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13. 금요리더모임. 리더의 품격 ④ – 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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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본문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서론
서론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근 한 달 만에 이 자리에서 만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헌신하며 열심히 살아오다가 이렇게 다시 모였는데요, 우리 먼저 서로 위로하며 격려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고생 많습니다. 덕분에 너무 행복합니다.
텀이 좀 길었지만 우리가 어떤 말씀을 나누고 있었는지 금새 기억해낼거라고 기대해도 되겠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리더의 품격"이라는 주제로, 하나님 나라의 리더로서 꼭 갖추어야 할 성품들을 하나씩 살펴왔습니다. 지난 모임까지 말과 행실, 사랑과 믿음을 나누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순서로 "정절"이라는 성품을 다루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절’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뭔가 숨이 턱 막히고, 벌써부터 나는 자격이 없다고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물론 우리의 삶이 우리의 소원만큼 따라주지 않아서 그럴 수 있습니다만, 저는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 특히 정절이나 거룩함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이것도 하면 안되고, 저것도 하면 안 돼. 그건 죄야.”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신앙을 오직 ‘제한’과 ‘금지’로만 이해하는 오해가 숨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 누군가는 신앙을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것을 억누르고 포기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바른 신앙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어떤 가치와 의미가 그저 ‘하지 말아야 할 것들’로만 설명된다면, 그건 너무 빈약하고 초라한 것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연애를 하면 내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지금 연애를 쉬고 있는 분들도 연애 중이라고 가정하고, 누군가가 이렇게 물어온다고 상상해봅시다.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가 너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란 걸 어떻게 표현하고 있어?” 근데 이 때 대답하는 말이 온통 이런 것들 뿐인겁니다. “나는 다른 남자, 다른 여자는 쳐다도 안봐. 눈 돌리게 될까봐 인스타도 안하고, 유튜브도 안보고, 다른 남자-다른 여자랑 카톡도 안해”
이게 전부일까요? 연애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만 가득한 것이고, 이런 것들만 잘 지킨다고 해서 건강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게 전부라면 그 사람의 연애는 참 빈약하고 볼품없는 겁니다. 건강한 연애는 이런 것이겠죠. 그 사람이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기쁨과 행복을 나누고 싶은 것.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삶을 쏟는 것. 그렇게 건강한 연애를 하는 사람에게 다른 남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두고 내가 다른 사람도 만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겼다고 생각할 리 없습니다. 그냥 그건 당연하게 깔고 가는 것이고, 내 사람을 더 기쁘게 하기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살겠지요. 이렇듯 건강한 연애는 부정적인 언어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겁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중요한 분이 되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신앙을 “이것도 하면 안 되고, 저것도 하면 안 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런 삶을 두고 하나님 때문에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뺏긴 것처럼 느낀다면, 아직 그 사람의 신앙은 초라한 수준인 겁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은, 결코 억지로 정절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의 삶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이 정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정절은 금욕적인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다시 말해, 온갖 ‘금지’와 ‘제한’을 억지로 따르는 모습이 아니라, ‘내게 가장 소중한 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헌신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는 리더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주제를 말씀 안에서 더 깊이 살펴보며, 정절이 왜 리더에게 꼭 필요한 성품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억지가 아니라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을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1
본론 1
우리가 “정절”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대부분은 성적인 순결 같은 단편적인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사용하는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퀴즈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정절”이라는 단어의 뜻과 기본적인 뉘앙스를 공유하는 단어 두 가지를 맞춰보세요. 힌트를 드리자면, 이 단어들은 모두 두 글자이며, ‘구별됨’이라는 의미와 연관이 깊습니다. 무엇일까요? 정답은 바로 ‘거룩함’(ἁγιότης, hagiotēs)과 ‘성도’(ἅγιος, hagios)입니다.
본래 그리스어로 이 세 단어를 살펴보면, 모두 ‘ἁγ-’이라는 공통의 어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 단어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상태’라는 의미를 중심에 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거룩함’(ἁγιότης, hagiotēs)은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성도’(ἅγιος, hagios)는 그 거룩한 하나님께 속함으로 인해 세상과 구별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정절’(ἁγνεία, hagneia)는 성도로 구별된 자, 곧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로 거룩함을 나타내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정절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절을,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삶이라는 더 큰 그림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그림을 잘 보여주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절부터 봅시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들을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신 그 극진한 사랑을 전제로, 이제 성도들이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야하는지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입은 자는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이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삶, 다시 말해 하나님께 속한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구체적인 일상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해 ‘이것도 하면 안되고, 저것도 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삶으로 하나님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온갖 ‘금지’’와 ‘제한’을 억지로 따르는 모습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의 모든 일상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삶 자체가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삶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절은 이처럼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알기에 스스로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태도입니다. 유혹을 참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기꺼이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바울은 곧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했지, ‘세상을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 정절의 방향입니다. 정절은 세상과의 관계를 온통 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 중심의 세상의 흐름을 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것을 반대하며, 우리 스스로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려는 죄악의 물결이 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정절은 이런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살아가겠다는 삶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정절한 삶의 방향은 언제나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의 가치에 맞춰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찾아내고, 그 뜻을 따라 기꺼이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정절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마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자신을 정결하게 준비하는 신부의 삶과도 같습니다. 신부는 신랑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오직 신랑에게 속한 자로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신부는 마땅히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신부가 정절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문이란 문은 다 걸어 잠그고 방 안에 틀어박혀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신랑이 기대하는 신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신랑은 신부가 자신을 향한 사랑을 품고 밝고 건강한 일상을 살아내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때때로 시험과 유혹 거리가 찾아올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신랑에게 속한 자’답게 정절을 지켜내는 모습을 기대했을 거라구요.
사랑이 깊을수록 유혹은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세상 한복판에서도 자신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을 품고,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우리의 일상을 기꺼이 드리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정절의 모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헛된 제안을 쏟아냅니다. 욕망을 따르라 하고, 쾌락을 좇으라 하며, 책임 없는 자유를 즐기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이미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날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몰두하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성품은 정절합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정절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먼저 이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정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자신을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절한 성품이 물든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한 번쯤 사모해볼 만한 삶 아닙니까?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정절을 지켜가는 그 삶 속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과 깊은 만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론 2
본론 2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정절’이라는 개념이 쉽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랫동안 ‘거룩’과 ‘정절’을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 어떤 것들을 하지 않는 것으로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연 이것이 진짜인지 우리에게 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피며 따져보려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18절과 19절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철저히 금욕적으로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두고 “귀신 들린 자”고 비난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삶 속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먹기를 탐한다”, “술을 즐긴다”, “죄인의 친구다”라고 손가락질을 당셨습니다.
이 장면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자를 결코 바르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처럼 살아도, 예수님처럼 살아도, 세상은 언제든 비난할 거리를 찾아냅니다. 언제든, 무엇이든 걸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정절한 사람이었을까요? 만약 그가 정절한 사람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만일, 세례 요한이 세상과 거리를 두고 금욕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정절했다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정절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예수님은 완전한 정절의 본이셨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모두 정절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지금까지 익숙하게 여겨온 정절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정절은 단순히 절제하거나 세상과 거리를 두는 태도를 뜻하지 않습니다. 정절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태도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삶의 자리에서였지만, 똑같이 ‘정절’을 지키셨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마주한 유혹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체성과 사명을 지키느냐 못지키느냐에 대한 싸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을 지키느냐 못지키느냐에 대한 싸움이 아니었지요.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 속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주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고, 주께서 오신 뒤에는 기꺼이 잊혀지는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어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그립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의 존경과 기대 속에 중심에 서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고백하며, 자신이 완전히 잊혀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자신을 내어드렸습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정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라”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가 죄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삶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기꺼이 십자가에 오르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 어찌 사람들에게 오해와 비난을 사는 삶이 달가우셨겠습니까? 인기와 지지를 얻기 위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유혹이 없으셨겠습니까? 죄인들과 함께하면서 죄가 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왜 마음이 동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시며, 물과 피를 다 흘리시기까지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에 자신을 내어드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절입니다.
우리가 받는 유혹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흐리게 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만족과 욕망을 좇게 만들어,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바꾸어 놓으려 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에서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체성과 사명을 놓친 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결과일 뿐입니다.
결론
결론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이제 다시 돌아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진정 정절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정절은 단지 죄를 피하거나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성품입니다. 세례 요한은 정절한 성품을 갖췄기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더욱 분명한 정절의 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함께하셨지만, 그 안에서도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방탕하거나 자유분방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날마다 하나님의 기쁨을 자기 기쁨으로 삼으며, 죄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것이 정절입니다. 단지 내가 하면 안되는 것들을 피하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분별하여 그 뜻에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성품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저마다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 유혹은 때로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일 수 있고, 때로는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를 받고 싶은 마음일 수 있으며, 때로는 순간의 쾌락과 욕망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최선의 방어는 공격입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소극적인 회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헌신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날마다 기억하고 확인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 기꺼이 내 삶을 드리는 것이야말로 정절의 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성품이 되도록 훈련하십시오.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오늘 비록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긴 하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 자신을 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태도이며 성품임을 모르고 있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혹 앞에 흔들리고, 세상의 소리에 길을 잃은 채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우리를 주님은 결코 정죄하지 않으시고, 다시 바른 길을 걷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를 끄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 시간, 무너진 마음을 가지고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혹 주님 앞에 서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잡아 끄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기억들이 있다면,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읍시다. 주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기쁨을 따라 사는 길로 이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정절은 내가 가진 자제력이 아니라 내가 받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 안에서 다시 결단합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나의 삶의 자리에서, 정절의 성품을 나타내는 리더가 되기로 결단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새롭게 세워지는 우리의 정결한 삶을 통해, 우리 공동체가 더욱 순전하게 세워져갈 줄 믿습니다.
기도
기도
그 사랑 + 아름다우신(후렴)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