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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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 2:1-11
제목: 은폐의 신비
주제: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을 가리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가끔은 하나님이 제발 나타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신적 없으신가요? 앞이 캄캄한데 확실하게 정답을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어린 아이와 같은 생각을 아마 저만 하고 있나 봅니다. “포도원 모임”할 때 나눌 수 있는 간증과 은혜가 풍성하면 좋겠는데, “은혜동행”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소원을 가지신 적이 없으신가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잘 경험되어지지도, 또 마음 속에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바라지도 못하고, 예전보다도 못한 열정 때문에 신앙적으로 고민하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반복되고 무료한 일상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강하게 붙잡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오늘 이 문제를 풀어볼 겁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정말 잘 아는 본문이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사건입니다. 중요한 건 이것이 첫 표적을 행하신 사건이라는 겁니다.
이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표적’이란 개념을 먼저 알아야겠죠. 대부분의 성도분들은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처럼 ‘기적’과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시는데, 사실 이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기적’은 상식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죠. 표적에도 이러한 기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훨씬 더 넓은 개념을 지칭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징조’, ‘표시’, ‘일들’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지라도 예수님이 하신 일 자체를 뜻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모두 ‘기적’이지 않나요? 여러분, 만약 이러한 기적들을 경험하는 대가로 더 많은 무료함과 고난, 박해, 심지어 목숨까지도 위협을 받아야 한다면 그 기적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게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표적의 구조입니다. 표적을 행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집니다. 표적을 행할수록 예수님은 더 심한 박해를 받으십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죠.
이러한 표적의 의미가 오늘 말씀에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사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현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놀랍지 않나요? 이제 본문을 차근차근 살펴 보겠습니다. 3절과 4절 읽겠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당시에는 어떤 축제나 행사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사회적 재난이었습니다. 3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사실을 반사반응처럼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난해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여자여’라고 부르시면서 친어머니인 마리아를 ‘낯선 여자’로 여기고 계십니다. 공손한 표현이긴 하지만 살짝 부정적 뉘앙스가 섞인 표현이죠. 여기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는 최대한 의역하자면 “당신과 나 사이에 무엇으로 엮여있단 말인가요?”라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인식한 결혼식의 재난이랑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이 하실 일은 이런 개인적인, 혹은 세상적인 유익이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혼식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죠. 그러시면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즉, “아직 십자가의 달릴 시간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면서 십자가 사역을 가리키는 표적들을 행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십자가가 어떤 사건인가요? 예수님께서 죽으십니다. 가장 큰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서로 분리가 되는 심판의 사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행하실 표적은 단순히 하객들을 당장 만족시켜주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바꾼 현상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이 은폐되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영광이 은폐되면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11절이 이 모든 내용을 요약해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11절이 앞에 있는 내용을 모두 요약하고 변형시킵니다. 앞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하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돌항아리 6개에 물을 입구까지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죠. 이 사이에 물이 포도주로 바뀝니다. “바뀌었다”는 표현도 안나와요. 9절에서 갑자기 “포도주로 된 물”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연회장이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인들은 이 포도주가 물이 들어있는 항아리에서 나왔다는 걸 “알았다”고 말합니다. 하인들이 알았다는 건 하인들이 이 기적을 직접 행했다는 뜻입니다. 직접 물을 퍼오고 날랐잖아요. 제자들이 행했나요? 아니요, 예수님과 관련 없는 하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표적을 보고 하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뒤에서 지켜본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11절에서 말씀하죠. 실은 이 기적을 누가 행한 겁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겁니다. 즉 예수님은 뒤에서 말씀만 하셨을 뿐 하인들이 이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면서 예수님은 일부러 뒤로 물러나셨습다.
그리고 연회장은 이 포도주가 예수님이 아닌 ‘신랑’이 준비했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신나서 10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예수님께 돌아가야 할 칭찬과 영광이 신랑한테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저 하객 중 한 명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영광이 나타났고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기적을 체험했던 하인들도 이 기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연회장도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을 못보고 있습니다. 신랑은 그 영광이 자기의 것인 줄 알고 받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표적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혼례 잔치가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이후에 나오는 요한복음의 표적들도 전부 그러합니다. 대부분의 표적들에서는 예수님이 곧바로 은밀한 곳으로 사라지시죠.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 때문에 박해가 시작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신 걸 듣고 떡을 더 받으러 온 군중이 실망하고 떠나버립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는, 이 표적을 계기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구성합니다. 표적이 선명해질 때마다 박해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표적이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고난과 박해가 심해지고 이것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겸손한 역사가 예수님의 표적의 방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나요? 그것이 사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더욱 선명하게 여러분에게 드러내시는 ‘표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상적인 혼례 잔치에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예수님의 표적이 드러났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일상에서도 비록 우리가 선명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 고난이 더 심해지는 것이, 어쩌면 십자가의 표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영광을 가리우심으로 나타나는 영광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고난이나 문제 가운데 있어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소망과 능력을 붙잡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24-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래서-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사랑하는 은혜동행교회 성도 여러분, 이렇게 은폐된 영광인데도, 제자들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예수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제자, 자녀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 어쩌면 더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삶과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그때가 오히려 ‘표적’이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고 증언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의 개인적인 기도제목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응답하실 겁니다. 하지만 인생을 넓게 봤을 때,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주님을 뵈올 날이 다가올수록 당신의 영광을 숨기시는 방법으로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 이 말씀을 붙드세요.
욥기 23:8–10 (NKRV)
8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이 숨어계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을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커져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와 십자가의 길을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