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창세기 톺아보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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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우리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증거들을 찾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거시적으로 우주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미세하게 조정되고 미시적으로 아원자 세계도 질서 정연하게 유지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DNA의 막대한 정보 양과 그냥 생길 수 없는 질서를 보면서 정보를 제공하는 설계자가 하나님인 것을 들었습니다. 매우 질서 정연한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신이 없다는 것의 이유 가운데 하나로 세상의 무질서를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악한가? 아니면 무능한가? 왜 고통중에 부르짖는 사람들의 신음을 외면하는가? 애초에 악과 고통의 근원이 되는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 아닌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문제에 걸려 인간이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굉장히 많은 질문들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 질문들을 응축해서 한 마디로 질문한다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왜 세상에 고통과 아픔이 존재하나요?”
성경에서는 세상의 무질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봅시다.
본론
본론
당신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무질서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나요(1-7절)?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접속사가 분위기 반전을 주도합니다.
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자유롭게 하나님의 선한 뜻이 아닌 악을 선택합니다.
세상의 무질서의 시작, 악의 기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에게 찾아온 것은 수치심입니다.
인간은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로 치마를 만듭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숨게 됩니다.
하나님이 전지하셔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이것을 예상하셨을텐데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것을 만들지 않으면 될텐데 하나님의 전지성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면 악의 기원이 생기는 동안 도대체 어디에 계셨는가? 이것을 막지 못하셨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모순적인 말이지만 “실수”입니다. 하나님은 실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유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악의 가능성과 그로 인한 고통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의 가능성을 창조하셨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한 것은 인간입니다.
악은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부여하시면서도 악을 선택할 수 없는 세상을 창조한다면 모순입니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서로 사랑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미워하고 불신하고 불순종할 선택의 가능성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악을 사전에 막으려면 모든 자유를 없애고 사람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어야 합니다.
꼭두각시와 같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랑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2. 세상의 무질서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8-19절)?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할 때 수치로 인해 인간 상호 감추는 일이 발생합니다.
또한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해 숨습니다. 이것이 관계의 단절이 무질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 인간 상호 친밀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신 언약을 따라 심판하십니다.
자유로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먼저 아담에게 묻습니다. 아담은 아내에게 책임 전가하면서 궁극적으로 여자를 준 하나님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합니다.
여자는 뱀에게 그 책임을 떠넘깁니다.
뱀은 죄의 원흉, 배후에 사탄, 배로 다니는 불명예가 있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지간이 되고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에 상처를 내지만 그에 의해 머리가 부숴짐으로 죄의 권세가 깨지는 일을 예고 합니다.
아담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고 먹고 살기 힘들어짐, 노동의 수고가 가중되고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영혼을 거두어 가심. 심판과 형벌 중에도 은혜를 주십니다. 땅은 열매를 줌.
하와는 해산의 고통이 더해지고 권위와의 갈등이 발생합니다. 심판과 형벌 중에도 은혜를 주십닏.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하심.
3. 우리가 겪는 세상의 무질서로 인해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15절)?
세상의 악의 기원에 대하여 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숨어계시는 듯 합니다.
숨어서 지켜 보다가 딱 걸렸어. “빼박” 빼도 박도 못하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상황을 포착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가 트럭에 치일 위험에 처해 있는데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 기적으로 우리를 구해내지 않고 방관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선하지 않고 악한 분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 대해 미리 경고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시고 막지 않으시지만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자유로우면서도 의도적입니다.
우리가 의도를 가지든지 실수를 저지르든지, 아니면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통당할 때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구약과 신약에 있습니다.
구약의 대표는 욥입니다. 욥은 하나님도 인정할 만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가진 재물, 가축, 자식들, 심지어 아내 마저 떠나버리고 친구들은 욥을 비난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전혀 모르지 않고 허용하고 계십니다.
신약의 대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실수나 의도성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악범으로 취급 받고 불법의 재판에 넘겨져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 형벌을 받습니다.
세상의 무질서로 인해 고통당하는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이야기를 해 봅시다. 현대의 예를 들어봅시다.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있을 때,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허우적 거리는 아이들이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무안국제공항에서 비행기가 착륙할 때, 새가 비행기에 부딪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아프리카의 굶주린 여인에게 비가 절실히 필요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나의 이 고통스러운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욥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외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의 질문에 답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건 사고에 하나님께서 답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낼 수 있는 결론은 알 수 없다입니다.
비가 절실히 필요한 곳에 하나님은 비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십니다. 욥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악과 그로 인한 고통을 짊어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 한 가운데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놓았습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고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한 엄청난 악의 문제를 당신이 짊어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을 확증하는 일로 동물의 희생을 암시하는 가죽옷을 해 입히십니다.
수치심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우리의 수치심을 가릴 수 있습니다.
결론
결론
4.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세상의 무질서를 남겨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22-24절)?
하나님은 가난, 기근, 불의에 대해 조치할 수 있으신데 왜 그런 일을 허용하실까요?
하나님은 우주의 사디스트 같습니다. 고통을 그대로 두시니까요.
욥은 이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으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질문을 멈추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덜 사랑해서 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만나는 지점으로 이끄십니다.
고난으로 인해 욥의 마음에 생긴 큰 공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기쁨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세상의 무질서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시냐는 질문을 하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며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죽음을 허락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로움을 보며 감사한다면 고통과 함께 하며 십자가를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의 무질서인 악의 기원과 근원이 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의 무질서가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누군가의 고통 속에서 그들과 함께 있어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묻는 우리에게 너는 어디에 있느냐?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그 곳에 우리가 있기를 원하십니다.
더 이상 숨어 있지 마십시오. 용기 있게 나아오십시오.
고통 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 이상 외면하지 마십시오. 용기 있게 나아가십시오.
고통 중에 있는 그들에게 가기를 원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