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답게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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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역대상 16장 23-43절
제목: ‘가장 나답게 사는 법’
[서론]
요즘 ‘결혼지옥’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최근 어떤 부부가 등장했는데, 남편은 아내를 향해 끊임없이 비난과 조롱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 말에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합니다. 아이가 셋이고, 그중 한 아이는 자폐를 가지고 있어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너무도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말이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는 활기차고, 당당한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역할 너무 무겁고 오래 지속되면, 역할이 점점 정체성을 잠식하고, 결국자기 자신 잃어버릴 있구나.
아내는 ‘엄마’라는 역할, ‘헌신자’라는 이미지에 갇혀, 원래 자신의 감정, 생각, 존재감을 더 이상 꺼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삶은 계속되지만, ‘ 점점 사라져 가는 것, 오늘을 사는 많은 우리 모습과 닮아 있지는 않을까요?
당시 역대기를 읽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오긴 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였고, 성전은 예전만 못했고, 왕도 없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제 실패한 민족이다. 하나님의 백성? 웃기지 마.”
그 말이 반복되다 보니, 이스라엘도 정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사라지고, 그냥 주변국의 하나, 페르시아 안의 종속된 존재처럼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역할 파묻혀정체성 잃어갈 때가 많습니다. 학생, 직원, 부모, 자녀, 리더, 봉사자… 우리는 수많은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역할이 어느 순간 진짜 나를 가려버립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정의하려고 합니다. “넌 이런 사람이야. 그 이상은 안 돼. 너는 여기까지야.”
그렇게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갈수 있을까요?
[첫번째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잠시 살펴 보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옮기는데 성공합니다.
언약궤는 겉으로 보기에는 단지 가로 120센티, 세로 70센티 정도 되는 직사각형 상자입니다.
하지만 이 상자는 단순한 종교적 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의 상자입니다.
역대상을 보면 언약궤 이야기를 몇장에 걸쳐 설명합니다.
왜일까요?
언약궤가 단순한 상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 다윗은 언약궤를 자기 마음대로 옮기려다 실패합니다.
그는 그 사건을 통해 한가지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마음대로 조종할수 있는 분이 아니구나.”
아무리 훌륭한 다윗일지라도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바꿉니다.
율법에 따라 언약궤를 옮길 때 레위인들을 세우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결국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데 성공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벤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신호인 것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다윗은 예배를 멈출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찬양대를 조직하고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그 찬송이 바로 16장 8절부터 36절까지 이어집니다.
놀랍게도 이 찬송은 사무엘서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오직 역대기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역대기에는 다윗의 찬송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찬송이 너무나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의 지배하에서 쭈구리같던 그들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기억해야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우리 정체성을 회복할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존감을 높이려 애를 써도, 세상의 소음들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흐름에 스며들고 맙니다.
그럴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주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예배는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다 희미해진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기억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기억하며 내가 누구인지 되찾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종속된 존재가 아닙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 살지만 물에 질식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 기억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본론]
그럼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길래 그 분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31절입니다.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서 외치며, ‘주님께서 통치하신다’고 만국에 알릴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느 한 민족, 한 국가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온 세상의 통치자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찬송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노래가 아닙니다.
모든 민족과 나라, 온 하늘과 땅, 바다와 들 그리고 모든 피조세계가 불러야 할 찬송입니다.
예배입니다.
그런데 당시 역대기를 읽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는 하나님보다 제국의 신들이 더 위대해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초라한 패배자의 신, 찌그러진 민족의 신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세상을 심판하시는 온 우주의 통치자 왕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기억의 행위입니다.
예배는 세상이 가린 우리의 눈을 다시 밝히는 것입니다.
거짓에 가려진 진실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워십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worth라는 단어, 즉 가치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가치만큼 인정하는 행위가 바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온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찬송과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질수 있는 순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죄로 인해 창조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을 예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공, 돈과 권력, 쾌락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예배하던 삶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이 해야할 가장 본질적인 행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을 높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이 아닌 것들의 무가치함을 선언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를들어,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한다는 것은 서로를 선택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거절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우상들과 결별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는 우상을 분별하고 제거하는 힘이 됩니다.
예배는 우리의 영적 시력을 회복시켜 줍니다.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 무엇이 거짓된 유혹인지 분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수 없습니다.
예배는 선택입니다.
예배는 선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이시라는 진리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내가 은혜를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우상들과 단절을 선언하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나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세번째 본론]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5-36절입니다.
“너희는 부르짖어라. “우리 구원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여러 나라에 흩어진 우리를 모아서 건져주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해주십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영원토록 찬송을 받아 주십시오. 그러자 온 백성은 아멘으로 응답하고, 주님을 찬양하였다.”
갑자기 찬송이 기도로 바뀝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자, 구원자, 심판자라고 말하면 멀게만 느껴질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크고 높아 내가 감히 다가설수 없는 높은 분이라고 여겨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이 기도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지만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작은 신음조차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35절을 보면 ‘우리’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모아서 건져 주십시오.’,
이것은 이 기도가 한 개인의 기도가 아닌 공동체의 기도임을 말해줍니다.
역대기를 읽던 백성들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흩어진 민족들을 모아주셔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기도는 결국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민족을 불러 모이셔서 찬송과 예배를 받으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온 세계의 다양한 민족들이 나라들이 함께 주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신음과 고통을 듣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여전히 돌보고 계신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예배 속에 기도가 빠질수 없는 이유입니다.
[네번째 본론]
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복을 나눠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43절입니다.
“그런 다음에, 온 백성이 각각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고, 다윗도 자기의 집안 식구들에게 복을 빌어 주려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이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성대한 예배가 끝난 뒤, 백성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윗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자기 가족들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해산이 아닙니다.
예배의 절정은 주님께 받은 복을 나누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은 왕이지만 동시에 제사장입니다.
그는 문지기를 세우고, 제사장들을 배치하고, 레위인들을 악기 연주자로 세웁니다.
왕인데도 예배 인도자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왕이 바로 이런 왕입니다.
그렇다면 왕이자 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왕처럼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세워주십니다.
그리고 예배때 받은 복을 제사장이 되어 나누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복을 말하면 건강, 재물, 성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그것을 넘어섭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자체가 가장 큰 복이자 특권입니다.
다윗이 예배를 마친 후 가족을 축복하러 돌아간 이유는
예배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삶의 자리에서 흘려보내기 위함입니다.
예배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복을 받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마친 후 우리가 받은 복을 삶의 현장에서 나누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줘야 합니다.
예배는 복을 누리고 나누는 삶의 시작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왜 예배해야 합니까?
일주일 내내 바쁘고 지친 삶을 살면서도, 왜 굳이 시간을 떼어 주일마다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까?
우리는 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여 예배해야 합니까?
예배는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예배는 세상에서 무너진 우리의 진정한 삶의 리듬과 박자를 찾는 시간입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금 조율하고 나의 고유한 색깔과 모양을 다시 확인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다시 기억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 붙입니다.
‘넌 세상에 쭈구리야, 넌 먼지같이 가치없는 존재야, 너 하나 없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나 예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인간이 할수 있는 최고의 것이야. 너는 이미 성공한거야’
우리는 예배를 통해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 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세상에 그 복을 흘려보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삶이 되고,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삶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최고의 예물이 됩니다.
예배를 통해 최고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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