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01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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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2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3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4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5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8 너희 조상들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9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10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11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1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다 끊어졌느니라
14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15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신앙으로 인해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였다.
이제 불신앙의 세대가 다 지나가고, 이제 믿음의 새로운 세다가 모압 평지, 곧 요단강 동편에 진을 치고 있엇다.
이미 요단강 동쪽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치며 많은 땅을 차지하였고, 그 전리품으로 가축떼도 많이 얻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더라’ 라고 시작한다.
가축떼가 많이 있었던 르우벤과 갓 자손은 모세와 지도자들에게 나와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줄 것을 요구한다.
이들이 가나안 땅이 아닌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달라고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그들이 볼 때 요단 동편 땅이 목축을 하기에 딱 좋은 땅이었던 것이다.
요단 동편 땅은 실제로 가축을 기르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그들이 정말 잘 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르우벤과 갓 지파의 요구는 언뜻보면 현실적인 필요에서 나온 제안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들의 요구는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히려 지혜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잘못은 먼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태도 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분명히 요단강 서쪽의 가나안 전역이었다. 그런데 두 지파는 그 약속의 성취를 눈앞에 두고도, 거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땅 자체가 나빴던 것이 아니다. 그 땅을 선택하려는 동기와 시점에 있었다.
이제 요단강을 앞에 두고 강을 건너기만 하면 되는데 이제 와서 두 지파가 “우리는 굳이 건너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냥 이곳에서 살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조건을 더 크게 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것을 선택함에 있어 기준이 반드시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물건을 살 때나, 음식을 먹을 때나 다 기준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조금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다. 이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르우벤과 갓 지파는 그들이 살아갈 삶의 터전을 정하는데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도 약속도 아니었다. 그들이 요단 동편의 땅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곳이 가축들이 살기가 좋았기에 그들이 살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들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그 땅을 선택한 기준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가다가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먼저는 하와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봤을 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가? 인류에게 사망이 오게 된 것이다.
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가축들이 많아지자 가축들을 먹일 장소를 두고 목자들끼리 싸움이 났다.
그래서 창세기 13:6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어디서 살지 선택권을 먼저 주었다. 그러면서 롯이 왼쪽으로 가면 자신은 오른쪽으로 가고 롯이 오른쪽으로 가면 자신이 왼쪽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듯이 소돔과 고모라 땅은 그곳에 악이 가득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고 롯은 아내를 잃고 부끄러운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고 물이 넉넉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이 보기에 좋은 곳을 선택한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여러분은 어떤 일을 선택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볼 때 좋은 것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아무리 볼 때 좋아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묻고 그것이 아무리 내 눈에 보기 좋을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아니면 기꺼이 포기하고 내려 놓는가?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속으로 답해보아라.
오늘 본문에서 르우벤과 갓 지파는 자신들의 눈으로 아무리 그 땅이 좋아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여 눈앞에 있는 땅이 아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성경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을 위해서 이다. 오늘 본문을 읽고 있는 모든 이들은 이와같은 선택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눈을 넘어서서 영적인 눈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일시적인 만족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원한 가치와 하나님의 약속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두며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 진짜 가치는 하나님이 주실 것들이다. 아니 이미 구원을 선물로 받았으니 받은 구원을 가치있게 여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의심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의구심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한발짝씩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들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길 바란다. 세상의 것들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말은 결국은 영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다. 우리는 이와같이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며 마음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러한 르우벤과 갓 지파의 행동에 모세가 격분하며 이 상황을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과 연결지으며 경고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가데스바네아의 사건이다.
가데스바네아의 사건이 무엇인가? 가나안 땅으로 12명의 정탐꾼을 보낸 사건이다. 결과는 너무나도 잘 안다. 12명중에 10명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뭐고 자신들이 보고 느낀대로 그곳은 땅은 좋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강해 자신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두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이전의 10명의 정탐꾼들과 같다. 다른 것을 본 것이 아니기에 똑같이 느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으니 그 하나님을 믿으며 담대히 나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10명의 정탐꾼의 말에 마음이 빼앗겼다. 10명의 부정적인 말이 온 백성으로 들어가 결국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끔직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정적인 말과 행동은 다시말해 죄는 전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15에 이렇게 말한다.
14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15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가?
잘못은 누가 했는가? 르우벤과 갓 지파이다. 그런데 15절에 하는 말이 무엇인가?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잘못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했는데 그 책임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지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러는것인가? 다른 지파들이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게서 이스라엘돠 언약을 맺으셨을 때, 그 언약의 축복과 책임은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진 것이다.
가나안 정복의 사명도 마찬가지로 12지파가 한 마음으로 순종 할 때 성취될 일이었다.
그런데 두 지파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일부만 이루어지는 샘이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여호수아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정복한 후, 하나님은 전리품 중 어떤 것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아간이 하나니므이 명령을 어기고 외투와 금과 은을 몰래 숨겼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다음 정복지인 아이성과의 전토에서 이스라엘 전체가 패하게 된다.
이해가 되지 않는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는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간이 범죄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말씀하신다.
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다시말해 우리는 교회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로 하나된 우리는 나 보다는 우리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점점 개인주의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진다. 우리보다 나 라는 것이 더 편하고 신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공동체성은 단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하나님 백성됨의 본질이다.
르우벤과 갓 지파는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자신들도 언약의 후손들이며 다른 지파들과 형제 관계라는 정체성을 너무나 가볍게 여긴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나 하나 쯤이야’가 아니라 ‘나 한 사람부터’의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권면한다.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우리는 나만을 보며 살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기꺼이 내것을 손해보면서 내 옆의 지체들을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여러분이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교회에 성도는 적어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한 말이 있다.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남들이 즐거운일이 있을때 진정으로 축하해주고, 슬픈일에 있는 사람에게 가 함께 울어주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나의 말과 행동이 중요하다.
죄는 전염성이 있다. 공동체 안에서 죄는 전염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나 한사람 쯤이야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 한사람부터’의 선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르우벤과 갓 지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가축도 많고 가족도 많으니 우리 형편 좀 봐주세요, 우리도 살아야지요” 이해는 된다.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결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이었다.
그들이 전쟁에서 빠지면 다른 지파의 부담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만 편하려는 선택은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짐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할 때 나만 편하려는 선택은 다른사람에게 더 큰 짐이 된다. 교회에서, 또는 어떤 팀 사역에서 모두 함께 섬겨야 할 일이 있을 때, 내가 빠지면 그 몫은 고스라니 다른 지체들에게 짐이 된다.
내가 “나 한사람 쯤 안해도 되겠지” 하고 빠진 자리는 결국 다른 누군가가 두 배로 수고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 그리고 말에 신경써야 한다. 나만 생각해서 던진 말 한마디 행동하나가 다른 누군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 공동체로 다 연결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말에 신경써야 한다. 부정적인 말보다는 믿음의 말을 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 같이 현실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소망을 품고 말하며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주의 백성된 우리를 부르셔서 함께 일하시길 원하신다. 우리의 자리에서 나 하나쯤 없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내려놓고, 함께 부름 받은 자리로 기꺼이 들어가길 바란다.
순종의 자리, 섬김의 자리, 헌신의 자리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설 때, 우리 공동체가 온전히 세워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때로는 개인적으로 손해보는 것 같고 부담이 될지라도, 결국에는 공동체 모두가 승리의 기쁨을 나누게 됨을 믿길 바란다.
그래서 이 시간 각자 마음에 결단하길 바란다. 혹시 내 안에 “나 하나쯤이야” 했던 태도가 있었다면 그 마음을 내려놓고 “나부토 공동체를 위해 순종하겠습니다” 고백하길 바란다.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실 것이다. 나 가 아니라 우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