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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여러분 반갑습니다. 6월의 첫날 주님을 먼저 만나기 위해 모이신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크신 사랑과 복으로 함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지난주에는 모든 하디데오 학교들이 모여서 체육대회를 진행했는데요, 다들 재밌으셨나요? 함께 교제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크게 누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로서 달이 바뀌었죠? 6월이 되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크게 변화하게 될겁니다.
왜요? 6모가 있고, 기말고사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또 6월이라는 달 자체가 2025년을 반으로 딱 나눴을 때 중간에 위치한 달이기 때문에, 여러분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조금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은 좋은데, 그 달라지는게 이상한 쪽으로 달라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 내가 이제는 공부에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 하임은 당분간 좀 줄여야겠다. 이제는 예배만 딱 듣고 들어가야겠다.
아마 이 자리에도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없으시겠죠?
여러분들의 마음이 요동치는 이 시기, 우리의 마음에 바울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바른 마음을 주셔서 더욱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새롭게 보는 말씀이죠? 바로 빌립보서 말씀입니다. 아마 빌립보서 말씀은 오늘만 딱 보게 될 것 같은데요, 간단하게 이 말씀을 설명드리자면, 다른 서신서들이 그렇듯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서신을 보낼 당시에 바울은 옥에 갇혀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회심 후 사도로서 여러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하는 동안 수없이 옥에 갇혔습니다. 여러 사람이 바울의 전도활동과 복음 전파에 대해서 악심을 품고 고발하면서 옥에 갇히는 경우들이 많았던 것인데요,
바울은 그러한 좋지 않은 상황 가운데서도 우울에 빠지거나, 억울해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에서도 본인에게 주어진 전도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로라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모든 교회가 주님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 말씀은 그 전체 말씀 중의 3번째 장인데요, 바울은 첫 구절부터 어떤 말을 하죠?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가던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안전한 것이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바울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처한 상황과도 연결이 되어있을 것 같아요. 사실 교회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겠어요? 자신들과 함께하며 말씀을 전해주던 바울이 모함에 의해 감옥에 갇혀있다는 이 현실이 성도들에게는 두려움, 혹은 슬픔의 마음을 줄 수 있었겠죠.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마음이 아니라 언제나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자리에 갇히게 된 것도 벌어져서는 안될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뜻하신 일이기에 전혀 슬퍼할 것이 없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에서 바울은 세가지를 삼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개들, 둘째는 행악하는 자들, 셋째는 몸을 상해하는 일까지를 삼가하라고 합니다.
방금 전까지 기뻐하라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이것은 바울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 빌립보 교회 가운데 벌어졌던 한가지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소식이냐,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또 다시 유대인들이 교회로 찾아와 바르지 않은 이야기들, 즉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야 한다는 식의 잘못된 이야기들을 성도들에게 전하였고, 이 때문에 몇몇 성도들이 시험에 빠지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로 성도들에게 그 가짜들, 거짓된 이야기들을 하는 자들을 삼갈 것을 권면한 것이죠.
가장 먼저 등장한 개는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매우 천대받던 동물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개에 비유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욕적 언사였죠.
그리고 세번째로 나타나는 몸을 상해하는 일은 뭐냐, 바로 할례를 지칭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할례였죠. 할례를 받아야 유대인으로서 첫 발을 띄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속적으로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2절에서 그들의 이러한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믿지 않는 우리가 바로 할례파라고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육체로 할례를 받고 육체로 말씀을 따라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 생각하지? 사실을 그렇지 않아. 오히려 행동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고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진정한 할례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야!’
그렇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전하며 주장했던 것은 무엇이었냐, 방금 말씀드린 대로 말씀을 잘 순종하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는 우리 스스로의 육체적 행동으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죠. 만약 그것이 진리라면, 우리 중에도 구원을 그렇게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마치 불교에서 하는 것처럼, 어디 으슥한 동굴 같은데 들어가서 벽보고 중얼중얼거리고 하면 갑자기 모든걸 다 깨달아서 나 구원받았어!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나요? 없죠.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에요. 왜? 우리 인간의 육체는 이미 태초의 원죄로 인해서 오염된 상태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국에는 죄의 자리에 이를 수밖에 없어요.
그 사실은 아마 여러분 스스로가 잘 증명할 것입니다. 여러분들 어때요? 지난 캠프때만 해도 여러가지 다짐하고 마음 먹었던 것들이 있을 텐데, 지금 잘 하고 계신가요? 아마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일거에요. 마치 캠프 때만 되면 하는 연례 행사처럼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하는 거잖아요.
심지어는 바로 지난주에 마음먹었던 것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행동하는게 내가 특별히 죄가 많고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가 육체라는 것이 그렇게 믿지 못할 존재라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반례로서 자기 스스로를 보입니다.
4절부터 나오는데요, 너희가 그렇게 스스로 다 행동하며 이룰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나는 벌써 그랬을거야.
그러면서 쭉 자신의 이력을 읊습니다.
태어나고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베냐민 지파이고,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고, 바리새인이고, 교회를 박해하기까지 했으니 너희들의 기준에서 나는 완전히 흠 없는 사람이야.
방금 우리가 본 5절은 사실상 바울의 프로필입니다. 이력서 같은 것 내면 나오는 것들이라는 거죠.
한번 여러분들이 면접관의 마음으로 하나씩 살펴볼까요?
가장 먼저, 바울은 나자마자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통 유대인 집안에 태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과거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완전수인 7일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한명의 사람으로서 인정하셨다는 의미로 바로 다음날인 8일째에 할례를 행하면서 이 아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대인으로서 인정받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울이 그렇게 행했다는 것은 그가 나중에 유대인이 된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가정 자체가 뿌리깊은 유대인 집안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이자 베냐민 지파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부적으로 열두 지파가 있는데요, 바울이 특히 베냐민 지파라는 것을 드러낸 이유는, 베나민 지파가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을 배출해낸 지파이고, 이후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뉠 때에도 남쪽 유다 왕국에 속한 지파이기에, 이후에 오염된 북왕국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정통 지파 출신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하죠. 히브리인이라는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포로생활 등으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을 구분하는 용어였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이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사실상 언어도 헬라 언어를 쓰거나 하는 경우들이 많았죠.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이들과 달리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히브리 지역에 사는 말 그대로 정통 유대인이라고 자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자신은 근본이 있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자신의 청년기 활동들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했다고 하죠. 바리새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서 말씀도 잃어버리고 마음대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치면서 말씀 회복운동을 했던 이들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항상 공부하고 외우고 했죠.
바울 역시도 그렇게 율법을 공부하고 했는데요, 특별히 다른 본문을 보면 당대 유명한 일타강사인 가말리엘의 밑에서 공부했다고 나와있습니다. 사실 그랬으니 그가 어떤 일들을 했겠어요? 교회를 박해하는 활동을 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모든 이력들을 보고 정리하면 어떤 결론이 나와요? 율법의 의로는, 유대인들이 판단하고 정하는 바로는 바울이라는 사람은 가장 먼저 합격시켜야 할 인물이죠. 말씀대로 흠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7절에 그러한 엄청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바울이 뭐라고 하죠?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긴다고 합니다. 8절까지 보면 심지어 배설물로까지 여긴다고 해요. 왜 그럴까요?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이 모든 것보다 더 뛰어나고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상황은 비유하자면 이런거에요. 여러분이 열심히 면학하고 공부하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와서 막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는거에요.
‘얘들아 내가 대학다녀보고 하니까 일단 간판이 좋아야 해. 그러니까 적성이고말고 일단 간판부터 높여놓고 시작해야해. 나중되면 사람들이 학교만 보지 뭘 보겠어? 그러니까 일단 학교부터 붙고 생각하자.’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 열심히 재수 삼수해서 서울대 붙어서 간 사람이에요. 당장 보면 오 그래도 수능 공부도 많이 했고, 서울대 갈 정도면 어느정도 실력이 있는 거니까 그럴싸해 보여요.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또 어떤 사람이 와서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학교? 그런거 그정도로 안중요한데. 학교 높일 생각 말고 좋아하는 걸 해.’
이 사람은 누구냐? 관련 학계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을 발표해서 상도 타고, 해외에서 강연다니고 하는 사람이에요.
어때요 여러분? 진짜 보통 세상의 시선에서 그 두 사람을 비교하면 누가봐도 우위는 확실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는거에요. ‘내가 다 해봤는데 그런거 다 쓸모없더라. 그것보다 다른게 더 중요함.’
심지어 세상의 시선에서 끝에 끝을 달린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더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죠.
뭐 사실 실제로도 그런 부분이 있긴 하죠. 어느 학교냐보다도 거기서 뭘 하느냐가 더 중요하긴 하니까요.
여튼, 바울은 유대인들의 시선에서 율법의 행동으로는 할 수 있는 거의 최종을 다 이룬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필요치 않다.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는 오히려 그러한 행동들이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율법의 의를 위해 열심히 행동하던 ‘사울’의 시절. 그는 교회를 박해했죠. 예수님을 전혀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그 많은 학식과 지위는 그의 눈을 가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엄청난 능력으로 임하시자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의 삶은 바뀌게 되었죠.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식이 있었기 때문도, 그가 지위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이 찾아오셨기에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전까지 자신을 높아지게 만들던 자신의 모든 프로필을 싹 지워버리고 오직 무엇만 남기냐? 예수님의 제자. 사도로서의 자신만 남깁니다.
그래서 8절에 나온 것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바울은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모십니다. 이어지는 9절까지 살펴보면, 바울은 자신의 삶 속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발견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받고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음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로움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이전까지 자신을 규정하던 유대인으로서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그 자리를 그리스도 예수로 채우면서,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삶의 자취가 그리스도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10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 그 고난에 함께 참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하죠.
바울이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닮아 고난에 참여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다는 이말은 자신이 진짜 예수님같이 십자가 달렸다 부활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겠다는 것이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우리의 모든 죄악을 함께 매달고,
모든 죄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자신도 함께 새 사람이 되어 온전한 자리에 나아가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참된 삶의 모습입니다. 성도라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그의 자리에 함께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자라면,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이전까지 세상이 말하는 모든 것들, 부, 명예, 학식, 우리 스스로를 규정하던 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삶에 가득 채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그러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어떤가요? 정말 예수님이 나의 삶을 규정하고 있나요? 어쩌면 다른 것이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나요?
진짜 성도라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한다면, 우리의 전체 삶을 바라보았을 때, 결국 예수님만이 남아야 합니다. 내가 남고, 나의 업적이 남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과 말씀과 복음만이 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인지 아시나요? 우리는 이 단어를 우리 스스로를 규정하는 단어로 자랑스럽게 사용하지만, 사실은 이 단어는 조롱을 위한 멸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고 하던 사람들을, 이방 사람들이 보고서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자들’이라는 의미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죠.
우리 식으로 변환하면 ‘예수쟁이’정도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의미 자체의 시작은 조롱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정도로 그들의 삶에는 누가 보아도 예수님만이 가득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단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하면서도 실제 삶에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쟁이가 아니라 돈 쟁이, 대학 쟁이 이런 다른 쟁이가 우리를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제가 지난번과 그 전에도 드렸던 질문입니다. 세번째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신앙생활을 하시나요? 정말로 예수님을 위해 살려고 신앙생활을 하시나요?
아직도 예수님을 램프의 지니처럼, 나의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삼으며 신앙생활하지는 않나요?
평소에는 별로 찾지도 않다가 시험기간만 되면 쪼르르 달려가서 좋은 점수 달라고 하고.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인, 예수쟁이로서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정말 예수쟁이로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친구들은 이런 생각 할거에요. ‘저는 그렇게 살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은걸요’
맞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 먹고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가 마주하는 삶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지난주에 큰 결심해서 체육대회도 다녀왔는데, 갔다와보니 수행평가는 쌓여있고, 안그래도 힘든데 선생님들은 체육대회 갔다오니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시고.
여러모로 마음도 힘들고 몸도 지치고 합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지, 저건 바울이나 되니까 하는게 아닌지 이런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되죠.
하지만 여러분. 그런 여러분들에게 바울이 12절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이 뭐라고 하나요?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을 얻었다고 하나요? 이루었다고 하나요? 아니요. 바울은 얻지도 못했고 이루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럼 뭐라고 하죠?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13절에서도 한번 더 강조합니다.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아직 다 이루지 못했대요.
바울과 같은 대단한 사람도 다 치우고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는데 아직 못했대요.
그럼 뭘 하고 있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지금까지 자신이 행했던 것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이 좋든지 나쁘든지 그런건 다 잊어버리고. 오직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열심히 주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은요, 절대로 삶 한가운데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가운데서 열심히 싸워나가는 삶입니다.
당장 여러분들이 하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에 부닥치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있을거에요.
왜 공부 안하고 그런 거 하니, 그거 하면 뭐가 있니. 당장 니 앞길 준비해야 되는거 아니니.
여러분들은 이러한 시험과 괴롭힘들 가운데서 싸워나가야 해요.
바울도 사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삶을 예수로 가득 채우기로 결심한 이후, 그의 삶은 세상 기준으로 완전히 나락에 빠졌습니다.
그냥 원래 살던 대로 살았으면 고위 관리를 하거나 랍비가 되서 편하게 살았을 거에요.
그런데 바울은 그런 삶을 다 포기하고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도망치고, 조롱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삶을 전혀 후회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기뻐했습니다.
심지어는 말씀에 보면 바울이 한가지 지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몸의 가시라고 표현을 하거든요?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바울이 이를 낫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라면, 에이 그게 뭐라고 주님 일 하겠다는데 낫게 해주실 것 같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조차도 하나님께서 자신이 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기뻐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과 같이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길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달려가는 길은 고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에서 살아가는 부족한 인간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삶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겠죠. 그러면 그리스도인 너무 안좋은 것 아니냐.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야 하느냐.
맞습니다. 당장 우리 스스로의 삶만 보면 그렇게 느껴지겠죠. 하지만 하나님은 15절과 16절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답해주십니다.
15절 마지막에 어떻게 말씀하시죠? 온전히 이룬 자들이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여기서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았다고 여겨진 이들, 즉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즉 주님은 절대로 혼자 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성도의 삶이 어렵고 힘들기에 같이 함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이룬 자들이 달리 생각하여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삶으로써 드린다면, 어떻게 하신대요? 하나님이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이어지는 16절까지 보면,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힘든 삶을 모든 교회 공동체가 하나되어 함께 이루어 나간다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든지, 아직 출발선에 있든지, 푯대 근처까지 왔든지 상관없이 주님께서 반드시 모든 공동체가 푯대까지 이를 수 있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비록 우리가 불완전하여 연약하고, 실패하고, 열심히 분투하며 싸워가는 삶에 있지만, 그렇기에 주님께서 공동체를 허락하셨고, 또 주님께서 그 가운데 일하셔서 반드시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푯대까지 향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여러분. 아마 지난주 체육대회 다녀와서 쌓인 수행평가 하고 한다고 어쩌면 괜히 갔나 후회도 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어려움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하임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선배, 후배, 동기들을 주셨고요, 그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랑하며 이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일요일 그 시간에 수행평가 준비했다고 해서 그걸 그때 끝냈다는 사실이 여러분의 머리속에 남을까요? 아니면 그 귀한 시간을 교회 공동체와 함께 즐겁게 누리며 사랑을 나눴다는 사실이 여러분에 머리속에 남을까요? 그것은 아마 여러분들이 제일 잘 아실겁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볼게요. 오늘 바울의 이 편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을 돌아보았을때, 주님의 흔적이 남아야 합니다.
그걸 위해선 여러분들의 삶이 어때야 할까요? 내가 원하는, 세상이 원하는 기대치들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세우신 푯대를 향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이 공부를 하고 이 일들을 하고자 하는 것이, 나 자신을 높이고, 나 자신이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높아지고, 주님이 전해지기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삶이 그렇게 주님이 드러나는, 다른 어떤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삶에서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향기가 드러나는 귀한 예수쟁이의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물론 그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힘들고 수없는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곁에 주님이 함께하시고, 우리 공동체가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통해 끝내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푯대에 이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그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모든 이들에게 드러내고 전하는 귀한 전달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 : 푯대를 향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