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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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7–11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오늘도 함께 찬양으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저는 이자리에 설 자격도 없고 실력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라 믿기에 담담히 복음만 전하기를 원합니다.
함께 읽은 오늘 말씀은 우리가 참 좋아하기도 하고 심지어 믿지 않는 분들께서도 잘 아는 말씀을 한 구절 더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좋지 않습니까? 위로가 돼요. 다 주신데요.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산상에서 하신 설교 중 한 부분이죠. 참 유명하고 많이 사용되고 소비되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중에 하나라고 본다면 좋잖아요. 복잡한 어떤 해석이 필요한 말씀같지도 않고 단순하게 구하면 주고 찾으면 찾고 두드리면 열린다.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사실 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더 적나라하게 표현해서, 이렇게만 하나님이 일해주신다면 소원이 없겠어요. 내가 찾고 구하는거 다 주시고 도전하고 두드리고 하는 모든 것에 마치 문이 열리듯이 촤악 들어가라 이런 음성이 들리면서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 짧은 인생에서 가장 이 말씀이 간절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면 저는 미국밖에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좋은 환경과 조건을 누리며 살 수 있었음에도 제 부족함 때문인지 그게 하나님의 강한 이끄심인지는 몰라도 정말 ‘광야’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뚝 혼자 남겨진것과 같은 시간들을 지내면서 외롭더라구요. 도움이 간절했고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라는 생각을 넘어서서 아무것도 하기 싫고, 뭘 해야할지조차 모르겠는.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딘가. 두 아이와 아내는 저만 보고 있는데 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됐고 지금 뭘 해야 하며 앞으로 어떡하지라는 끝없는 고민속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땐 정말 기도가 안나오더라구요. 아니, 뭘 구해야 할지조차 불분명 했었습니다. 돈을 달라하자니 뭔가 제가 싫어하는 번영신학 같고, 평안을 달라 하자니 그게 지금 내 현실적 상황에 아무 도움도 안될거 같고. 정말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사람이 가난해지더라구요. 주머니도 가난한데 마음까지 가난하니까 참 제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짧은 제 이야기지만 아마 들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어쩌면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깊은 아픔과 고난속에 계셨거나 혹은 지금 그 한가운데 계시는 분이 있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한없이 그 문제와 고난에 짖눌려서 마치 땅바닥에 눌어붙어 밟히고 더럽혀져서 절대 떼어질거 같지 않은 껌딱지 같이 내 자신이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가운데 이 구하라 주신다 이런 말씀은 누군가에게는 사막 속 단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너무 좋은거죠. 하나님이 주신다고? 아 지금 집세가 없으니까 구해봐야 겠다! 지금 내 딸이 깨어나질 않는데 하나님께 구하면 주신다니까! 기도해야겠다. 여러가지 제 상황을 대입해서 하나님께 간청하고 간구합니다. 또 그런 전설적인 이야기들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기도 응답을 받은 사업이 잘되고 암세포가 사라지고 자식이 서울대가고. 그런일이 나에게도 이뤄지길 바래보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죠.
그러나 그 일이 나의 고난의 현장에서 시원하게 응답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기도의 부족함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믿음의 부족함이라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더 섬겨야 하고 더 충성해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그것해서 하늘이 감동하겠느냐. 지성이면 감천인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 그 정성 안봐주시겠냐 하며 잘못된 복음을 전하고, 그 간절함에 눈이먼 우리는 더 그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되죠. 율법주의에 덫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약간은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했지만, 제가 했던 이 고민과 씨름이 결코 저만의 고민이 아니라 생각해서 함께 나눕니다. 그래서 기도는 그래서 어떻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사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해보면 구해서 받지 못한것보다 안구해도 주신것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 생각해 보셨나요? 구하면 정말 주실까? 라는 질문에 앞서 ‘안구해도 주실까?’라는 질문을 해보는거죠. 저는 이 질문 앞에 어쩌면 제가 겪은 고난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은 구해도 안주심 때문에 겪은 일이라 할 수 있다면, 반대로 제가 경험한 수없는 아름다운 기억들 추억들 시간들은 구하지 않았음에도 주심으로 발생한 일들이었다는 것이죠.
이 말은 결국 ‘구함’과 ‘누림’은 공식적으로 상관관계가 없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까지 좋은 목사님과 좋은 교회를 만나게 해달라고 사실 구한적이 없거든요. 왜냐면 제 욕심이라고 생각을 했기때문에 이런 상상 이상의 환경을 바란적이 없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근데 반대로 미국에서 영주권 받고 저희 가정 전부가 국제적으로 살기를 간절히 원했었거든요? 저는 한국에 절대 안오려 했습니다. 거기서 멋들어진 솰롸솰라 하면서 그게 멋있어 보여서 간절히 구했었어요. 물론 제 선택으로 돌아왔지만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구했지만 받지 못함과 구하지 않았음에도 주심에 관계성을 찾는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어찌 판단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힘들고 어렵고 고난속에 사는 사람과 기도하지도 않고 신앙생활도 엉망인데 승승장구하는것과 같이 보이는 사람들이겠죠.
다시 말해 하박국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처럼,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당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 괴로울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단순히 절박한 사람에게 구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는대로 다 채워주실 것이고 돈이고 건강이고 성공이고 원하는대로 다 찾게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면, 대체 뭘 구해야 하고 뭘 원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이 말씀 이후 9절부터 말씀에 그 예수님의 의중이 정확히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예시를 들으면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이야기 하죠? 아들이 떡을 달랬는데 돌 줄 부모가 어딨고, 생선 달랬는데 뱀 줄 부모가 어딨느냐? 정상적인 부모라면 그렇지 않겠죠. 아들과 사랑하는 관계안에 있는 부모라면 설령 돌을 구해도 떡을 주실 것이고 뱀을 구한다 해도 맛있는 생선을 주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그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어떻겠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너희 아버지시고 그 관계를 확실하게 붙들고 나아가라는 믿음의 메시지 이고 또한 그 하나님께서 육적인 아버지 그 이상으로 선하신 분이라는 인격적인 신뢰를 요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대상에 대한 관계적 확신과 선하신분이라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 이 본문을 구하는대로 주시고 찾는대로 찾게 하실 하나님만 강조한다면, 하나님을 램프의 지니, 무슨 돈넣는대로 주시는 자판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닌 분으로 만들어버리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죠.
여러분 저는 무언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옆집 아저씨를 찾지 않습니다. 저희 부모님을 찾죠. 뭔가 구할 때 집 앞 편의점 아저씨를 찾지 않습니다. 관계가 없잖아요. 저희 아이가 자다가 실수를 해서 이불이 젖었을때 밖에 나가 이불가게 문을 두드리지 않습니다. 엄마를 찾죠. 도와달라고. 해결해달라고.
아이가 밖에 나갔다가 길을 잃어 버렸을 때 그 아이에게 필요한게 집에가는 차편이나 지도입니까? 부모입니다. 전쟁통에 혼자 남겨져 배가 곯아 땅을 파먹는 아이에게 필요한게 진수성찬 귀한 한 끼입니까? 부모입니다. 그 관계적 이끄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구하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때로 우리가 우리의 원함을 구할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것을 주십니다. 왜요? 우리 아버지니까요. 구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 구함으로 인해서 사람이 관계를 얻게되고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좋은 것’이 다름아닌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제 더 이해가 쉽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단순히 거룩하게 그 어떤것도 구하지 말고 오직 말씀만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놀라우시고 계획하심 이런것만, 아뇨. 구하세요. 무엇이든 간절히 주께 구하시고 찾으시고 두드리세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왜요? 그래야 그것들 주시니까요? 아뇨. 바로 그 구하는 자가 관계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구함을 통해서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 아버지니까.
당장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 치며 벗어나려고 이겨내려고 발악을 하는 우리입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죠. 하지만 그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단순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의미이고, 그 문제 가운데 계시며 문제 위에서 일하시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은 단순히 외적인 현상으로 나의 소원이 이뤄졌다거나 병이 나았다거나 하는 현상적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게 된 나의 내면의 변화’가 참된 기도의 응답일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기도 응답은 “내가 이미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완악한 내가, 하나님 없이 잘 살던 내가, 구하지도 않은 것 잘 받아 누리면서 살던 내가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
나치 치하에 있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 하나님의 침묵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어두운 숲속에서도 아빠의 손을 꼭 붙잡고 잇는 아이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숨통을 조여오는 고난에 마주 서셨다. 그러나 그분은 절망을 외치실 때도 골고다 허공에 대고 하신 게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고 아버지를 부르셨다.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으신 것이다.”
이분이 말한건 불안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격동기에 이 설교를 하셨는데 숨이 조여오는 현실의 상황 속에서 우린 모두가 불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불안이라는 말 자체가 영어로 앵자이어티 라는 말인데요, Anxiety. 이 말의 유래가 숨통을 조인다는 뜻의 라틴어 앙구스티애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숨을 조이고 숨이 좁아지니까 시야가 좁아지고 답답하고 미치겠는거죠. 이건 두려움이랑은 다릅니다. 두려움은 확실한 대상에 대한 후차적 현상이라면 불안의 원인은 그야말로 막연해요. 왜인지 모르게 그냥 숨막히고 그냥 따분하고 그냥 답답합니다.
결국 이 불안은 우리의 영혼을 매마르게 하고 희망도 힘을 잃게 되고 당연히 그 안에 기쁨과 평안은 씨를 마르게 되겠죠.
2차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상황 더욱이 독일의 상황은 어땠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 정치가 어렵다 혼란하다 하는데 비교가 안되죠. 미래가 없었습니다. 처절한 실패 뿐이었습니다. 당시 크리스챤들의 심정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보다 더 절망감이 있었을까요. 마치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보며 외쳤던 하박국과 예레미야의 심정이 그랬을까요. 하나님 이게 무엇입니까.
틸리케 목사님은 그런 불안이 가득찬 세대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의 불안은 바로 그 끝없는 공허, 말없는 허무, 그리고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기인한다.
여러분 세상이 왜 허무한줄 아십니까? 왜 참된 기쁨이 없다 하는줄 아십니까? 왜 그 안에 참된 평안이 없다고 하는 줄 아십니까? 아버지는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끝없는 공허뿐이고 말없는 허무 뿐입니다. 그것은 오직 염려라는 열매만 낳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죠? 오늘 본문 앞서 미리 말한겁니다.
마태복음 6:25–2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경은요 처음부터 끝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바로 이 아버지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불안하신가요? 여러분 불안을 물리치는 유일한 긍정적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1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날 사랑하심 그 자녀됨의 관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사랑 성도여러분. 구하십쇼. 찾으십쇼.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주십니다. 찾게 하십니다. 문을 열어주십니다. 구한 것을 넘어선 가장 좋은 것을 말이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우릴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곧 성령하나님과의 동행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게 나에게 가장 좋은것입니다.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눈치볼게 뭐가 있습니까? 내 아버지 하나님인데.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저를 본 순간 저에게 달려와요. 아빠! 부르면서. 사람이 뭐 걸리적거리고 길을 막고 방해하면 막 밀치면서 저만 보고 달려와요. 그리고 안깁니다. 그게 아빠죠. 안겨서 뭐해요? 막 말해요. 아이스크림 사달라 과자달라 자전거 사달라 밖에서 밥먹자. 그럼전 뭐라합니까? 응 안돼. 집에서 먹을거야. 밥먹고 아이스크림 줄거야. 너 감기걸려서 안돼. 관계입니다. 소통입니다. 사랑입니다. 좋은걸 주길 원하지 나쁜걸 주기 원치 않아요.
여러분 그 아빠 하나님께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십니다. 독생자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분 아니십니까?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길 원합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걸 다 들어준다는 말보다 이 말이 더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모든것 주셨으며 끝까지 사랑하시고 함께하신다. 그래서 기도할 때 구한 것을 반드시 주신다는 확신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선하셔서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놓지 않으신다는 확신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의 확증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말입니다.
함께 이 찬양하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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