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미 갇혀 있다 그것만으로도 은혜가 흘러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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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In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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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범죄도시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1teJySfqx64?si=0yCEBNs8xtv4uVf2
마동석이 두 사람을
강제로 화해시키죠.
이 장면을 세 배우가
너무 우스꽝스럽게
잘 표현해냈습니다.
웃자고 보여지는 장면이지만
이 두 사람이 과연 진정한 화해를 했을까?
하고 갑자기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보자면
두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화해를 하지는 않았죠.
강력한 어떤 힘에 의해서
강제로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좋지 않은 예시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 괜찮은 예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억울한 두 사람이
각자 서로의 입장만 이야기하다보면
용서와 화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가 너무 강하고 ‘나’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여기는 존재라서
그냥 화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무언가 강력한 동기가 있고,
그 강력한 동기로 두 사람이 모두 변화되어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가능합니다.
마동석씨가 하는 방법은
진정으로 용서하는 방법이
약간 왜곡된 거에요.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리는 동일해요.
마동석씨가 내 옆에 24시간 붙어 있어서
내가 분노하고 원망할마다 주먹으로
분노조절을 해주신다고 해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하며 살아갈 순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동석씨 주먹보다 더 큰 힘에 의해서
우리가 강제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해요.
본론
본론
오늘 말씀은
지난 번에 나눴던 이야기인
오네시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라는 동네 출신입니다.
그 작은 동네에 빌레몬이라는
굉장히 영향력 있고,
인품과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빌레몬은 자신의 종들에게도
덕이되고 모범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노예라는 사회적인 이미지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빌레몬처럼 훌륭한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의 노예가 되는 것이 오히려 좋았을 수도 있나?
싶을 정도 였죠
그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노예로 생활하던 사람이
오네시모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호의와 배려와 사랑에도 불구하고
빌레몬을 배신해서 로마로 도망치게 됩니다.
빌레몬의 집인 골로새에서 로마까지
굉장히 먼 거리를 이동해야합니다.
한 두달 이상은 움직여야 하는
굉장히 먼 거리에요.
그 먼거리를 가는 동안
의, 식, 주 해결해야하죠.
그 말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오지 않았다는 거에요.
빌레몬의 집에 돈이 될만한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어요.
한 집안의 노예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오네시모는 노예 중에서도
빌레몬이 신뢰하는 사람이었다는 거죠.
신뢰하는 사람이니까 중요한 물건을 관리하거나
아니면 관리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을 겁니다.
오네시모는 그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주인에게 신뢰를 받는 종이었어요.
더구나 그 당시 노예들은
몸에 노예라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그걸 한 두달 동안 안 들키고
무사히 로마에 도착한다?
오네시모는 영리한 사람이라는 거죠.
그리고 만약,
오네시모가 시골같은 동네로 도망치면
도망친 노예인게 들통날게 뻔하기 때문에
오네시모는 전략적으로 사람이 굉장히 많고
인구의 1/3이 노예여서 티도 나지 않을
로마로 도망친겁니다.
굉장히 똑똑하죠?
이런 사람이 도망가면
아… 인재를 잃었군…아쉽다…
정도로 끝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도망치면
그 동네에서
엄청난 망신거리가 됩니다.
아유~
대체 얼마나 힘들게 했길래
노예가 도망가?
노예 하나 관리 못하는
빌레몬은 무능한 사람일거야.
이런 망신과 수치를 경험해야 했던
빌레몬이었습니다.
더구나 노예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기 시작하면
다른 노예들도 어? 나도 해볼까?
이런 생각을 하겠죠.
노예를 데리고 있던 모든 주인들은
오네시모 저 미꾸라지같은 자식 때문에
분위기만 어수선해지고 이게 뭐야!
라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네시모는
고향 사람들에게 폐급 취급을 당하고
손절 당할 것을 각오해서라도 로마로 갑니다.
그렇게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도망쳐 나온 오네시모는
로마에서 뜻밖의 귀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바울이에요.
오네시모는 사도바울을 만났고,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자신의 속사정에 대해서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어
완전하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어요.
사도바울은 빌레몬서에서
오네시모를 이렇게 표현해요.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사도바울을 통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에서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사랑,
구원의 은혜를 알게 되어
그의 삶은 완전한 어둠에서 완전한 빛으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영리한 머리로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을
배신하고 상처를 줬던
아무런 가치가 없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완전하게 새로운 사람이 되었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런 오네시모를
다시 골로새로 돌려보낼
위험한 계획을 세웁니다.
거의 도박을 한 수준이죠.
이건 오네시모보고 죽으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 당시 노예가 도망치다 걸리면
그냥 처형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오네시모였다면
사도바울이 아무리 고마운 사람이어도
자신의 영리한 머리를 이용해서
사도바울에게서 멀리 떠났을 겁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사도바울의 말에 순종했어요.
오네시모가 변화되었다는 증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나니까
내가 저질렀던 잘못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던지 간에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하나님의 사랑에 갇힌 자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줬던 나의 과거를
그냥 덮고 지나갈 수 없었던거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가해자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은혜를 받았으니
용서해달라고 말하면
과연 피해자가 그걸 쉽게 받아들일까요?
오래 된 영화인데,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선량한 이미지를 가진 남자가 있었습니다.
학원과 학교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사람이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믿어주는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가 주인공의 딸을
무자비하게 성추행하고 살해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웠어요.
괴롭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겠죠.
그래도 용서를 해보고자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
범죄자가 있는 교도소로 면회를 갑니다.
그랬더니 그 범죄자가 한다는 말이,
나 감옥에 있는 동안
성경책 많이 읽으면서 하나님께 내 모든 죄사함을 받았다고
나는 완전하게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 주인공은
더 큰 충격과 실망감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더 커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아직 용서를 안 했는데
누가 용서해? 그러면 다야? 왜?
물론 내가 용서 안 했어도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이 영화의 장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건
용서란 한쪽 방향에서만 잘 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용서를 구해야하는 사람이
용서를 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이전에
화해하고 용서하고 다시 찾아오라고 말씀하신거죠.
그런데 그 범죄자 남성은
뭘 잘못 알고 있어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죠.
마찬가지 상황인거에요.
지금 오네시모는
빌레몬과 다른 피해자들에게
나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다를
자랑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알아줘야하고
납작 엎드려서 용서를 구해야합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도움을 주기는 해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기를
간청합니다.
빌레몬서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나 사도바울이 말한다”
라고 하지 않고
‘갇힌 자 된 나 바울은’이라고 말하며
부드럽게 권유합니다.
사도바울이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여러 번 언급하고 강조한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꽉 붙들려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이 변화되었다.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러니까 네가 갇혀 있는
너를 꽉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떠올려봐라.
라고 말하고 있는거죠.
사도바울은 빌레몬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 자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빌레몬의 이름의 뜻도
‘필레오’에서 비롯되어
‘사랑 받는 사랑 받는자’라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레몬에게 네가 정말 사랑 받는 사람이라면,
네가 받은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기억해보면 좋지 않을까?
라며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권면하는 거에요.
빌레몬에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겁니다.
자신의 상처에 직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을테니까요.
도망친 노비를 용서하다니! 제정신이야?!
그럼에도 빌레몬에게는
빌레몬 자신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컸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은 자신을 온전하게 가둬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상처와 아픔과 이 세상의 고정관념과 가치관을
다 깨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어요.
나는 그대의 순종을 확신하며 이 글을 씁니다. 나는 그대가 내가 말한 것 이상으로 해주리라는 것을 압니다.
사도바울이 빌레몬에거
정중하게 요청하고 있는거에요.
그래서 끝내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게 되었고,
사도바울이 오네시모를 이렇게 대해주십쇼~라고
말한 것 이상으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사랑하고,
그를 용서하게 되었어요.
그 증거로 오네시모는
훗날 골로새 옆동네에 있는
에베소교회의 감독자, 지도자가 됩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의 신분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주고
이제는 사랑하는 형제로써 대하여 주었기 때문에
오네시모는 당당하게
한 교회의 지도자이자 감독자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약샥빠른 오네시모가 변할 수 있는 것도,
결정적으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빌레몬이 하루 아침에 변하지는 않았을겁니다.
그러나 내 삶을 온전하게 사랑으로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니까
내 안에 상처도 억울함도 그 사랑으로 덮어지게 된 것이죠.
이렇듯 용서란
누군가의 강요나 명령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본이 되기 위해
그냥 용서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용서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이 변화된 것도,
오네시모의 인생이 변화된 것도,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갇힌자 된 은혜가 필요한겁니다.
나는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사랑 안에서 절대 못 빠져나오게
나를 가두시는 분이야.
이 은혜가 마동석의 주먹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마동석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갇혀 있으니까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이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거에요.
전도사님도 억울한거
굉장히 싫어합니다.
억울한게 있고, 상처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해명하거나 반드시 갚아줘야 해요.
(억울했던, 그러나 용서했던 이야기 찾기)
그런데 그럴때마다
전도사님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갇혀 있는자구나”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때였어요.
지난주 말씀처럼
여전히 고집불통이고 나밖에 모르는
이 죄인을 사랑하신 그 사랑에
내가 갇혀 있구나…
그 생각이 전도사님의 머리를 스쳐지나가고
이 가슴을 후벼파기 시작할때
이상하게도 용서가 그냥 자연스럽게 되더라고요.
물론 여러 번 반복합니다.
한 번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억울한 마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마다
하나님은 다시금 몇 번이고
새롭게 또 새롭게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갇힌 자라고
이야기해주십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바꿀 수 있어요.
그 은혜가 있어야 우리는
용서하는 인생을 살 수 있고,
그런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도
온전하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자로써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정말 강력한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강요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들에게 보여지는 자리에 있을 때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려울때,
용서하지 못하는 내 마음 때문에
괴롭고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털어놓는다면
하나님이 분명히 깨닫게 해주실겁니다.
너는 내 사랑 안에 갇혀 있는 자다.
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을 받는 사랑받는 사람이다.
그 은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며 살아가는
우리 청소년부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