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3일 작정밤기도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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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를 먹지 말라.” (창 2:17)

창세기 1:26–27 NKRV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시작하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아주 잘 알고 계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오셔서 그것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십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이어서 17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며 의문을 가집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가 없었다면? 죄도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존재하게 하셔서 인간을 유혹에 빠지게 만들었고 죄가 우리가 가운데 들어오게 했는가? 마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하나님께서 파 놓은 함정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합니까? 우리가 이 부분을 잘 이해하면요. 인간 근본의 죄성을 이해하게 되고요. 과거 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간 역사 가운데 흐르는 죄의 역사와 그 속성을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정한 이유가 현시대에 기독교에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고 통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면 소위 반기독교, 기독교의 해체의 배경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됩니다.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복음을 가지고 버틸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그 복음을 듣기를 축복합니다.

아주 특별한 존재 - 인간

창세기 1장은 아주 거대한 창조 기사로부터 시작이됩니다. 현재의 과학으로도 밝힐 수 없는 이 우주와 이 세상의 기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태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아무런 의미 없이 진화 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 세상을 시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데 그 창조 중에 절정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 27절의 말씀을 보실까요?
창세기 1:26–27 NKRV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에서 우리는 단어가 보이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우리”로 칭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표현법을 “존엄의 복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 그리고 충만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문화권 뿐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왕이나 신의 존엄과 권위를 강조해서 복수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에 보면 다른 창조물을 만들때와는 다른 표현이 보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에서 형상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체렘”입니다. 그리고 모양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데무트”입니다. 단어 자체는 외형적인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형상과 모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형상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면 모양은 영어로 라이크니스인데요. 닮았다는 표현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닮은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과 닮았다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렇게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6절 마지막입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참 이것이 당시 신관과 인간관에 의하면 놀라운 기록입니다. 고대 사람들의 생각으로 인간은 다스림을 받는 존재이지 신을 대신해서 다스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을 닮았다는 것도 특정한 계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모든 인간이 그러하다는 것은 다른 고대 근동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다스림. 히브리어로 “라다”입니다. 짓밟고 올라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단어도 후에 변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의 다스림은 이 뜻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다스림의 뜻을 창세기 2장 15절에서 찾습니다.
창세기 2:15 NKRV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다 - 히브리어로 아바드입니다. 경작하다. 일하다. 이것 자체가 하나님께 예배하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키게 하다. - 히브리어로 쏴마르입니다. “지키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울타리를 쳐서 보호하다.”라는 뜻에서 시작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이라는 것은 “너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예배가 되게 하고 너에게 맡겨진 모든 것을 지켜라” 실제로 인간에게 맡겨진 다스림은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다스림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허락이 된 것입니다.
이 다스림이 다른 말로 하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도 목적대로 존재하게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이죠.
이러한 다스림을 권한을 왜 인간에게 맡기셨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고 너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31 NKRV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이토록 인간은 피조물들 중에 특별한 존재였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창조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특별하지만 넌 피조물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특권이 허락이 됩니다. 동산의 각종 모든 열매가 허락이 되었습니다. 각종 생물의 이름을 아담이 부르면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특별한 권리가 있음을 암시해주는 것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 일명 선악과입니다. 16절 -17절에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냥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16절에 말씀합니다.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여기에서 선과 악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인 악과 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무엇의 기준을 갖거나 정할 수 있는 위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 대한 도전을 금지하는 것이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선과악이라는 것은 “모든 지식”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판단 할 수 있으며 기준이 되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하실 수 있는 존재는 누구실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실제로 선악과는 단순한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보이는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이 야기를 읽을 때 항상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9절입니다.
창세기 2:9 NKRV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에덴동산 중앙에 무엇이 함께 있었습니까?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함께 있었습니다. 중앙에 이 두 나무가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한 바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제로는 두 나무가 합쳐져야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메시지입니까?
“너는 나를 닮은 특별한 존재지만 하나님은 될 수 없어.” “내가 너를 특별하게 창조했지만 너도 피조물에 불과해.”
저는 창세기 1장,2장의 이야기가 인간의 특별함 인간의 본질적인 연약함에 대해서 동시에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이며 존중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도 기록되어 있지만
동시에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고난 고통이 존재하며 인간이 한계를 가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하여서도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곧 그것은 죄의 결과 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인이 된 것입니까? 그 안에 의미가 더 중요하겠죠?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긴 했지만 여전히 피조물로서 목적대로 존재해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타, 함마르티아)하나님 처럼 되고자 했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침범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뱀의 모양을 한 사탄의 유혹을 보면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정확하게 나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와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죠. 그런데 사탄은 말합니다. “결코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 처럼 모든 것을 다 알게 될까봐 그런 것이다.” 그러면 하와 아담은 선악과를 왜 먹었습니까? 하나님 처럼 되고자 먹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선택의 가능성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있을 때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리스크를 감수하셨고 대신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통하여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 생명나무와 선악과 이야기는 단순히 사과 같은 열매를 따먹은 옛날 이야기를 기록한 것 아닙니다. 인간의 아주 깊은 곳에 뿌리 박혀 있는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지독함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 유혹의 얼마나 취약한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와 선악과 이야기는 옛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이고 현재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굉장히 중요하고 현재 살고 있는 우리와 직접으로 연결되는 부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여전히 그 유혹은 진행중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그 우상숭배의 끝은 결국 인간 자신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고 싶은 열망으로 끝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소유. 자신들이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형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론의 금송아지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금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한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형상과 모양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시며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 없이 그 우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신이라고 숭배하지만 통제가 가능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장 20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만든 우상이 실제로는 아무 의미 없으며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2:20 NKRV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그래서 칼빈은 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 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기 삶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욕망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럼 현대인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믿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을 보면 한 사람의 사상이나 철학을 신봉하거나 과학을 절대적으로 믿거나, 물질적인 가치를 전부라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하나님의 자리를 스스로가 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선악과 유혹은 진행중입니다. 믿는 자라고 할 지라도 아직 완전하지 않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지독한 죄성은 끊임 없이 선악과를 바라보게 하고 마귀는 수 많은 방법으로 유혹을 하고 있으며 유혹을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기독교의 해체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5 NKRV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골로새서 2:8 NKRV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이제 아주 일상이 된 인공지능. 잘 사용하면 아주 유익한 것이 되겠지만 그것을 인간이라는 존재와 결합 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면 아주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분리되어 도구로 사용되다면 괜찮지만 우리의 신체 일부로 심거나 뇌에 프로그래밍하여 인간의 일부가 되게 한다면 하나님께 도전하는 존재게 될 것이며
뇌를 제외하고 모든 장기들을 인공화 한다면 소위 영생하는 인간도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모든 지식에 바로 접근 할 수 있고 적어도 200~300년을 산다면 더이상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필요가 없어질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것보다 더 가깝게 아주 깊숙히 침투해 있는 선악과의 유혹과 쓰나미가 있습니다. 바로 젠더(사회적인 성/ 주디스 버틀러 - 행동/선택/반복) 이데올로기(신념,가치 체계)입니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쉽게 이야기하면 이러한 뜻입니다.
“성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라는 생각 또는 관념입니다.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성 구별을 차별로 규정하고 새로운 성별의 정의를 만들어내는데 남성, 여성 외에 수십가지 성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성정체성, 성지향성이라고 하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표현이 “동성애”라는 표현입니다. “남자가 남자”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 동성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별을 결정하는 것이 생물학적 특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그것이 상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젠더이데올로기인 것입니다. 주디스 버틀러라는 철학자는 성이라는 것은 행동 선택 반복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젠데 이데올로기를 법으로 만들어 문화적, 사회적 기준이 되게 만든 것이 포괄적 차별 금지법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뿌리를 알아야 하고 진짜 목적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욕야카르타라는 인도네시아 도시에서 2006년 11월에 전현직 UN 인권 전문가, 국제사회인권 운동가,그리고  젠더 추종자 29인이 만든 29개의 원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성별, 성체성, 성적지향성의 이유로 차별 받지 않을 권리가 강조된 원칙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원칙을 만든 29인이 어느 나라의 대표나 어느 단체 대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들에게 이러한 권위를 준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UN의 어떠한 성명이나 조항에도 성정체성, 성적지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국제법을 제정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국제사회는 각 나라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처럼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성으로 인한 차별를 금지하는 그 법을 제정하라고 압박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젠더이데올로기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1960년대 이후 등장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문화 마르크스주의, 비판 이론(Critical Theory) 를 필두로 한 소위 네오 막시즘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아시죠? 공산주의의 창시자가 누구입니까? 마르크스(막스)와 엥겔스입니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혁명이 시작된 곳이 바로 소련이라는 곳이었고 지금은 실패해 많은 나라로 나눠졌고 러시아로 남겨져 있죠.
그런데 그 이후의 사람들이 막스와 엥겔스 이론 실패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결론 다다릅니다. 경제적 구조의 혁명으로는 그 혁명을 완성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화혁명을 주장합니다. 계급 혁명이나 경제 구조의 혁명이 아닌 사람들의 삶. 아주 작은 단위에서 혁명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제도나 모든 것들이 기독교에서 시작되었고 그 기독교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족제도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혁명이 일어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기독교가 해체되어야 하고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가족제도에서는 무엇이 일어납니까?
경제의 재생산, 문화의 재생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재생산”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는 전통적인 가족제도는 악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에 생물학적 남성, 여성 구분도 아에 없는 것이며 그리고 남녀 성별을  주장하면 차별이라고 하는 주장을 계속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서구사회는 이 작업이 오랫동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통적인 기준. 잣대. 바탕. 모든 것들의 시작점이 기독교였다면 이제는 그 자리를 “젠더 이데올로기가”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 사회, 문화 영역의 기준이 이제 아에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젠더 이데올로기의 진짜 목적은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이 법으로 제정이 되면 고스란히 그것은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예전의 마귀는 .. 살살 유혹했습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저걸 먹으면 돼.
그런데 지금은요. 강력한 쓰나미처럼 그 공격이 몰려옵니다. 그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오래 머무는 학교에서는 이 젠더 이데올로기가 상식이 되어 교육되고 있고 언론과 미디어는 동성애의 폐해와 병리현상에 대해서 전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어떠한 특정한 세력이 배후에 있다고 하기 보다는 젠더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을 떠나있는 자들의 생각과 사상의 끝이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쓰나미가 몰려와 기독교를 해체하고 황폐하게 만들며 복음을 변질시킬 때가 마지막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 교회가 우리의 가정이 철적하게 복음을 지키고 전해야 합니다. 기준이 혼란스럽지 않게 분명한 기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예전처럼 안일하게 일주일의 한 번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일 지키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저도 지난 한 달동안에 이 부분에 대해서 중등부 친구들과 다뤘습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다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본문의 말씀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분명 거대한 쓰나미는 몰려올 것입니다. 막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그러나 그 쓰나미에 복음을 버틴 한 사람이 여기에 있는 성도님들,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가 더욱 본질을 알고 그 본질된 사역에 더 힘쓰고 … 교회 운영을 위한 사역이 아닌 진짜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기를 축복합니다. 저를 이곳에 보낸 이유도 이곳에 있게 하신 이유도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이 시간 이 곳에 있게한 이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젠더 이데올로기 삶의 구석 구석 / 생각 침투
우리가 붙드는 복음은 어떠한가 ? 영향력이 진짜 있는가? 사도행전의 사도,제자 성도들에게 복음은 그들에게 전부였다. 복음이 전부인 제자들이 세워지고 출산 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자
앞으로 어떠한 세상이 펼쳐질지 예상은 할 수 있지만 그 세상이 가하는 핍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고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시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쇠하겠지만 주님의 말씀을 영원할 것입니다.
그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기에 우리 안에 계시기에 그 쓰나미에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에서부터 우리의 다음세대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신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많아지는 부흥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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