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할 줄 모르는 죄
신동조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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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 이데올로기
탐욕은 오늘날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력한 힘이다. 왜냐하면 탐욕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은 도덕적 악의 이미지가 현저히 탈색되고, 물질적 풍요와 성장을 이루게 하는 동력을 넘어 일종의 선으로까지 여겨진다. 자본주의는 ‘풍요’에 의존하며 ‘끊임없는 성장’이라는 전제 위에서만 지탱되는 체제이고, 그와 같은 성장에 인간의 탐욕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보다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다. 돈은 탐욕을 확실하게 만족시키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최고 관심사는 자유와 정의 같은 가치에서 돈과 행복으로 대체되었고,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떳떳하게 밝히는 세상이 되었다. 심지어 대학가에서 조차 부자학 (부동산, 주식, 코인)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최근의 사회 분위기는 문화 이상으로 일종의 종교와도 같으며, ‘부자병’이라는 재물욕을 다스리기가 개종만큼이나 어려워지고 있다.
성경 속의 탐욕
성경을 보면 탐욕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나타난다. 구약 성경에는 탐욕의 시험에 빠진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민수기에 나오는 선지자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는 대가로 얻을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모압을 향해 가다가 나귀에게 책망을 받았지만. 끝내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범죄의 길로 이끄는 책략을 제공했다.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여리고 성에서 취한 노획물을 빼돌려 자기 집에 숨기는 죄를 지음으로써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패전으로 이끌었다. 아합 왕은 나봇이 소유한 포도원을 탐하여 거짓 증거로 그를 죽게 하고 결국 그것을 탈취했다. 선지자 엘리사를 들먹여 나아만 장군에게 재물을 받았다가 나병에 걸린 게하시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신약에서는 베드로 앞에서 헌금의 일부를 숨기고 거짓말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있다. 이외에도 잠언과 전도서, 복음서와 서신서들에는 탐욕에 관한 직접적인 교훈과 경고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가르치신 교훈들 가운데에도 탐욕과 관련된 것이 15퍼센트에 해당할 정도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탐욕에 해당하는 가장 정확한 성경 용어는 신약에 나오는 ‘플레오넥시아’이다. 이것은 돈에 대한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뜻한다. 예수님이 형과 유산 다툼을 벌이던 한 사람에게 탐심을 물리칠 것을 권고하실 때(눅 12:15), 그리고 바울이 새사람이 된 성도가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속성 중 하나로 탐심을 언급할 때(골 3:5, 엡 5:5) 바로 이 단어가 쓰였다.
탐욕의 성격과 그 딸들
‘만족을 모르는 재물에 대한 욕구’를 의미하는 탐욕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바리티아’에서 왔다.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강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결코 바다를 채우지는 못하듯이 탐욕도 어떤 것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바다와 같다고 말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속성상 만족을 모르기에 늘 ‘조금 더’를 외치고 ‘이제 그만!’이라고 말할 줄 모른다. (예> 세븐 일레븐) 단테는 윤리적 정치적 차원에서 훨씬 심각한 사회적 부패와 폐해를 낳는다는 점에서, 탐욕을 탐식이나 정욕보다 훨씬 더 악한 죄로 간주했다. 그에 따르면 탐욕은 남과 나누려 하지 않는 ‘인색함’과 오직 자신만을 위해 흥청망청 소비하는 ‘탕진’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런 속성 때문에 탐욕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극도로 제한하고, 한편으로는 도박이나 투기라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분별력을 잃고 이웃의 재산이나 심지어 친구의 배우자까지도 자기 소유로 삼고 싶어한다.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바로 이런 경향을 엄격히 금지한 계명이다.
우상숭배
바울은 탐욕을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이라고 말했고, 아퀴나스는 이 땅의 물질 때문에 영원한 것을 멸시하는 것, 곧 “하나님에 대항하는 죄”라고 규정했다. 교회 전통이 이것을 대죄로 지목해 온 핵심적인 이유는 이 죄의 우상숭배적 성격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탐심은 우상숭배”(골 3:5),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엡 5:5)라고 말함으로써 탐욕과 우상숭배를 동일시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 백성을 언약 공동체로부터 잘려 나가도록 만드는 최악의 죄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탐욕을 우상숭배와 같은 죄로 보는 것일까? 바로, 재물을 탐하는 사람에게 재물은 곧 하나님과 동일한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돈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우리 존재와 삶을 지탱해주며, 인간은 그러한 돈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깊은 평안과 안전감을 주고 미래까지도 보장해준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한 수단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마치 하나님을 의지하듯 돈을 의지하며, 급한 일을 만날 때는 더더욱 하나님이 아닌 돈을 떠올리고 그 힘을 빌리려고 한다. 이와 같은 돈에 대한 사랑은 결국 인간을 돈과 깊이 밀착되게 하고 마음으로 늘 그것을 향하게 만든다. (성경의 예>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 (눅 12:13-21)
소유가 많아지면 하나님을 무시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힘이 있기에 든든하고 자신만만해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목에 힘이 들어가고 교만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에 들어가 물질이 풍요해지고 부유하게 살게 될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미리 경고했다. (신 8:19) 탐욕에 이끌리면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위험성이 크다. 예수님은 탐욕의 이런 성격을 알고 제자들에게 “하나님고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말씀하셨다. 돈의 힘과 효과를 맛본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기 쉽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재물을 섬기게 될 위험이 크다.
소유 양식과 동맹 관계
물욕이 강한 사람은 소유로 자신을 규정하고 또 그와 동일한 관점으로 타인을 대하고 판단하는 성향을 보인다.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 양식’의 삶을 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며, 어떤 동네에서 살며, 어떤 직업을 소유하느냐 하는 것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런 삶의 양식은 대인 관계에서도 드러나는데, 소유 지향적인 사람은 사람을 사귀고 관계를 맺는 일에서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소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먼저 계산한다. 이런 ‘소유 양식’을 선택한 사람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공공 의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참여도 하지 않는다. 자기 소유의 증감과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 신경 쓸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탐욕은 이와 같은 ‘사회적 나태’를 낳고 사회를 점점 더 각박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고립시킨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서 인간 소외나 비인간화 같은 사회악은 사실상 인간의 탐욕과 소유 지향적인 이기적 삶에 상당 부분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
탐욕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은 이웃에 대해 뭊어하고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탐욕을 ‘차가운 마음의 죄’라고 표현했다. 재물에 대한 탐욕은 정작 재물이 필요한 사람을 보지도, 마음에 담지도 못하게 하며, 자연히 가난한 살마에 대해 무정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들은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또 그들은 그 상태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리화하고 외면해 버린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풍요한 나라의 국민들은 빈곤 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별로 의식하지 않으며, 자신이 무한정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예> 지구촌 식량과 자원 사용,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 - 힙없는 국가들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있다.)
탐욕을 이기는 길
1 근원적 안정감과 만족 : 탐욕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이 죄 목록을 전해 준 사막 수도사들이 제시하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을 지키고 삶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마음이다.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이라는 마귀가 사람들에게 찾아와 “남은 긴 노년기, 일할 수 없는 상황, 예측할 수 없는 흉년, 병, 빈곤의 쓰라린 현실, 필요한 것을 남에게 의지하게 되는 처참함”에 대한 근심을 조장한다고 말했다. 이런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그것으로 미래의 안전을 도모하려 한다. 이 말은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을 확보하면 탐욕을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재물은 일시적인 안전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 재물로 안전을 얻으려는 마음은 오히려 더 많은 재물에 대한 끝없는 목마름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해답은 오직, 인간의 영원한 방패가 되시고 피할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 안에 있다. 인간은 전능자 하나님으로 자신을 채우고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을 때만 궁극적 안전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탐욕을 다스리는 근원적인 해결 방법이다. 본래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인생은 하나님과 덜어져 있는 한 근원적으로 불안전할 수 밖에 없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땅의 재물을 많이 움켜진 자들은 마치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선박과 같아서, 폭풍우가 심하게 불 때 난파할 가능성이 무척 높아진다고 말했다. 반면, 재물을 손에서 높는 자들은 날개가 가벼워진 독수리가 더 높이 올라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여 먹이를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삶이 훨씬 더 안전해진다고 했다. 돈을 의지하며 살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이 세상 욕심에서 가벼워질수록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의지하게 되기 떄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라고 말씀하셨다. (마 6:25-33) 바울 역시 재물이 아니라 후히 주시고 평안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살 것을 신자들에게 권고했다. (딤전 6:17)
2 나누기 : 삶을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나누기 위함이다. ‘내 것’을 줄이고 뗴어서 어려운 이웃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다. 나눔이라는 적극적 행위는 탐욕에 대항하는 탁월한 방편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움켜진 손을 펴고 주머니를 연다는 것은 자신이 물질에 사로잡힌 노예가 아님을 나타내는 표시다. 예수님도 탐욕에 대한 처방으로 자기에게 소중한 것을 필요한 자에게 주는 관대함을 제안하셨다. (눅 11:37-41). 남을 위해 자기 것을 뗴어 내는 것은 탐욕으로부터 자신을 뗴어 내는 행위임을 시사한 말씀이다.
나눔은 버리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쌓는 행위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그의 선행을 갚으신다. (잠 19:17)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잠 11:24) 이것이야말로 신자가 배우고 익혀야 할 탐욕을 이기는 역설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다. 탐욕은 끊임없이 소유하고 축적함으로써 인간의 근원적인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도록 인도하지만, 성경은 그와 정반대의 급진적 방식으로 그 필요를 궁극적이고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 필요는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리라” (눅 12:15)
(칠죄종)
(칠죄종)
인색
일반적으로 ‘탐욕’으로 알려져 있는데, 번역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종의 오해라 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영어-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각 언어들의 의미가 와전되어서 중역된 결과입니다. ‘인색’에 해당하는 라틴어 Avaritia는 본래 ‘자신의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고 베풀지 않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색에 해당합니다. 인색은 칠주선 가운데 ‘자선’이 부재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예> 스쿠루지 영감 - 스쿠루지가 회심 후 인색에서 자선하는 모습으로 변화) ‘인색’의 개념을 ‘자신의 것을 아까워하고 남에게 베풀지 않으려는 옹색한 마음’이라고 이해하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그러한 인색함은 항상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스쿠루지’와 같은 구두쇠라도 어떤 이들에게는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주기도 합니다. 어떨 때 그럴까요? 사람은 보통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대상에게는 후하게 베풀고 대가 없이 자신의 것을 나눕니다. 반대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에게는 한 푼도 그냥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인색은 상대적인 것이고, 가치에 따른 판단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치관과 기준을 점검해 보는 좋은 기준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 거리에 노숙자들을 볼때 사람들의 반응) 인색은 단순히 자신의 것을 아까워하고 남에게 베풀지 않으려는 옹색한마음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색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더 정확하게는 그들을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나눠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인 고린도후서는 단순히 인색한 것이 나쁘다라는 원론적인 언급보다는 이러한 인색함이 교회 공동체에 나타나게 된 동기와 원인을 주목하고 설명하는 데 주력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교회 공동체적 해법을 제시하고자 노력합니다.
고린도후서의 배경과 특징
고린도교회는 신약에 등장하는 초기 교회들 가운데서도 매우 독특한 교회입니다. 처음에는 교회 내 매우 심각한 분열과 다툼이 있어서 사도 바울을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의 근심과 걱정거리였다가 나중에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처음의 바른 교회의 모습을 극적으로 회복하였기 떄문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신앙의 굴곡을 심하게 겪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으로는 헬라 남부에 자리 잡은 고린도 지역 특성에 있습니다. 고린도는 로마 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무역이 활발해서 풍요로웠던 도시였고, 주신이 아프로디테 여신을 비롯해 많은 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의 이교적 종교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습니다. 고린도에 돈과 환락이 몰렸고, 그에 따라 문화와 종교, 경제 활동이 풍성했기 때문에 거기에 거주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었기에 구약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도가 더욱 낮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오랫동안 익숙한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쉽게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잘못된 가르침이나 가치관에 미혹되기 쉬웠고, 그에 따른 문제들이 교회 내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고린도전에 나타난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 고린도 지역 특유의 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날 한국교회 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오래된 무속 신앙과 기복 신앙이 교회 내에 여전히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 교회들이 저지 않습니다. 게다가 세속적 가치관인 물질 만능주의가 교회 내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성공과 번영, 물질적 축복을 신앙의 상급으로 이해하는 교회 내 문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 교회에게 고린도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지금의 한국 교회처럼 여러 부정적 요소들로 말미암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돌이켜 바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돌이켜 바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복될 수 있길 바랍니다.
(열매) 고린도후서 9장은 회복된 고린도교회를 향해 가난한 성도를 돕는 연보 사역을 다시 시작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연보란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내어놓는 재물’을 의미합니다. 연보는 흉년, 재난 등에 따른 재정적 어려움에 놓인 교회를 돕기 위해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모아서 보내는 재정적 지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에서는 이 연보가 고린도교회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자신들 내에서 일어났던 문제점들을 극복한 실제적 표징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 연보 자체가 초기 교회 공동체의 매우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자선’의 의미를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 예루살렘 교회)
인색과 자선의 의미
고린도교회가 분열과 다움으로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기 시작했을 때 나타났던 대표적 현상 중에 하나가 연보의 중지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자선은 시간과 물질이 남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자선’은 상황과 조건을 넘어서서 서로의 어려운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격려하기 위해 재정적 도움을 자발적으로 서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성도의 ‘진실한 사랑’을 증명하는 중요한 표징입니다. (고후 8:8) 교회 내에서 이러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과 실천이 사라질 때, 그곳에는 자선이 사라지고 인색함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상실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가 겪었던 일의 근본적 원인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내부에 나타났던 차별과 갈등,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원망과 다툼은 자선의 마음이 사라지고 서로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것을 베풀기를 아까워하는 인색한 마음을 만들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 원인은 여러 가지 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서로를 향한 사람이 식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고전 13:1-3) 결국 한 교회 내에서 지체라 고백하는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고, 그 결과 서로를 향했던 사랑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 버리며 서로에게 인색해졌습니다.
그럼 왜 그토록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 버렸을까요?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성도들 사이에 나타난 차별, 특히 경제적 수준에 따른 차별입니다. 교회 내부에 경제적 차이에 따른 그룹들이 생겼고,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기는 커녕 그들을 멸시하고 차별하여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물질의 풍요와 쾌락을 마음대로 누리며 살던 과거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보다 훨씬 낫다고 판단하고 세상의 잣대로 보게 되니 교회 내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차별과 혐오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돌도 흔하게 범했던 죄입니다. (예> 금송아지, 애굽을 그리워하며 원망과 불평, 가나안 정착히 가나안 신들을 섬기고,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을 약탈) 안타깝게도 이는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 내에서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바르게 드러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여전히 학벌, 재산, 신분, 능력에 따른 차별적 대우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높은 신분과 부유한 환경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 고린도교회가 연ㄴ보를 중지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지 않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세상의 기준과 가치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도교회의 부유한 성도들은 교회 내의 가난하고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보다 못한 열등한 존재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인색’해진 근본적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색의 개념은 차별과 혐오의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바울은 그동안 중지했던 연보를 다시 시작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자신들의 과거를 회개하고 본래의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라는 의미입니다. 연보를 통한 자선의 실천이 굳어 있었던 성도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사라응로 다시금 풍성해질 수 있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말씀과 같이 입으로만 말하는 사랑의 표현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위선적인 신앙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약 2:14-17)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본래 모습으로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지체들을 돕는 자선의 행위인 연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개념의 자선은 대가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본질이며 동시에 성도들이 가시적으로 도러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실체입니다. 이런 자선 행위는 성도의 삶에 하나님의 의의 열매들이 지속적으로 풍성하게 나타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고후 9:9-10)사도 바울은 하나니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실제로 재물을 베푸시는 인애에 근거한 호의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자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곧 그 자체로 하나님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 9:13-14)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나 혼자 높은 자리에 올라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경쟁자들을 모두 무찌르고 이겨 낸 승리를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더 많은 것을 남들보다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고통 당하는 자들을 돌아보며,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돕는 마음과 손길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다선은 단순한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게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가진 것이 없어 도움 없이는 생계가 곤란한 레위인, 고아, 과부, 나그네 등을 돕는데 쓰이는 십일조를 의무로 명시합니다. 사도바울 역시 교회들에게 가난하고 어려운 상화엥 ㅣㅆ는 지체들과 이웃을 물질적으로 돕는 연보 역시 ‘봉사의 직무’ 즉 성도의 의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개인의 어려움을 공동체가 나누어 책임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연보는 로마에게 핍박을 받던 시기에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그럴 때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더욱 돌아보며 보호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이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귀하게 여기도 돌보는 마음과 행동을 자신의 의무이자 당연한 삶의 양식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그것이 교회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서로가 상대방을 자신과 동등하고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바라보게 될 것이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지체들을 돕는 것을 마땅히 여기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며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기꺼이 서로 돕는 행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우리 삶에 실제가 될 것이며 (고후 9:12-14) 교회는 사람을 물질보다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인색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곳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 만능 주의는 사람을 물질로 여기며 ‘급’을 매기는 것에 익숙하고, 그 결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도 익숙합니다. (일하는 기계-실적을 내는 기계 -판단) 이런 시대 속에서 교회가 보이는 참된 자선은 이 세상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그 진가를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