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엉킨 목적
Notes
Transcript
20250611 주일설교
요한복음 5장 1-9절
“믿어야 할 믿음”
오늘도 함께 찬양으로 또 말씀으로 은혜 나누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늘 설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설교 자체가 떨린다기 보다는 참 제가 뭐라고 여러분께 이렇게 선포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말씀만 붙들며 오직 복음만 전달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희 집은 저까지 3대째 신앙 생활을 하는 집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께서 젊으실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평생을 신실하게 믿음생활 하시다가 작년 말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소천하셨는데, 할머니께서 저를 초등학교까지 쭉 키우셨거든요.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그래서 제 어린 기억에 할머니 손잡고 다니며 기억나는 것은 늘 교회였습니다.
저희 할머니도 우리 권사님들처럼 늘 비가 오나 눈이오나 새벽예배, 새복지단 쌓으러 가야 한다고 늘 가시고 수요예배 금요철야 토요성경공부 주일은 1부2부3부 식당봉사 오후예배 또 옛날에는 저녁예배도 있었잖아요? 참 지금생각해도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섬기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특히 제가 기억나는건 그당시에는 그렇게 부흥회가 많았던거 같아요. 지금은 제가 잘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기도원이나 어떤 산속에 있는 그런 수도원들이 있으면 거의 365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흥강사님들이 부흥집회를 쉬지않고 하셨어요. 기억 나시나요?
저도 그래서 이제 제가 뭐 감기걸렸다, 아니면 어디 종양이 났다 그러면 병원도 병원인데 일단 목사님한테 데려가서 안수기도 받고, 그래도 안나으면 한의원 가서 침맞고. 지금생각하면 항생제 한번이면 나았을거 같기도 한데, 신앙과 한방의 힘으로 이기시려교.
또 기도원을 그렇게 데려가셨데요. 제가 어릴때 자세하게 기억은 잘 안나는데 머리 무스를 발라서 쫙~ 올빽머리하신 양복입은 분이 주여~~~~~~~~~ 하고 있고 옆에서 장구치고 꽹가리치고 그런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저는 이제 거기서 기도받는거죠. 감기귀신 떠너라고. 저는 막 경기일으키고 무서워서.
사실 그런 약간 토속적인 무속신앙이 섞인 기독교 형태가 예전에도 참 많았고 오늘까지 이어지기도 하는데, 저는 이런 신앙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어떤 이런 굿판같은 분위기나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예배의 모습이 문제라기 보다는, 부르짖고 간구하고 주 앞에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자세는 같지만, 그 모든 목적과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며 진리를 간구하기 보다는 닥친 문제의 현상을 치료하고 개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게 됨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봐야 하는데, 하나님보다 커진 나의 문제에 압도당하는 것이죠. 이것이 야기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믿음의 대상과 목적이 흐려지게 되면서 상황에 따라 우리의 만족과 기쁨이 이랬다 저랬다 하게 되고 내 신앙의 열정과 헌신도 내가 바라고 구하는 것의 성취도에 따라서 오르락 내리락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태가 좋아서 하는일도 잘 돼고 건강하고 자식들 잘 되고 하면 축복이고 은혜였다가, 갑자기 일이 꼬이고 고난이 오고 몸이 아프고 사고가 나면 하나님의 돌보지 않으심이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에 대상이 잘못되고 목적이 잘못되면 일어나는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죠.
이로인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적 기쁨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으로 성공하거나 쾌락에서 얻어지는 기쁨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내 존재적 기쁨을 말합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서 바울이 말한 기쁨이죠?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의 하나님께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 뭐 안에서요? 믿음 안에서. 충만케 하신데요.
교회를 다녀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기쁨이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 기쁨은 단순히 그냥 하하하 웃고 무슨 일이 닥쳐도 괜찮아~ 잘될거야 하는 긍정적인 태도를 말하는게 아니거든요. 반대로 하나님 믿었더니 병이 낫고 없언 애가 생기고 취직이 되고 사업이 성공하고, 그런기쁨을 말하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소망에서 오는 기쁨. 내 지금의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 소망의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그 하나님안에서 주어지는 깊은 관계적인 기쁨을 말하는 거죠. 절망적인 상황에서 목숨걸고 믿음을 지키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외쳤던 그 믿음으로 비롯되는 참된 기쁨과 평강의 비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읽은 본문에서는 참 절망적인 배경 상황이 등장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 북동쪽에 양의 문이라 불리는 문이 있었는데 그 근처 큰 연못 두개 중 하나인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당시 이곳은 요즘 말로 병자들에게 핫플레이스 같은 곳이었는데요, 여러분도 만약 누가 무릎 잘본다더라, 이빨을 잘 본다더라 하면 다 거기 찾아가지 않습니까? 낫고 싶으니까.아프니까.
당시에는 지금처럼 병원도 없을 뿐더러 여기 소개되는 병자들의 리스트를 보시면 사실상 지금 의술로도 고치기 어려운 심각한 중증 환자들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중풍병자) 같이 당시 사회에서 신께 저주받았다고 평가를 받는 병들이었어요. 근데 이들이 이렇게 사회에서 버려져서 이곳에 모여있는데 그 이유가 참 묘 합니다.
요한복음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렇죠. 병이 낫는다는 전설의 이야기가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 무슨일이 여기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한번씩 물이 요동치는 때가 올때 누군가 천사를 봤다 그러고 어떤 몇몇은 그와중에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겁니다. 거기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 선착순으로 그사람만 치료를 해준데요. 말도 안되는 소리같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연히 중증 환자들에게 소문이 돌았고 지금처럼 의술이 있지도 않았던 당시 환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걸고 거기 머물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죠.
과연 누가 이들을 향해 어리석다 무의미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환자들은 그곳에 모여 서로의 아픔을 때로는 위로하고 같이 슬퍼하고 또 희망을 나누면서 어쩌면 동료이자 친구같은 사이가 되어서 서로 힘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병원에서도 입원 며칠 같이 하면 친해지잖아요. 기약없는 그 고통을 서로 동여매듯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물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과 같이 느껴질 때, 아마 그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낫는다니까. 어제까지 함께 교제하고 떡을 나두던 옆 환자는 이제 가장 큰 라이벌 경쟁자게 되어 버립니다. 왜요? 내가 나아야 한니까. 나의 아픔이 치유되어야 하니까. 혹시라도 누가 가장 먼저 들어가서 그 도파민에 취해 나았다! 소리라도 지르면, 그를 향한 축하와 격려 보다는 질투와 시기, 그보다 먼저 들어가지 못한 자책만이 가득했을 듯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이곳에 있는 유일한 목적과 이유는 오직 ‘그들 자신’ 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쩌면 이 베데스다 연못의 모습이 이 땅 교회의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아픔과 소원을 들고 나아옵니다. 누군가에게 참 열심히 빌고 빕니다. 신비한 일하심을 간구합니다. 그러다 혹시나 누군가가 일이 잘 풀리기도 하죠. 간증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부러워 하죠. 나도 그런 경험 하고 싶어 합니다. 다 좋아요. 그런데 거기에는 오직 ‘나’밖에 없는 신앙뿐입니다. 그 모든 소원과 간구가 나의 잘됨이고 주인공과 목적이 나인 신앙이라면 그곳에 하나님은 어디계신가요? 철저히 도구이신거죠. 나를 도와주셔야 하는 분. 나에게 은혜 베풀어야 하시는 분. 왜요? 선하시니까. 좋으신 분이시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병도 고치시는 능력의 하나님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이시죠. 이게 종이한장 차이인데 엄청난 차이를 낳게 됩니다. 그런 하나님이니까 나를 치유해주세요와, 그 하나님 자체를 찾고 구하는 모습은 전혀 다르겠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뭐하십니까 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부끄런 모습뿐인게 우리의 모습이고 믿음인 것 같습니다. 참 선한것 하나 없죠. 그런 우리를 주님은 어떻게 보실까 참 부끄럽습니다.
근데 여러분, 과연 이 절망속의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 해서, 이들에게 어찌 신앙이나 목적을 점검하라 감히 말할 수 있을 까 싶습니다.
사실,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 비뚤어진 나의 목적을 바꾸자 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하는 것이죠. 안돼거든요. 안 바껴요. 제가 워낙 식견이 좁고 부족해서 그런진 모르겠는데, 그냥 일순간의 정신승리만 되더라구요. 조금 여유있을 땐 모르겠지만, 이들과 같은 상황에서 당장 상황이 내 몸뚱아리 하나 못챙길 정도로 어렵고 당장 내가족 내자식 내 회사 내 삶 내 미래가 엉망일때, 대체 우리가 어떤 화려하고 거룩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럴 능력이 있음 당연히 했을거 같아요. 그럴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음 했겠죠. 애초에 이 병자들도 아프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랬겠죠. 더 좋고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살았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누가 원해서 그런 상황에 처했겠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때로 이 바램 자체가 나의 믿음부족으로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아,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것이다. 내가 신앙이 깊어지고 말그대로 믿음이 좋아진다면, 이 결핍이 사라지지 않을까? 노력도 해봅니다. 그리고 또 고민합니다. 우리가 과연 그 모든 결핍과 욕구를 초월해서, 거룩하고 영광된 것만 구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존재인가?
그러나 여러분 사실 우리는 이 결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원해서 병을 얻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원해서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상을 살아감에도 마찬가지죠. 임종을 앞두신 노인부터 이제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분명 원하는것과 소망과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노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부자와 가난한자, 신분의 차이와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죠. 마치 독일 철학자 아놀드 겔렌이 ‘인간을 “결핍존재”’ 라고 표현한 것처럼 우리에게 이것은 땔래야 땔 수 없는 내제된 성질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아프고 낫고 싶고 잘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본문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베데스다에 모인 이들은 누구보다 그들의 결핍을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었다면 그곳에 있지 않았겠죠. 그들이 원해서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그들의 능력으로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자들도 아닙니다. 그저 그 결핍을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만 가득한 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결핍 해결의 목적만 가득한 존재들이 모인 곳에 예수께서 친히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 한 병자가 있습니다. 무려 38년된 병자입니다.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모르지만 누워 있다 한걸 보아 다리가 불편한 환자 같아요. 다리가 불편하니까 당연히 물이 요동칠때 일등으로 갈 수도 없고 어쩌면 그래서 자기는 낫지 못해 이러고 있다며 반쯤 포기한채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환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 절망의 환자에게 물으시죠.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누군가에게는 참 어이가 없는 질문처럼 들릴 수 있지 않을까요. 38년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계셨을거라는 거죠. 물으나 마나 한 질문 아닐까요. 그의 일생의 소원일겁니다. 그가 지금 바라고 있는 소원에 100%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오직 그 이유때문에만 여기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여기에 예수님의 이 물으나 마나 해보이는 질문 속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엄청난 위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주님의 그의 필요를 아셨고, 물으셨고, 관심을 가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 아셨을거잖아요. 그 환자가 왜 거깄는지. 어떤 목적으로 있는지. 그래서 물어본겁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저는 이 질문이 너무 따뜻하게 들려요. 우리의 결핍을 물어봐주시는 거잖아요. 너 이 문제가 힘들구나. 너 이게 필요하구나. 혹여나 “너 영생과는 상관없는 목적을 가진채 헛된것만 구하는구나!” 라며 우리를 정죄하고 꾸짖지 않으셨다는 거죠.
그런데 이 예수님의 질문앞에 환자의 대답이 조금 엉뚱합니다. 7절에 말합니다.
요한복음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냥 낫고싶다 하면 되는 걸 뭐라고 뭐라고 막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분은 이걸 보며 기도의 구체성과 정확성을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주님께 원하는것을 구해야 한다. 혹은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병자의 영적 어두움을 이야기 하기도 하는데,
사실 저는 그보다 낫고 싶냐는 질문에도 횡설수설하는 환자의 외적을 넘어선 내적으로 병든 지독한 상태가 보입니다. 그는 무려 38년 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쇼. 그가 그 긴 세월 안해본 일이 있었을까요? 온 가족이 그 병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모든 의술이나 민간요법 다 해봤겠죠. 그러다 하다하다 안돼서 지금 여기 반송장처럼 누워있는 것 아닙니까. 실낫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여기에 누워있는것이죠. 마치 오늘 먹을 식비도 변변찮으면서 몇만원들여 복권을 사는 사람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낫고 싶냐는 뻔한 질문 조차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낫고 싶냐는 질문에 내가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병인지 연못에 가지 못함인지도 구분조차 가지 않는 상황.
그는 병이라는 자신의 문제를 안고 이곳에 왔지만, 언제부터인가 낫고 싶은 열망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연못으로 가야 한다는 열망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물에 먼저 내려가는 것을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순회설교자 노진준 목사님은 이 모습을 “생명에 대한 소망을 잃은 자들의 열망”이라고 말합니다. 뒤엉킨 믿음 목적을 가진 자들의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문제는 때로는 좋지 못한 학벌이 되었고, 때로는 많지 않은 재산이 되었고, 때로는 나보다 잘나가는 사람들이 되었고,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문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잔뜩 꼬여버린 채 무엇이 문제인지도 해결책인지도 모르는 그에게 예수가 찾아오신것이죠.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8–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한은 이 병이 나은 것을 굉장히 짧고 축약적으로 설명합니다. 여러분 그에게 있어 진정한 축복은 38년된 병이 낫는게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병은 낫습니다. 그건 그저 수단이고 과정이며 현상일 뿐입니다. 당장 앞서 요한복음 4장에서 그런 현상과 기적만을 쫒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기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찾아오신게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목적만을 갖고 있던 병자같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예배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는게 축복이자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큰 기도 응답은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그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나의 모습. 내가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께 이 일로 말미암아 간절히 찾고 부르짖게 된 것.
후에 이 일로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걸로 시비 삼아 유대인들에게 추궁받는 병자에게 예수께서 또 다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14절입니다.
요한복음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리고나서 15절에 유대인 앞에서 병자가 하는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는 안식일 법규를 위반함으로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었지만, 목적이 바뀐 그에게 두려움은 사라지고 담대함만 남습니다. 단순히 병이 치료된 것을 넘어서 그는 예수를 만난 자로 변했습니다. 병고침만이 목적이었던 그에게 예수가 찾아가 주셔서 친히 그의 목적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두렵고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의 뒤엉킨 목적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 앞에서도 뒤엉킨 목적을 내밀며 그것에 대한 해결점을 구하지 못해 낙심하고있는 병자였습니다. 인생의 행복이라는 열망은 지금보다 조금만 더 풍족해 지길 원하는 열망이 되어 나보다 더 가진 자들을 보며 낙심하게 됩니다. 건강히 자녀를 양육해야 겠다는 열망은 누구보다 남부럽지 않은 자녀로 키워야 겠다는 열망이 되어 더 잘나가고 잘해주는 부모를 보며 낙심하게 됩니다. 항상 누군가 나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 같아서 더 빨리 움직이는 물 속에 들어가지 못한 나를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좌절합니다. 좌절하는 내가 싫어 또 좌절합니다. 그저 물가에 누워있는 심정으로 건조한 하루하루가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런 어쩔 수 없는 결핍 속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은 오늘도 예수께서 그의 의지와 선택으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사로운 결핍을 꾸짖기 보다는, 그보다 더 어쩔 수 없는 결핍, 죄로 인해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우리의 영원한 사망의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십니다. 당신의 일방적이고 성실하신 사랑과 인내하심으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사랑 성도여러분. 자녀의 손을 잡아 이끄는 것은 부모의 힘이지 아이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를 잡는 힘을 빼더라도 그는 우리를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목적이 뒤엉켜 있더라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목적은 태초부터 정하신바 영원토록 이어집니다. 그게 우리가 가진 축복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병자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다시는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늘의 영광만 구하며 살았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또다른 결핍을 느꼈을 테고 뒤엉켜 보이는 목적과 씨름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일으키신 그 예수를 늘 기억하며 넘어진 그곳에서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나아갔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수믿으면 축복받아서 부자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믿으면 부자가 못되어도 생명되신 예수로 인해 참된 자유와 진정한 자존감을 회복하게 된다는 말이 맞습니다.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극심한 병마 가운데에서도 영생의 관점을 얻어 낙심치 않고 함께하시는 예수로 힘입어 설령 죽음 앞에 설지라도 담대히 주와 함께 설 수 있다는 말이 맞습니다.
예수 믿으면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그 모든 주어진 문제를 넘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게 됨으로 영생의 관점으로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 맞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고 병이 낫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게 진짜 예수를 믿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분석하지는 않겠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하는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난해도, 병들어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오늘도 저처럼 너무 연약해서 여전히 뒤엉킨 목적을 버리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며 살아가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은 여전히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걸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