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19) 죽은 자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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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체념하며 살아가는 시대

제가 주중에 강의를 하러 다니는데
그 중에서 중고등학교 여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번주에 그곳에서 수업을 하고, 쉬는 시간에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저에게 정말로 신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자
저는 이 세상에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지는 것,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스스로 자전하는 것,
중력의 크기와 생명이 탄생하고 죽는 것 등 모든 것이
다 우연이라고 만약 설명한다면
이것은 카드게임을 하는 상대방의 카드가 매번 포카드가 나오는데
우연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운용확률은 그보다 낮기 때문이죠.
우리가 사는 지구의 중력 상수가 지금보다 1조분의 1만 달랐어도 지구라는 별은 형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팽창 속도 또한 10의60승 분의 1만 달랐다면 이 우주는
이미 오래전에 붕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종일 포카드를 친다면 한두번은 나올 수 있겠지만 그것이 2~3회 연속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사는 우주는 그 불가능을 계속 실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납득하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그것이 우연이라고 여기는 것도 황당하지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은 더 황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황당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이전과 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24절에 ‘영생을 얻었고’라고 이미 완료된 형태로 말씀하셨는데
이는 우리의 삶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삶이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이 당연하다거나 우연이라고 치부하며 사는 것이 일반이나
말씀은 우리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의지’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는 ‘죽음’을 피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체념하며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의미를 잃은 노동,
인간의 사회활동이란 돈을 벌기위한 수단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오래 전에 잊어버렸습니다.
그 필요와 중요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체감하고 있죠, 의미가 없는 노동은 로봇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피로를 쌓아 올린 가정,
1. 서로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는 관계
"나는 벌어오고, 너는 아이를 돌보고…"
"그 정도는 네가 해야지."
그렇게 역할이 고정되고, 존재 자체의 존귀함은 사라집니다.
결국 부부는 동지라기보다 파트너가 되고, 자녀는 기쁨이 아니라 과제가 됩니다.
2. 회복의 공간이 아니라 더 지치는 공간
집은 본래 세상에서 지친 심령이 쉬는 안식처여야 합니다.
그러나 피로를 쌓아올린 가정은, 오히려 가장 많이 피로가 축적되는 공간이 됩니다.
말은 줄고, 오해는 늘고, 불만은 쌓이고, 대화는 의무가 됩니다.
가족이 있음에도 정서적 고아로 살아가는 사람들, 가족끼리 있어도 혼자인 느낌—그것이 이 피로한 가정의 풍경입니다.
3. 성공 신화의 그늘 속에 있는 가정
집값, 교육비, 커리어, 사교육, 부모 부양…
그 모든 걸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부부는 감정을 줄이고, 꿈을 미루고, 신앙도 뒷전이 됩니다.
‘가정’이 더 이상 사랑의 집합체가 아니라 현실을 감당해내는 공장처럼 되어버립니다.
진심을 감추는 관계,
주일이면 예배당으로 몸을 끌고 가지만, 마음은 도착하지 못한 채 앉아 있는 사람들.
진실을 감춘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숨기는 것입니다.
“괜찮아”라는 말에 분노가 들어 있고,
“알아서 해”라는 말에 포기가 담겨 있고,
“나중에 얘기하자”는 말은 평생 꺼내지 않을 작정입니다.
이런 관계는 표면적인 평화를 위해 진실을 희생시킵니다. 그 결과, 평화는 커녕 서로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부패해 갑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런 사람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정말 살아 있는가?”

II. 영생은 ‘죽지 않는 생명’이 아니라, ‘살게 하는 생명’이다

우리는 ‘영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천국을 떠올립니다. 죽은 뒤에 가는 곳, 피할 수 없는 심판 후에 겨우 얻게 되는 보상.
하지만 예수님의 선언은 완전히 다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영생은 지금 시작됩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회사에선 자리가 위태롭고, 가정에선 내 자리가 좁아지고, 신앙에선 내 감정이 무뎌지고 있는 이 시간.
그 시간,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하셨습니다.
John 5:25 NKRV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III. 왜 우리는 듣지 않는가?

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정확히 지적하십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상고하지만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요 5:39–40)
John 5:39–40 NKRV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가지만, 예수께는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그 안의 생명을 놓칩니다.
우리는 신앙을 말하지만, 그 삶엔 부활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께 가는 일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 가면 자기 의가 무너지고, 체면, 기획된 인생, 종교적 자부심이 벗겨지기 때문입니다.

IV. 눈 먼 자들의 도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사라마구가 쓴 장편소설로 한 도시의 사람들이 ‘실명’이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모두 앞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 중에 한 여인만 눈을 뜨고 있는데 그녀는 자신도 앞을 못보는 척하며 남편과 함께 수용소에 갖히게 된다.
수용소 안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사람들은 나름의 질서와 체계를 갖추게 되고, 외부에서 오는 일정한 보급품을 받고 살아간다. 그곳은 구역별로 사람들이 나뉘어 지내는데 젊은 남자들이 많이 거주하던 3구역에서 보급품을 독점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들은 식량을 공급하는 조건으로 귀중품을 요구한다.
얼마 후 귀중품이 다 떨어지자 여자들을 요구하게 되고, 다른 구역의 여인들은 식량을 공급받기 위해 자원하여 3구역으로 향한다. 그러다 한 여인이 죽게 되고, 3구역이 갈수록 횡포가 심해지자 눈이 보이는 여인은 3구역의 왕을 암살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암제를 견디지 못하고 수용소에 불을 지르고 군인들에게 호소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수용소 입구를 지키던 군인들이 모두 사라졌다. 눈 뜬 여인은 눈 먼 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오는데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전염병으로 인해 장님이 된 상황에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여인은 마트를 찾아서 식량을 가지고 자신이 살던 집으로 사람들을 안내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처럼 만찬을 즐기며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주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주 오랜만에 진정한 쉼과 회복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계속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며칠 후 가장 먼저 전염병이 발생했던 남자의 시야가 밝혀지기 시작하고, 점차 사람들의 시야가 회복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람들의 눈이 멀었을 때 오는 큰 고통은 사실 시야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상실에서 더 크게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눈이 멀어 부가 탈취되고, 약자는 강자에게 착취당하며,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성적인 노리개가 되고, 인간다운 모습이 모두 사라질 때에 가장 고통받는 존재는 눈을 뜬 사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의 도시에서 생명을 얻는 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동시에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되었을 때 매우 큰 안식과 평안을 얻은 것처럼 우리는 영적인 죽음으로 삶의 의미와 도덕적 책임을 상실한 시대에 교회라는 도피성에 함께 모여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은 그런 사람들이 모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오는 것처럼, 성도들이 모두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으며 나의 영광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에 얻는 참 행복과 안정과 평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죽음 이후에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 뿐만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의미하며,
또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적인 전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고 배우는 것에서 영생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가리키는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 가운데 영생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사는 인생은 결코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우연으로 여기며 살 수 없다.
이것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진 직조물과 같다.
씨줄과 날줄을 하나하나 엮다보면 처음에는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오랜 시간 쌓이다보면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고,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John 1:1–3 NKRV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모든 창조물을 만드시고 운용하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그분께로 나아오는 것이 바로 생명으로 가는 열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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