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전투함이 하나님 나라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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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일상에서 전투함이 하나님 나라의 증거다
세상의 수많은 이념들은 나름대로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분투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이념들의 충돌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정치”라고 하죠. 그래서 정치는 늘 시끄럽습니다. 전쟁과 갈등이 없는 나라를 상징적으로 “유토피아”라고 하죠. 아이러니하게도 유토피아로 나아가기 위해선 전쟁과 갈등이 필요한 것이 이 현실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이웃과 정치적 갈등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겠죠. 교회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권력을 가졌을 때 종종 복음이 훼손되곤 했습니다. 늘 경건한 자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서에 이렇게 말하죠. “경건한 자들이 끊어졌다”(미 7:2)
오늘 바리새인들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그 중 사마리아인 한 명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사건이 등장하죠.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이렇게 천하고 더러운 사마리아인을 구원하는 그 하나님 나라가 언제 실현되는지 비꼬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따져 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20절에 뭐라고 대답하시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믿으시나요? 참 은혜가 되죠.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약간의 두려움도 느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심판’도 임했다는 것을 뜻하거든요.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이 말은 즉슨, 믿음이 있는 자들한테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 게 아니란 거예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는 심판이에요. 지금 세상은 이미 심판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 심판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억하세요. “평안”입니다. “평안”이 심판의 모습이에요.
예레미야 48장 1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애굽, 모압, 바벨론 등 열국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데, 모압을 어떻게 진단하냐면 “평안하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는 “샬롬”이 아니라 “샤안”입니다.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는 상태, 침입도 전쟁도 없는 상태, 포로가 된 적도 없는 상태를 의미하죠. 왜죠? 강대국 의존으로 인한 자기만족이 그들의 영적 쇠락을 초래했습니다. 강대국이 보호하고 있으니 포로된 적도 없고 평안했죠. 이것이 그들의 심판의 이유입니다.
진정한 평안(샬롬)이 무엇일까요? 25절 읽어볼까요?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평안에는 전쟁이 있어요. 가난한 자가 있어요. 고난이 있어요.평안해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그 전쟁을 말씀의 전신갑주로 승리하는 겁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살리시는 겁니다. 전쟁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으니 보기에는 부족해 보이죠. 하지만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것, 이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내 삶이 고요하고 평탄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죠. 반드시 고난이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이 진리를 증거하시기 위해서 이것이 구약의 성취라는 것을 이렇게 증명하세요. 26-30절까지 같이 읽어봅시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게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여러분, 심판의 징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압과 같이 아주 평범한 평안한 일상입니다. 노아의 심판 때 사람들은 평범하게 먹고 마시고 결혼도 했습니다. 소돔의 때에도 사람들은 평범하게 생활 했습니다. 그러다가 심판이 왔죠.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 지금, 신앙으로 분투함이 없는 그 평범한 일상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우리 대신에 순종하셔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의 방주를 만드셨습니다. 오히려 평탄한 일상, 안주할 수 있는 일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롯은요? 하나님을 등지고 나아갔던 롯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그 일상으로부터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얻었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평범한 삶도 희생할 수 있는 것이죠.
때로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의 삶을 흔들 때가 있습니다. 믿는 게 아니라 믿어지는 은혜 때문에 노아처럼 세상을 거스르고 방주를 홀로 외로이 지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상태이신가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계신가요? 그래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계신가요? 오늘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평안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으로 주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런 은혜를 저와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다면 일상에서 전투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목숨을 보전해주는 일상에 속지 마세요. 33절 이렇게 말씀하죠.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생각나는 말씀 있지 않습니까? 에스더 4장 16절이에요. 하만의 모략으로 인해 페르시아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더가 자기의 목숨을 버리기로 각오하고 왕에게 나아가죠.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살게 되고 하만은 죽게 됩니다. 4장 16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죠?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지켜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모두 무너진 것 같은 포로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신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읽으면 역사책 읽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에스더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이 제사장 나라는 옛날 다윗 시대처럼 왕정체제와 같이 어떤 정치적인 체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비록 나라가 없어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토도 없고, 왕도 없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지켜졌습니다. 대적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고, 신앙도 지키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페르시아가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정치가 아닙니다. 각자 있는 자리에서 믿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지만 하나님이 에스더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전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작은 희생과 헌신을 통해 오늘 있을 모든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보전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희생할지 고민해 보세요. 일상에서 어떻게 분투하실지 고민해 보세요. 그리고 꼭 마음에 새기세요. 그 고민과 분투가 구원의 증거입니다. 삶이 평탄해지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다가 안주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이 가지고 나오신 기도제목들, 번뇌와 고민들, 그걸로 인해서 여러분이 지금 포기하고 있는 것들, 바로 그것들 덕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는 귀한 성도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