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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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17장 21절 – 26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교리는 우리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교리입니다. 이유는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를 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셨고 예수님은 구원하셨고 성령님은 인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물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깜짝 놀란것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신자들이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면서 죄용서 받았다고 감사합니다. 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면서 의롭게 되었다고 기뻐합니다. 무엇인가 좀 이상합니다. 저는 이이야기를 여러분의 귀에 못이 박히게 할것입니다. 이유는 죄와 의가 우리 신앙의 아주 중요한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불성설에 가깝습니다. 그냥 무턱대고 믿는 것입니다. 부부인데 서로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사는거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어색하고 이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교회안에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믿고도 나는 교회다닐거야 하시는분들은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그렇게 설정하고 교회에 다니면 아예처음부터 구원과는 상관없다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싶다면 당연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알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해질것이기 때문입니다.
1. 어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열왕기상 12장에는 이스라엘을 둘로 쪼개어 북쪽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된 여로보암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로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아히야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아히야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일때에 솔로몬의 철저히 타락의 길을 걸을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둘로 쪼개어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긴 나라를 북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북 이스라엘을 만든 사람이 바로 여로보암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왕이 되자마자 한 첫번째 행동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것을 막고자 벧엘과 단에 가짜 성전을 만든 것입니다. 자신의 왕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레위지파가 아닌 일반 백성들중에 아무나 뽑아서 가짜 제사장을 세우고 가짜 재단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남쪽 유다의 예루살렘에 출입하다보면 자신의 왕위가 흔들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북 이스라엘이 비록 재단을 쌓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재단은 하나님의 재단이 아니었고 그들이 부른 하나님 역시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남 유다는 다윗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반면에 북이스라엘은 200년동안 9개의 왕조가 통치할정도로 극도의 혼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의 결과라고 할수 있습니다.
매우 극단적인 예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위와 삶의 열매도 그렇게 열매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우리가 참된 성도로서 그리고 교회로서 살아야 할 큰 방향과 이유를 제공해줍니다.
2. 하나님은 명백히 세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신 하나님의 가장 큰 특징이십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회의 혼돈은 교회안에 매우 잘못된 가르침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예가 양태론적 삼위일체 설명입니다.
즉 하나님은 유일신 한분이신데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세가지 형태로 나타나셨다는 주장입니다.
제 이름이 황성광입니다. 지금은 목사로 이곳에 있지만 집에서는 아버지로 , 아내와 둘이 있을때는 남편으로 존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 양태론입니다. 저는 한 사람인데 상황에 따라 아버지로 남편으로 목사로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나무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나무에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나뭇잎의 형태가 있지요, 결국 나무는 하나인데 나타나는 모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물로 비유하기도 한다. 물이라는 본질은 하나인데 액체로 존재하기도 하고 수증기 형태의 기체 형태로 존재하기도 하고 얼음형태의 고체로 존재하기도 하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태양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태양은 하나인데 그 태양에서 열이 나오고 빛이 나오는것처럼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거기에서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 태양의 비유는 삼위일체 트리니티 라는 말을 처음사용한 터틀리안이라는 신학자가 한말이어서 많은 목회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할때 이렇게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터툴리안이 그렇게 설명한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동일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말이었지 하나님이 한분인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훗날 이 터툴리안의 태양의 비유는 매우 오해의 소지가 많은 , 위험한 설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본질은 하나인데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세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해서 양태론이고 역활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인 이 양태론은 이미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바 있습니다.
양태론의 아버지라 불리우던 사벨리우스 감독은 261년 교회 감독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습니다. 이유는 성경의 증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양태론 역활론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면 하나님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나타날뿐, 한꺼번에 세분이 등장할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제가 아버지이면서 목사이면서 남편으로 한꺼번에 각기 다른 존재로 나타날수 없는것과 같습니다. 존재는 하나인데 역활이 세가지일뿐인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증언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과 성부 하나님을 완전히 다른 인격체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한말이 아니지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세분의 하나님이 명확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물에서 세례를 받고 있고,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소리로 말씀하고 계시고, 성령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위에 비둘기 같이 임하고 계시지요.
다 각각 완전하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세분의 하나님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만 그런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을 의미하는엘로힘은 엘로하의 복수형입니다. 하나님들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let us make humankind in our image…
복수형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세분의 하나님을 증언하는데 양태론은 한분의 하나님을 각각의 상황과 역활에 따라 존재하신다고 설명하니 명백하게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삼위일체를 다 이해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범위내에서 우리가 이해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세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세부이신데 한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체 삼위가 아니라 삼위일체입니다.
일체 삼위는 양태론적 하나님이 이해이고 삼위일체는 말그대로 삼위의 하나님이해입니다.
3. 세분의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이 되신다.
일체의 교리입니다. 세분의 하나님이 각각 독립적이고 완전하신분이신데 세분이 다투거나 다른 의견을 표시하시거나 불일치 되시지 않으시고 마치 한분이신 하나님이신것럼 완전한 일체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이고 놀라운 점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만일 나같은 인간이셨다면 섭섭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완전한 하나님인데 성경에 등장하는 성령님은 늘 도와주시는 분, 성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는 분,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밝히 드러내시는분으로 묘사됩니다. 드라마로 따지면 주연이 아닌 조연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기쁨으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시라면 성부하나님께 섭섭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한낱 피조물을 살리겠다고 아들인 나를 피조물의 세계에 보내시고 그들의 손에 죽게 하시겠다니.. 도데체 누구의 아버지시냐고, 내 아버지 맞으시냐고… 섭섭해하실만도 합니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은 성부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자기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자원하여 순종하셨습니다.
창세기의 성자하나님의 그림자역활을 하는 이삭을 묵상해본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려 했을때, 이삭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브라함은 이미 110살이 넘은 노인의 몸이었습니다. 이삭은 한참 팔팔한 10대후반의 청년이었습니다. 이삭이 제사를 드리러 가면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제사에 사용될 나무는 있는데 재물은 어디에 있는것입니까? 물었을때 아브라함이 재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거야 라고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들이 아버지 나무는 있는데 재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을때 응 하나님이 준비하실거야 대답하는 아브라함의 표정을 생각해보십시요.. 얼마나 무겁고 비장하고 그렇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려고 애를 쓰는 것이 역력한 표정아니었겠습니까? 아버지의 표정을 본 이삭은 어쩌면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신을 묶고 칼로 내리치려 할때도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겼을지 모릅니다. 아니 눈치채지 못했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자신을 묶고 칼로 자신을 죽이려는 순간 자원하여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억지로 그를 제압하거나 그를 묶을 육체적 힘도 마음의 힘도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100 완전히 순종함으로 모리아산에서의 일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완전한 삼위일체의 모습인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온통 예수님이야기뿐입니다. 하나님이 등장하시지만 예수님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시고 찬송과 경배를 받으십니다. 만일 성부하나님이 사람이시라면 섭섭하거나 언짢으셨을 것입니다. 권력과 돈은 부자지간에도 나눌수 없는 것이 이땅의 이야기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을 자신이 영광받으시는것과 동일시 하심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이렇게 각각 완전히 다르고 독립적인 세분의 하나님이 완전히 한분이신 하나님처럼 하나가 되신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우리가 흔히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합니다. 각각 다른 환경과 배경을 통해 자라난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부부의 연을 맺고 마음과 육체가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합니다. 분명이 둘인데, 그것도 성격도 습관도 완전히 다른 둘인데 하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부의 신비이고 이 부부의 신비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장 근접하게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
4. 연합의 비밀은 사랑이다.
어떻게 세분이신 하나님이 완전히 한분으로 존재하실수 있으신가? 삼위의 하나님이 완전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이 세분 하나님의 사랑을 춤추시는 하나님 the dancing of God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서로 사랑으로 충만하시기에 서로가 서로를 높여주시려고 그래서 서로가 낮아지실려고 서로를 위로 올리다보니 마치 자석이 같은 극끼리 서로 밀어올리려고 하다보니 이리저리 움직이는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움직이고 계신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으로 세분이신 하나님이 한분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세분의 각각의 독립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한분 하나님이 되시는가 ?그것은 사랑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랑을 교회에게 성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사중에서 사랑이 최고의 은사이고 축복이고 결론적인 은사입니다.
제아무리 자신이 믿음이 크다고 말하는 사람도, 남들보다 훨씬 더많은 신앙적 업적을 쌓았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것이 아닌 자신의 힘에서 나온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은사와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랑으로 결론지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란 눈두개 코 입 물리적인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물리적인 형상이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입니까? 세분을 연합시키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분이신 하나님이 완전한 한 하나님을 이루시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닮도록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는 이땅을 살면서도 천국을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일심동체였던 부부의 관계가 서로의 허물을 탓하고 책임을 서로에게 떠미는 상처와 아픔의 관계로 전략해 버린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졌으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공동체와 가정에 사랑대신에 분노와 상처가 가득하게 된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안으로 초청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The dancing of God의 하나님의 댄스파티에 우리도 한 식구가 되어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과 교회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는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간구였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5.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
지구상의 모든 종교의 신개념을 두개로 나누어볼수 있습니다. 다신론과 유일신론입니다.
다신론의 특징은 다양성입니다. 이신과 저신이 다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그리스 로마신화입니다.모든신들이 다 특징이 있고 성격이 있습니다. 다신론의 특징은 신들끼리 경쟁한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전쟁이 이 개념에서 나온 말입니다. 신들끼리도 싸워서 우열을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이렇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시당한다 생각하면 힘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다신론적 사상이 그 근본입니다. 그래서 항상 혼돈과 무질서가 결과물로 그대로 드러납니다.
말하자면 다양성은 드러나지만 통일성은 완전히 베제됩니다. 그리고 그 간격은 힘의 논리입니다. 강한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원리로 작동합니다.
또하나의 신개념이 있습니다. 유일신입니다. 유일신 개념은 유대교와 이슬람의 신개념입니다. 진정한 신은 오직 한분이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굴복과 순종만 있을뿐입니다. 그러나 다양성이 없습니다. 인격성과 관계성이 없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사랑이 있을수 없습니다. 홀로 존재하는데 어떻게 사랑을 합니까? 사랑은 상대방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성립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일방적이고 폭력적입니다. 말들으면 살려주고 말 안들으면 죽입니다. 그것이 기본개념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틈이 없습니다. 결국 또다른 힘의 논리이고 강자 독식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신개념은 다신론도 유일신도 아닌 삼위일체신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세분이십니다. 여기에 각각의 다른 위격과 독립적인 사역의 영역이 있으십니다. 성부하나님의 역활이 분명히 다르고 성자 하나님의 역활과 성령하나님의 역활이 다릅니다. 우리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체 창죄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중에 똑같은 얼굴이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은 성격도 없습니다. 모두다 하나하나 소중한 인격체이고 고유한 존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런부분에서 우리는 다신론적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세분의 하나님은 한분으로 존재하십니다.
각각 다른 세분이 서로 사랑하시고 배려하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높여주심으로 완전히 하나됨을 이루어가십니다. 각각의 인격과 성품을 존중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높여주고 배려해줌으로 완전한 일치와 통일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통일성 부분에서 본다면 우리는 유일신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하나님은 세분이야? 물으면 응 대답합니다 . 옆에 사람이 한분이야 ? 그렇게 질문해도 응 대답합니다. 뭔말이야 세분이야 한분이야… 응 세분이면서 동시에 한분이야.....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다신론적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서로 힘을 재서 누가 쎈지 드러내야 합니다. 필연적으로 분리와 다툼과 비판이 상존할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만약 그런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잘못된 하나님, 허상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유일신적 하나님을 믿습니까? 한분이신 하나님앞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못한이는 전부 죄인이 되고 각자의 생각과 입장도 힘으로 눌러버리는 기계식 일체감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북한의 김정은이 꿈꾸는 독재국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의 나라입니다. 각각의 독립성과 인격성을 충분히 지켜주고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품어주어서 하나됨과 통일성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깃어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