의 격을 좀 낮추겠습니다. ‘어 하라고 해서 한 거고 진심으로 는 것이기에 우리가 기뻐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라는 것입니다.
뒤쪽의 아모스 텍스트를 먼저 읽어 두겠습니다.
아모스 5:15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
암5:21-27
성경전서 새번역 5장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22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23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24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25 이스라엘 가문아, 사십 년을 광야에서 사는 동안에, 너희가 나에게 희생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친 일이 있느냐?
26 이제는 너희가 왕으로 떠받드는 식굿의 신상들과 너희의 별 신 기윤의 신상들을 너희가 짊어지고 갈 것이다. 그것들은 너희가 만들어서 섬긴 우상들이다.
27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다마스쿠스 저 너머로 사로잡혀 가게 하겠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하나님이시다.
특히 구체적으로 요나서에서 니느웨가 돌아선 것처럼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극과 극에서는 차이가 쉽습니다. 어제 술 마시던 사람이 오늘 안마시면 티가 확나지만 교회 잘다니고 별 탈도 없고 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건지 인식도 못하는 상태가 가장 어려운 것이죠. 이런 배경이 잘 드러난 예가/ 눅15장에서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은 말 그대로 개고생하고 돌아오니까 뭐든지 다 행복하지만 여젆히 집에 있던 첫째 아들은 그걸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참여하지 못하고 어깃장을 놓고, 삐지고, 배알이 꼬이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되니까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잘 되었다. 죄를 좀 짓자 그럼 기도할 것도 있고 은혜도 많이 느끼는 거 아닌가 하는 식이죠..정말 하나님과 말장난하겠다는 모습인 것이죠. 이런 걸 잘 알았기에 바울도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 말했습니다. 로마서 6: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어서 2절에 ‘그럴 수 없다’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괴리는 무엇인가요?소위 말해서 막 살인하고 폭력배처럼 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사고 파는 세상의 경제 방식을 따라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폭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결국 이방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라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서 드려진 감사제물, 자원예물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론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아 바로 이런 것들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기뻐함이 하나님의 결론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악의 가장 원하는 바 또는 악이 추구하는 결론이라고 해 본다면, 창세기 3:6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하나님의 말씀이 앞에 오면 그뜻을 따라가야 하는 우리 삶의 모습이 드러나는 과정이라면 지금처럼 뒤에 온다면 앞서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평가이자 심판의 이유라고 봐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라고 저도 묻는 것입니다. // 여러분, 우리가 기뻐하는 바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처럼 기도하고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면 마치 기도의 응답이라고 했던 경우가 한국 기독교에 관행처럼 여전히 사용되는 것도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6절부터 ‘너희가 좋아해서 행한 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행한 일을 알려주시는 것이 6절부터 11절까지 나옵니다. 이 일이 북 이스라엘에게 행하여 진 것이고 12절에 ‘내가 너에게 다시 그렇게 하시겠다. 작정했다, 만날 준비를 해라’는 엄중한 경고의 심판 메시지가 열거됩니다. //
여긴 빨리 읽어서 -
6절은 - 끼닛거리를 남기지 않겠다. 먹거리가 떨어지게 하겠다. 그런데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7절에도 - 추수 석달 전에 비를 내리지 않는다. 석 달 전이라면 가장 비가 필요한 시기, 열매가 영글어야 할 그 때에,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9절에도 -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 깜부기 재앙, 팥중이로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 감람나무를 다 먹게 했다. - 이런 나무들은 주 수입원입니다. 모든 음식의 시작, 경제의 시작으로 다시 나무가 자라나려면 최소한 몇년의 시간은 걸리는 문제인 것이죠. 그럼에도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입니다.
10절에는 전염병, 애굽에서 한 것처럼 -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바로에 대한 심판/ 교만함에 대한 심판을 알게 한 것입니다. ‘너희에게도 내렸다’ 심하게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다. 말들을 노략하게 했다. 그래서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청년들이라면 다음 세대로 주역이다.
11절 ‘성읍을 무너뜨리기를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대표적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소돔과 고모라인 상태를 지적합니다. 그나마 거기서 롯과 자녀만 구원받은 것처럼 11중 ‘너희가 불붙은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다’ 그런데도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12-13절에 이제 하나님께서 너에게 다시 그렇게 하겠다는 시작을 보십시오. 이런 심판은 아모스서가 북 이스라엘의 폐망 즉 하나님의 심판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시 같은 길을 걷고 깨닫지 못하는 남 유다에 대한 경고임이자 그럼에도 말 안듣고 경고 무시하고 결국 멸망한 유다 이스라엘을 지나 우리에게 어떻게 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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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시대의 극단적인 내용을 좀 살펴 볼까요?
과도한 민원으로 사람을 죽음에 까지 이르도록 하는 언어 폭력은 우리 일상의 대화이자 특히 게임 문화로 성장한 젊은 세대에는 카톡 같은 곳에서 마지막 욕을 날리고 빠지는 것이 일종의 승리 공식처럼 하고 있는 시대인 것이죠. 아무리 법적인 처벌을 강화한다 해도 최소한 규제일 뿐입니다. 세계 자살률 1위와 같은 우리나라의 비참한 기록은 비록 정권이 바뀐다 해도 쉽게 바꾸지 못할 뿌리 짚은 세상 풍조라는 것입니다.
문제에 대한 깊은 사고가 없는 우리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뿌리가 뽑힌 상태입니다. 대표적으로 세월호 참사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었고 이태원 참사는 사고를 더 강화시켜 국가 제도 역시 믿을 수 없는 불신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사회는 믿고 말할 수 있는 앞선 사람들의 사고나 사상은 무시 당합니다. 꼰대, 나이든 것에 대한 불신 그들이 하는 정치 그 자체로 무시 해 버립니다. 반면 새로운 세력이나 뭔가 나이스한 것들이 자신들의 요구나 소리로 채워지길 바라고 휩쓸립니다. 생각은 현실이라는 벽을 통과하며 다듬어지고 정돈되어 ㅎ하나의 소리 더 나아가 집단 지성이 되는데 그런 과정없이 여기저기서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과정은 사라지고 내가 느낀 감정의 상태가 판단의 근거가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뭐 하나가 유행이 되면 각종 sns를 타고 전국을 휩쓸고 너도나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물건을 구매 인증하거나 스타일을 따라 갑니다. 언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제 사용하던 은어들은 오늘 새로운 형태로 쏟아져 나옵니다. 줄임말을 쓰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도 없는 건 대화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따라오지 못하게 하려는 선도 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계사 속에서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지만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전 인류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히틀러의 인종 청소나 볼세비키의 혁명이 그것이죠. 그래서 123 계엄도 정권의 말 안듣는 사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명단을 작성하여 죽여서 없애 버리는 ‘사람’에서 ‘물건’ 취급했던 일이 불과 몇 달전에 일어났고 아직도 심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진행형의 상태인 것입니다. 어쩌면 12절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겠다 하시며 앞서 북 이스라엘 심판에 대해 하셨던 일들의 열거가 이제 남 이스라엘에도 일어난 일이라면 지금 우리에게도 분명하게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경고의 실행이 꽤 실행된 것 같다는 생각도 떨칠 수는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가 이런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여전히 교훈적인 말씀이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위로한답시고 심리적인 표현을 써가며 설교를 축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돌이키는 것은 니느웨가 돌이킨 것처럼 자신들의 삶의 방식인 약탈과 폭압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마음에 없는 기쁨이야 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 것이다’ 아버지의 기쁨은 약하고 힘든 자를 돌아보는 시선에서 참여에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뿌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내려야 참으로 전해지는 기쁨의 맛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이 내용은 결국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재창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첫 머리에 ,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내용인 것이죠. 우리가 기도할 때 인정하는 단순한 표현넘어 잘못에 대한 인정과 그리고 심판 받아 마치 북.남 이스라엘처럼 마땅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하나님께서 다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이끌어 달라는 간절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뭐 중요합니까? 우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전히 만군의 하나님으로 불리시는 그분께서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쁨으로 섬겼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시편 147:11 “1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편 149:4 “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잠언 12:22 “22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신약에서는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리고 우리가 살펴 볼 스바냐 3:17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