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눈뜨기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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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정말 눈뜨기 원하십니까?(순종하세요)
요한복음 9장 1-12절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강단에 종을 세워주셔서 말씀을 함께 나누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남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저는 유년부를 섬기고 있는 정평강 전도사입니다. 오늘 처음 강단에 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는 14살에 서울로 올라와서 성실교회를 처음 다니게 되었습니다.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랑을 많이 받았구요. 그렇게 자란 성실교회 다음세대이기도 합니다. 또 이제는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이지만, 사역자이기 전에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 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고 싶은 한 명의 성도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성도님들과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참 기쁨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가 받은 은혜를 성도님들과 잘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하철을 타면 지하철 안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출퇴근하는 사람도 있구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도 있구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 또 구걸하는 사람 등등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맹인이면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찬양을 틀고 한 손에는 바구니와 다른 한 손에는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지하철의 끝에서 끝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 도와드리지 못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이렇게 몸이 불편하거나, 집안이 어렵거나,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사회적 약자라고 이야기합니다.
1. 눈먼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맹인이 눈 먼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말씀에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맹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맹인은 가난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 8절에는 이웃들이 맹인에 대해 ‘구걸하던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구걸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아마 먹는 것이 가장 급한 문제가 아닐까요? 맹인은 아마 배가 고팠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눈을 뜨는 것보다 먹는 것이 더욱 시급한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맹인이 있던 마을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호기심이 생겼는지 맹인에 대해 물었는데요. 당시 유대인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이라구요. 그런데 특별히 맹인에게 궁금해 했던 이유는 이 맹인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이 자가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런 질문이 굳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제자들이 맹인이 부모의 죄이든, 자신의 죄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제자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맹인에 대해 굳이 물어보는 모습은 호기심 밖에는 없어보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나요? 그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았을까?, 십일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은 걸 거야, 주일 성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등등 어떤 사람의 상황을 보고, 벌을 받았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보통 죄를 지어서 병에 걸리거나 아프다는 생각을 가졌는데요. 출애굽기 34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맹인 자신의 죄도 아니고, 맹인의 부모의 죄도 아닐지는 모르지만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죄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맹인이나 그 부모의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은 제자들의 잘못된 질문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맹인을 변호하고, 위로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맹인의 아픔을 이렇게 진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맹인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일입니다. 또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기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아 알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2. 눈뜨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눈을 뜰 수 있게끔 하는 방법으로 침과 흙과 물을 선택하셨는데요. 맹인의 눈에 침과 흙을 바르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유대인들도 침은 더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누군가에게 침을 뱉는 행동은 무시를 하는 행동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안그래도 더러운 침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흙과 섞어서 눈에 발라준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제가 맹인이라면 기분이 좀 나빴을 것 같습니다. 모기에 물리면 침을 바르거나 손톱으로 십자가 모양을 만드는 거랑 비슷한 걸까요?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구약성경에서도 여러번 나오고 있는데요. 그 중에 구약성경에서 엘리사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을 직접 치료해주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서 7번 몸을 씻으라고 말하였죠. 나아만은 즉시 순종했을까요? 아닙니다. 엘리사의 행동에 분노하였고 그의 종들의 설득에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요단강에 들어가 7번 씻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7절)“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말씀을 보니까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과 명령에 맹인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어디에도 불평이나 다른 어떤 말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그저 순종한 것이지요. 그리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침에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흙이나 연못에 약효라도 숨어있던 걸까요? 그런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예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 가장 탁월한 군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휘관이 물었습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시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장교들은 이 군인, 저 군인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지휘관은 말했습니다.“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고귀한 일인 것입니다.”
군인에게는 명령에 복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듯이
성도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순종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무엘상 15장22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5장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맹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소외당하고 부정당하던 인생 속에서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즉시 순종하였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분명 보아야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실로암 못에 물이, 예수님의 침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맹인의 두 눈을 뜨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 능력이 있음을 믿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어둠 속에서 빛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정말 눈 뜨기 원하십니까?
눈을 뜬 맹인의 이웃들은 맹인을 앞에 두고 수근거렸습니다. 맹인이 눈을 뜬 것을 도무지 믿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맹인을 앞에 두고서 직접 물어보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8절과 9절을 보면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인은 내가 그라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어떻게 눈이 떠졌느냐는 질문에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의 말에 순종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맹인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눈을 뜨기 원하나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눈 뜨기 원하지 않습니다.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형제에게 심부름을 요청했어요. 슈퍼에가서 케찹을 좀 사오면 좋겠구나, 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알겠어요. 그리고는 tv를 계속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동아, 그냥 네가 다녀와라. 제가 왜요. 형 한테 다녀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동생은 심부름에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하나님께 원합니다. 주세요. 기도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원하는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맹인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만약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눈을 뜨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듯 우리도 예수님께 순종의 말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과 속 모두 보십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우리의 삶에 받아들일 수 없는 순종도 하나님께 드릴때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순종은 가끔은 버겁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순종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눈을 뜰 수 있는 길입니다. 겉으로는 아멘. 하였어도. 내가 하기 싫은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눈을 뜨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눈을 뜨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맡겨 드리시길 바랍니다. 성령님께 마음을 만져달라고 요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속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솔직하게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바꿔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걸음으로 인도해주실 겁니다.
불만이 가득한 심령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시길 바랍니다. 불만 가득한 심령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흘러가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삶은 그리스도인 다운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순종으로 의도적으로 또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적극적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어렵다면 역시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마음이 기도로 이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따라 살아가기보다. 하나님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4. 나의 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답을 찾으세요.
이웃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맹인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맹인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명명하고, 맹인의 눈을 뜨게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 했습니다. 자신들의 답을 가지고 맹인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부정했고, 다시금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 맹인에게 질문했습니다. 맹인은 육신의 눈도 떳지만 영적인 눈도 밝아졌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라며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나의 답을 가지고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별로 믿어지지도 내키지도 않는 일들은 무시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 모순이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분이니까요. 맹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믿을 때에 우리의 영적인 시야가 넓어지고, 비로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을 보기 원하시나요? 나의 답은 잠시 치워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항상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고, 말로 다른 사람의 신앙과 믿음을 무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