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품위 있게, 질서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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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있는
질서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혼돈의 카오스’를 아시는가? 혼돈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하면 카오스다. 혼돈은 무질서한 상태를 말한다. 말 그대로 혼돈의 혼돈, 무질서의 무질서가 혼돈의 카오스이다. 혼돈의 카오스는 이럴 때 쓰인다. 어떤 가족 단톡방에서는 엄마가 “오늘은 저녁 뭐 먹을까?” 아빠는 “짜장면”, 누나는 “나 다이어트 중”, 외삼촌은 뜬금없이 강아지 사진 올리고, 할머니는 이모티콘을 막 던지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가족 단톡방은 혼돈의 카오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또 친구들이랑 5명이서 치킨을 2마리 시키려고 했는데, 한 명은 양념, 한 명은 후라이드, 한 명은 간장, 한 명은 뿌링클 이렇게 서로 각자 먹고 싶은거 말하다가 계속 결정을 못하고 결국 싸움나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상황이 결정도 못하고 이상하게 흘러가는 혼돈의 카오스이다. 그러니 단톡방에서 엄마가 저녁 뭐 먹을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서로 다른 소리를 이야기하거나, 친구들과 치킨을 먹는 상황에서 각자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말하면서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은 무질서한 모습 그 자체이다.
오늘 여러분이 읽은 고린도교회의 모습도 사도 바울이 봤을 때 이런 혼돈의 카오스와 같은 모습이었다. 교회의 상황은 이러했다. 은사주의가 아주 강했던 교회였다.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선물’이라는 뜻이다. 누가 주신 선물인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 선물은 일반적으로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영생’이라는 구원의 선물을 모두에게 주신 은사이다. 그 중에 하나님이 특별히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 주신 선물은 이러한 것들이 있다. 예언의 은사, 치유의 은사, 여러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 그 방언은 통역하는 은사,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 믿음 생활 잘할 수 있도록 돕는 은사 등 교회 안에 성도들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에게 특별히 주신 선물이다. 그런데 유독 고린도교회에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던 교회였다. 사람은 뭔가 특별한 선물을 받으면 뭔가 자신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이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은사가 없는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를 못받았다고 수준이 낮은 것처럼 여기거나, 내가 받은 은사가 더 대단하다고 여기며 서로 싸우는 교회며 분쟁을 일으킨 교회가 당시 고린도교회 상황이었다. 그러니 내가 맞다, 네가 틀리다하며 싸우는 모습이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특별한 선물,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모든 믿는 사람이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말한다. 성령님이 은사를 주시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모두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주셨다. 은사의 특징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 각 사람들에게 알맞도록 다양하게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각자 가진 은사를 비교하거나 은사가 많고 적음으로 신앙이 성숙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은사는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함께 신앙생활하는 모든 사람, 곧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기서 무엇을 세운다고 말하는가?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덕은 세상에서 말하는 ‘좋은 사람이 되자’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믿는 자에게 있어서 덕이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살아가려는 인격적 자세와 실천, 즉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드러나는 성품”이다. 우리는 이러한 덕을 가지며 세워가야 한다. 신앙의 덕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세, 도덕적 덕인 정직, 절제, 인내 등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드러나는 바른 행동, 영적 덕인 사랑, 자비, 용서 등 성령의 열매를 맺고, 공동체적 덕으로 교회와 이웃을 섬기고 서로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사랑 가운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받은 은사는 성경 말씀의 권위 아래 겸손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과 다르게 사용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에서 바울은 내가 생각할 때 화가난건지, 기가찬건지 그런 심정으로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다. 함께 읽어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여기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 말하는 것은 “너희에게서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발생한다고 여겨서 교회의 문제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 진리가 너희에게만 유일하게 임했다고 생각해 마치 세상에 너희 말고 다른 믿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을 고집할 것이냐?”라며 물어본다. 다시 아까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선물’이라고 했다. 그것이 내가 뭘 잘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로 거저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라고 주신 것인가?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덕을 세워가야 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신 질서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교회에서 서로 화평하도록 섬기라고 했지, 누가 신앙이 좋은지 비교하며 은사가 있는지, 없는지 그 사람을 판단하라고 주신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성령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았는데, 그들은 교회에서 다투고 분쟁하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질서가 깨진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며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스스로 선지자라고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신령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성령으로부터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너희가 진정으로 그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알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쓴 고린도전후서가 자신의 사적인 편지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사도 바울의 편지가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그는 성령이 그의 속에서 역사하지 않는 자임을 스스로 분명하게 보여주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교회에 있는가? 나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인가, 옆에 있는 친구와 중고등부 공동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전도사님이 여러분만 할 때, 중학생 쯔음에 교회에서 이런 모습들이 있었다. 마치 방언기도 하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대단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방언 받았냐고 물어보면서 방언을 안받았다고 말하면 “신앙생활 뻘로했네”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사도 바울이 이 모습을 보면 미치고 팔짝 뛸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방언을 한다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기 바란다. 예언하는 사람이든, 방언하는 사람이든, 은사가 있든지 없든지 모든 크리스찬들은 다 똑같이 예수를 붙잡는 인생들이다.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 그렇게 살려고 아둥바둥하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신앙생활의 기준은 없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며 14장을 마무리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여기서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사도바울이 1절에서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여기서 무엇을 제일 먼저 추구하라고 말하는가? 사랑을 추구하라고 한다. 신령한 것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 그러니 은사를 사모하는데 그중에 특별히 예언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예언이라는 것은 무슨 점쟁이처럼 당장 일어날 미래의 일을 말하라는 예언이 아니다. 성경 인물들도 예언을 할 때 점쟁이처럼 말하는 예언이 아니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인가?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어떻게 되는가? 성취되었고, 앞으로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취된 말씀인 구약과 성취될 말씀인 신약 아니겠는가?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언제인지는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지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그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사모해야할 은사인 ‘예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예언이라는 단어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여러분의 입술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방언에 대해서 말해준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누구에게 한다고 하는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임재하셔서 그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방언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당시 제자들과 사도들이 방언을 하게 된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방언이 필요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서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고, 통역도 파파고를 통해서도 쉽게 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린 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성령으로 은밀하게 비밀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어릴 때 한창 방언기도가 유행할 때 어떤 권사님이 방언하는 법을 알려주시겠다고 “그랬을까, 안그랬을까”를 빠르게 말하면 방언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마치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가 잘 먹히는 것처럼 말하는 시대에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방언으로 기도하면 더 잘 들으시고, 한국말로 기도하면 아쉬워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여러분들은 한국말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추천한다. 내 기도를 옆에서 들을까봐 걱정되어도 괜찮다. 우리가 소리를 내지 않아도 침묵으로 기도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기에 작은 침묵으로 고백하는 기도도 들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권하는 40절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이 보통 품위가 있는가? 매일 장난치고 말을 함부로하고 진지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품위 있는가? 전혀 아니다. 품위 있는 사람은 한 마디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공동체에 피해가 될 것 같으면 절제하는 것,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가려가면서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것, 진지해야할 상황과 장난칠 상황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그에 맞게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품위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된다. 사실 전도사님은 장난끼가 많아서 품위있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그러나 품위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너무나 가벼운 사람이 되어 사람들이 쉽게 무시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질서 있게 하라고 말한다. 질서의 반댓말은 무엇인가? 무질서이다. 질서가 없다는 것은 쉽게 말해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통이 질서가 있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질서를 잡는가? 법으로 질서를 잡는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교회에서 신앙생활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법인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기준을 가지고 와서 각자가 생각할 때 좋은 것들을 추구하면 기준이 흐려져 혼돈의 카오스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민주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다. 우리는 신본주의를 따른다. 누가 기준이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 고민하는 삶 살길 바란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라 그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오늘의 말씀 제목도 ‘믿음으로 품위 있게, 질서 있게’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 없다. 말씀을 읽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말씀 속에서 예비해주신 은혜들을 날마다 누리시는 저와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