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이름은 회복의 기적입니다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8 viewsNotes
Transcript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 설교 개요:
🏗 설교 개요:
🟢 서론:
🟢 서론: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습니까?
“나는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뭔가 계속 부족한 것 같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하지만, 정작 나는 지쳐 있고, 의미를 잃은 것 같아.”
직장에서는, 학교에서는, 심지어 교회에서도 —
“나는 괜찮아 보이지만 사실 안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으신가요?
그런데 오늘 말씀 속 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는 늘 성전 문 앞에 있었지만, 성전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의 문턱’에 있었지만, 실은 가장 멀리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대지 1: 우리는 모두 ‘영적 장애인’이었다
🟡 대지 1: 우리는 모두 ‘영적 장애인’이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이 시간을 정해 기도하던 제 구 시 시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구 시는 오늘로 얘기하면 오후 세시입니다.
오후 세시가 되면 성전에서는 몇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먼저 오후 세시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번 정해서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정오 12시, 오후 3시 하루에 세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세시는 또 성전에서 매일 있는 저녁 제사가 드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구시, 오후 세시가 되자 한 장애인,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옵니다. 그리고 그를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중 하나인 “미문” 앞에 둡니다.
이 장애인은 선천적 하반신 마비 장애인입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애인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구걸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장애인이 성전으로 나오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처럼 고귀한 제의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지만, 이 장애인에게는 그저 구걸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제사는 사치였을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한 공간, 그것도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전의 “미문”은 “아름다운 문”이라는 의미죠.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지 않은 장애인이 아름다워보이지 않는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PPT
당시 성전 건물에는 완벽한 계층화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성전에 가장 깊은 곳에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성소가 있죠. 이곳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뜰이 이는데 이곳은 제사장, 레위인만 들어갈 수 있고요.
그 다음은 이스라엘 남자의 뜰. 유대인 남성만 들어갈 수 있씁니다.
그 다음은 여인의 뜰. 유대인 여성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방인의 뜰로 이방인도 출입 가능한 구역입니다.
그 이방인의 뜰에는 경고문이 붙어있는데 이 이상으로 이방인이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 표지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애인은 어디에 있나요? 이방인의 뜰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걸해야하기 때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성전의 입구에서 구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애인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낮은 대우를 받은 이방인보다도 더 낮은, 고립되고 소외된 곳에 있는 자였습니다.
이자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 같죠. 날 때부터 장애인이며, 그 장애 때문에 성전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반 강제적으로 성전 밖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자인 것입니다.
결국 그 삶은 세상 안에서 소외받고 고립되는 인생을 만들어버립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는 이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걷지 못했습니다. 혼자 설 수 없었습니다.
늘 누군가에게 업혀야 했고, 늘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그 자리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성전 문턱 하나 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정말 그가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일까요?
혹시... 우리도 그와 다를 게 없는 존재는 아닐까요?
우리는 몸은 멀쩡히 걸어 다니지만,
과연 하나님 앞에 나아갈 힘, 하나님을 향해 서는 용기, 하나님을 찾는 의지가 우리 안에 있는가 묻게 됩니다.
그가 하지 못했던 것, 우리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기도도, 예배도, 제사도, 그저 다른 사람의 등을 타고 겨우 근처까지는 갈 수 있을 뿐입니다.
자기 발로 하나님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 그가 바로 나이고, 우리입니다.
그 사람은 매일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습니다.
단지 오늘 하루 먹고살 수 있는 동전을 기대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하루를 버텨야 하니까.
그런데 그것도 우리와 참 닮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매일같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인정, 관심, 애정, 자존감, 성취, 명예…
하루를 버틸 수 있을 만큼만 채워지기를 바라며,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밉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는 점점 우리 삶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장애인은 아름다운 문 앞에 있었습니다.
그 이름조차 ‘미문’, 즉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름다운 문 앞에서 그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의 상징이, 고통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누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삶’, ‘성공한 인생’, ‘예쁘게 포장된 자리’에 서 있는데도,
그 안에서는 누구도 모르게 앉아 있고, 주저앉아 있고, 걷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그를 거쳐 지나갔습니다.
그의 얼굴은 보지 않았고, 손만 보았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관심은 없고, 단지 그가 ‘그 자리에 있다’는 익숙함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건, 혹시 우리 서로에게도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는 서로를 얼굴 없는 존재로, 도움만 필요한 사람으로, 감정 없이 지나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또는, 누군가 그렇게 나를 보고 있을 때, 나는 그 시선에 지쳐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는 그날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틈에 묻혀서, 그저 또 하나의 풍경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게 자기 삶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이야기는 단지 오래전 성전 미문의 한 풍경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걷지 못했고,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걷지 못합니다.
그는 구걸했고, 우리도 매일 의미 없는 것들을 구걸합니다.
그는 아름다운 문 앞에서 비참했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 틈에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도 그런 외로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가 바로 우리이고, 우리도 그 사람입니다.
🟡 대지 2: 예수의 이름은 능력이자 회복의 통로이다
🟡 대지 2: 예수의 이름은 능력이자 회복의 통로이다
그 장애인은 계속 구걸하던 중 누군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전에 무엇을 경험했나요? 성령이 오시고, 초대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고 많은 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기도하러 성전을 올라갈 때 그들은 미문에서 구걸하는 그 장애인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장애인을 보고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들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행동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사실 장애인이 바라던 것은 은과 금이죠. 그것이 있어야 오늘 하루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이 없다고 말하죠.
베드로가 정말 돈이 없었을까요? 그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애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은과 금이 아니기 때문이죠.
장애인의 비참한 삶에서 정말 필요한 근본적인 문제는 못 걷고 있는 장애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무엇을 줍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으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는 그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세상에서 의미 없는 것들을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가 주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단지 기적을 일으키는 주문이 아닙니다.
그저 “기적을 가능케 하는 공식”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살아계신 인격의 권능이며,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선포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무력한 자를 일으키고, 걷지 못하던 자를 다시 세우며,
무너진 존재에게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자격을 부여하는 능력입니다.
앉은뱅이는 단지 다리에 힘을 얻은 게 아닙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이름이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일어나 걸으라.”
네가 주저앉아 있던 영혼에서 이제 일어나라.
네가 머뭇거리던 그 문을 넘어, 하나님 앞으로 들어오라.
예수의 이름이 너를 회복시키고, 너를 자격 있는 자로 세운다.
🟡 대지 3: 예수의 능력은 인격을 회복시키고 공동체를 세운다
🟡 대지 3: 예수의 능력은 인격을 회복시키고 공동체를 세운다
우리는 여기서 공동체적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보려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왜 계속해서 보였을 구걸하는 장애인을 딱 이 타이밍에 보게 되었을까요?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있을 때 비로소 그 장애인을 향한 손길을 뻗을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은 무엇으로 나타날까요?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신학자이자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에서 일어났던 대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영적 지도자로도 많이 잘 알려져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뿐만 아니라 이곳저곳 모이고, 부흥사들은 그곳에 가서 설교를 선포합니다.
설교를 들은 많은 자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며,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이 운동의 파급력이 어마어마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집회들 가운데에서는 초대교회와 같은 신비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환상을 보 거나, 방언을 하거나, 강한 감정을 표출해내거나 단체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말 대단했던 것은 무엇이었냐면 그 현상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성경과 이성에 근거하여 그런 모든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책을 통해 말합니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 분별법”이라는 책을 통해 나타난 현상을 직접 경험한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분별해냅니다.
그중 확실한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있는 표지들을 말하는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PPT
1. 예수 그리스도의 높임 (Exaltation of Christ)
1. 예수 그리스도의 높임 (Exaltation of Christ)
2.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
2.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
3. 성경에 대한 사랑과 순종
3. 성경에 대한 사랑과 순종
4. 변화된 삶과 열매 (Holiness and Fruit)
4. 변화된 삶과 열매 (Holiness and Fruit)
5. 타인을 향한 사랑과 공동체성 (Love for Others)
5. 타인을 향한 사랑과 공동체성 (Love for Others)
우리가 한번 집중해볼 것이 바로 5번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함이 확실하면 어떤 것이 일어납니까? 성령 충만의 확실한 표지는 능력을 발휘하고, 기적을 보이고, 환상을 보는 신비로운 일에 있지 않습니다.
“타인을 향한 사랑과 공동체성”이 나타나는 것에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기적이 있죠. 장애인의 장애를 고쳤습니다. 회복이 일어났죠.
그런데요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충만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잊혀져있던, 소외되어있던,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완벽한 타자인 장애인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회복되었던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인을 일으켜서 자신의 발로 직접 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성전 공동체 안으로 직접 들어올 수 있도록 공동체성을 회복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화
마르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말한, 그의 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유명한 말이 있죠.
PPT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교회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이 땅에서 참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 소외된 그 자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 장애인일 때 교회 공동체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참된 삶입니다. 우리는 그 참된 삶을 통해 교회의 삶에 흡수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소외된 그 자를 만나러 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된 삶입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은 우리의 삶에 함께 하게 됩니다.
적용)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오늘 본문을 통해 보면 베드로는 말로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장애인의 오른손을 직접 잡아 일으킵니다.
PPT
조재천이라 신학자는 이 행동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몸짓은 말보다 더 깊이 인격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공동체는 어떻게 회복될까요?
공동체는 말로만 회복되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손을 내밀어 일으키는 관계성”을 통해 복음을 구현해나갑니다.
직접 움직이는 회복의 손길을 통해 공동체는 회복됩니다.
여러분 이 교회를 들어 “사도적 공동체”라고 많이들 얘기합니다.
교회가 사도성을 가진다는 것이죠.
사도성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에 의미가 있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봤을 때 사도성은 어떻게 드러납니까? 공동체를 향한 회복의 손길을 통해서 사도성이 드러납니다.
여러분 이 청년부 공동체가 사도적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로서 인정받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향한 회복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공동체 가운데 혹은 공동체 밖에서 우리의 예전 모습과 같이 영적 장애를 가진체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소외되고, 고립되어 살아갑니다.
복음이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지 모르고 세상의 것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그들에게 손을 내미셔야 합니다.
그들이 성전, 하나님을 만나는 임재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공동체 내외로 소외된 그들을 향해 손길을 뻗으세요.
그리고 뻗은 손길을 통해 예수의 이름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의 회복으로 공동체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결론
오늘 말씀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그 말은 단지 기적의 장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이 ‘몸으로’ 실현된 순간입니다.
말만이 아니라, 손을 내밀어 직접 붙잡고, 일으키고, 끌어안는…
**‘만남의 복음’, ‘인격의 복음’, ‘공동체의 복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 문턱, 우리 시선 밖, 우리 마음 밖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손은 내가 아니라 너희의 손이다.
내가 너희를 일으켰듯,
이제는 너희가 누군가를 일으켜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손을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다시 하나님 앞에 서고,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그 회복의 다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