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18) 우리를 고치시는 예수
Notes
Transcript
이전보다 못한 병자의 삶
이전보다 못한 병자의 삶
38년이나 한 자리에서 누어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양문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구약시대에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할 때 가장 먼저 공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장소이고,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꼭 필요한 양들을 사고 파는 양 시장이 위치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을 양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또 유명한 명소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베데스다’입니다.
이 베데스다라는 연못은 가끔 물에 움직임이 있었는데 아마도 물에 기포가 생기거나 물에 흐름으로 인한 소용돌이와 같은 현상으로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천사가 물을 움직인 것으로 보고 그곳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고침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마치 교회와 닮았습니다. 자기가 고침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각자의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주변에 모여있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맹인, 다리저는사람, 혈기마른사람 등이 다 몰려있습니다.
그 중에 38년이나 한 자리에 누워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3일만 한 자리에 누워있어도 얼마나 몸이 불편한지 우리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온 몸에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한자리에 누워있었다.
가족들이 돌보는지 어쩐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가족들도 외면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병자를 예수님은 ‘보시고’, ‘아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누워있을 때, 일할 때, 밥먹을 때, 아플 때, 기쁠 때, 행복할 때 항상 보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신다.
그래서 그 사람께 다가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랬더니 병자의 대답이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라고 말했다.
그는 연못에 들어가지 못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이렇게 누워서 지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38년된 병자의 모습이 꼭 우리의 모습같다.
우리는 누구나 오래된 죄의 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 때문에 겪게 되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에 관하여 힘들어 하면서도
때로는 익숙해지고, 때로는 팔자려니 생각하며 옆에 있는 다른 환자들을 보고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 약함을 고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잘못알고 있다.
마치 이 병자와 같이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갔으면 내가 이렇게 안사는데 누가 물에 한번만 나를 넣어주면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여 곧장 자리를 들고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기뻐하고,
이와 같은 능력을 우리 삶에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 복일까요?
이것이 신앙의 결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약40년 동안 누워있던 사람이 걷게 된 것이 마냥 기쁜 일일까요?
사람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병자에 관한 기록도 이곳 외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고침받고자 하는 갈망이 절정에 있었을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장 순종함으로
평생 앓고 있던 불치병과 같은 질병이 고침을 받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성전에서 또 한번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또 한번 이 사람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런데 이전과 다르게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장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더 능력있고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는 유대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예수를 고발합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염치가 없을 수 있습니까?
자기가 평생 겪은 질병을 고쳐준 분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며 은혜를 갚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그 은혜는 나몰라라 하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고발하다니 재정신으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일로 인하여 예수님은 박해를 당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병자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아마도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떤 여파를 몰고 올지 모르고 행동하는 무지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계속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병이 낫고 나자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이렇게 무지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고,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이전에는 병이 들어 누워있으니 구걸이라도 해서 살았겠지만 이제는 사지가 멀쩡해졌으니 구걸도 할 수 없고, 눈치도 없고 배운 것도 없어서 이전보다 더 삶이 막막해졌을지도 모릅니다.
두번째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주시기는 했지만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니 무언가 큰 잘못이 일어난 것 같은데 예수를 고발하지 않으면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튈 것 같았거나 아니면 그를 고발할 때에 몇푼의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육체의 질병을 가지고 예수님께 계속 메어달리는 삶이 복되다고 생각됩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라는 말은 예수님의 섬뜩한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잘 하시지 않습니다.
두 번 비슷한 예로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한 가지는 간음한 여인을 구해주시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우에는 여인이 확실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마태복음 12장 38절 이하에 기록된 내용인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자 예수님께서 설명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그런 자들은 마치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 쫓겨난 이후에 머물곳을 찾아 헤메이다가 다시 이전에 있었던 사람에게 가보니 그 집이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어 전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도 적용되며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으로 오늘 베데스다 연못에서 치유받은 병자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이 사람은 병을 고침받는 은혜와 동시에 예수님을 경험하게 되는 영적인 경험을 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는데
자신이 회개하고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순종의 삶이 아니라 곧장 세속적인 삶으로 돌아가 살아버리다 보니 이전보다 더 영적으로 혼탁하게 되어 이제는 전보다 더 형편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인하고, 고발하는 것만큼 큰 죄는 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제목을 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계속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손수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이 말이 바로 답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려 하였지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법이며 동일하게 우리도 예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시니 나도 한다’는 순종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연결고리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대로 하셨으며,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유혹도 물리치시고, 기적도 행하시며,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뜻대로 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며,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행할 ‘순종’의 제목은 십일조와 수요예배입니다.
저는 전하는 것이 제 역할이기 때문에 계속 이 씨름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와 예수님을 연결시키는 링크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더 심한 것이 생기기 전에’
회개하고, 죄사함 받아 예수님께서 인도함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