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4-27) 내버려 두심: 가장 무서운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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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붕괴의 시작점: 하나님을 바꾸다
1. 모든 붕괴의 시작점: 하나님을 바꾸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마주할 로마서 1장 24절에서 27절의 말씀은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그러나 동시에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비추는 진리의 거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본문은 충격적인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왜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는 이 끔찍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이 무서운 선고의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바로 앞선 구절을 보아야 합니다. 23절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모든 영적, 실존적 붕괴는 바로 이 한 지점, 이 치명적인 ‘교환’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단순히 눈부신 빛이나 명예를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원어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무게감’, ‘실체’, ‘실재성’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란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실체이시며, 영원하고, 불변하는 무게를 지니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바로 이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를, 언젠가는 반드시 썩고 소멸하며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피조물의 형상’과 맞바꾸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것을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원어의 뉘앙스를 보면 마치 어리석은 상인이 보석을 돌멩이와 맞바꾸듯, 의지를 가지고 행한 ‘거래’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하나님을 놓친 것이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 앞에 절하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교환의 본질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더욱 교묘하고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성공’이, 어떤 이에게는 ‘자녀’가, 또 어떤 이에게는 ‘안정적인 재정’이나 ‘사람들의 인정’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합니다. 더 나아가 현대 사회는 ‘나 자신’을 가장 정교하고 강력한 우상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나의 감정’, ‘나의 권리’, ‘나의 자아실현’이 그 어떤 진리나 공동체의 가치보다 우위에 서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형상과 맞바꾼 고대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2. 빈 왕좌의 폭군: 욕망이 신이 될 때
2. 빈 왕좌의 폭군: 욕망이 신이 될 때
하나님을 밀어낸 마음의 왕좌는 결코 비어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를 찬탈하게 됩니다. 그 새로운 통치자의 이름은 바로 ‘욕망’입니다. 24절과 26절은 그 권력 이양의 결과를 냉정하게 서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욕망은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에너지였습니다. 그러나 창조주라는 주인을 잃어버린 욕망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기 시작하며, 선한 동력에서 파괴적인 폭군으로 돌변합니다. 이때부터 ‘내가 원하는 것’이 ‘선한 것’이 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진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와 순리는 억압적인 족쇄로 여겨지고, 그것을 거스르는 ‘역리’, 즉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마치 진정한 해방인 것처럼 포장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순리를 거스른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본능을 넘어, 창조주께서 만드신 본래의 목적과 설계를 벗어나는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역리의 가장 극명한 예시로 성적인 질서의 붕괴를 지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비겁한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특정 죄를 향한 공격 무기로 삼아, 세상의 타락을 손가락질하며 스스로의 의로움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헤아리지 않고, 자기 멋과 뜻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에만 앞장서는 바리새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이 ‘역리’의 현상이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안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교회 성장의 욕망, 더 큰 건물을 갖고자 하는 탐욕에 사로잡혀 복음의 본질을 팔아넘기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아첨하며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은 순리입니까? 교리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형제를 정죄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랑 없는 열심은 과연 성령의 열매입니까? 또한 우리가 가장 쉽게 눈감는 이성애의 영역 안에서, 마음속으로, 혹은 은밀한 스크린을 통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소비하며 거룩한 언약을 배신하는 것은 순리입니까? 결혼의 침실이 상호 존중과 사랑의 연합이 아니라, 한쪽의 이기적인 쾌락을 위한 장소로 전락하고, 상대방을 인격이 아닌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은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떠난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는 ‘역리’의 현장입니다.
3. 가장 무서운 심판: 내버려두심
3. 가장 무서운 심판: 내버려두심
이 모든 타락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본문은 세 번에 걸쳐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한 구절을 반복합니다. “내버려 두사.”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어버린 그 썩어질 우상들에게 우리를 넘겨주셨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안정을 위해 질주하도록, 교회라는 이름으로 탐욕을 포장하도록, 거룩한 언약 안에서조차 서로를 욕망의 도구로 삼도록, 바로 우리가 선택한 그 길 위에 우리를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내버려두심’은 하나님께서 지쳐서 포기하셨다거나, 무관심하게 방치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의 의미를 보면, 재판장이 유죄 판결을 내린 죄수를 형 집행관에게 ‘넘겨주다’, ‘인계하다’는 뜻을 지닌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법적 행위입니다. 이 심판이 왜 그토록 무서운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역적인 요구를 마침내 들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독약을 마시겠다고 고집하는 아들을 눈물로 말리던 아버지가, 아들의 완강한 의지를 꺾지 못하고 그가 독약을 마시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독약을 준 것은 아니지만, 아들의 선택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내버려두심’은 바로 이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충돌하는 고통스러운 지점에서 일어나는 심판입니다.
“네가 진정 나 없이 살기를 원하느냐? 좋다, 내가 너의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겠다. 너의 통제받지 않는 욕망을 너의 신으로 섬기며 살고 싶으냐? 좋다, 그 욕망이 너를 어디까지 끌고 가는지 끝까지 가보아라.”
이것이 바로 ‘내버려두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 우리를 파멸로부터 필사적으로 붙드시던 그분의 손길이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완전한 ‘자유’ 속에서, 실은 자신이 선택한 욕망의 감옥에 완벽하게 갇히게 됩니다. 성공을 좇는 자는 더 큰 성공을 이루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공허의 쳇바퀴를 돌게 됩니다. 쾌락을 좇는 자는 더 강한 자극에도 무뎌지는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며, 인정을 좇는 자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얽매여 평생을 불안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자신이 만든 우상에게 자신의 영혼을 제물로 바치는 셈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느끼는 그 모든 불안과 공허, 관계의 단절이야말로,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를 돌이키시려는 그분의 고통스러운 심판의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4. 가장 위대한 반전: 내어주심의 복음
4. 가장 위대한 반전: 내어주심의 복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총체적인 타락과 ‘내버려두심’이라는 절망적인 선고 앞에서 무력하게 스러져야만 합니까?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를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의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복음의 빛은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표현, 심판의 언어였던 ‘내버려두다’라는 말이, 로마서의 심장부에서는 놀랍게도 구원의 언어로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그는 의도적으로 로마서 1장에서 심판을 서술할 때 썼던 바로 그 단어를 사용하여 가장 위대한 반전을 보여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이 복음의 심장이며, 기독교 신앙의 가장 위대한 역설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내버려두심’이 죄인을 그 죄의 결과에 넘겨주는 재판장의 냉엄한 선고였다면, 로마서 8장에서 ‘내어주심’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대신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가장 고통스러운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내버려두심’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기 위하여, 대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내어주셨습니다.’ 왜 예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까? 그분은 인류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바꾸어버림’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려진 바’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가 영원히 받아야 할 그 궁극의 심판, 그 ‘내버려두심’의 고통을 아들이 홀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곳, 십자가 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교환’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위해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교묘한 방어막을 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들은 지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이 진리가 자신의 지갑과 시간과 관계를 침범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머리에 머물 뿐, 심장과 손과 발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능숙하게 다른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이 설교는 아무개가 꼭 들어야 하는데.’ 마치 잘 조준된 화살처럼, 말씀의 모든 촉을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변 사람들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가장 흔한 방어는 아마도 ‘나’는 괜찮다는 안도감일 것입니다. ‘나는 저런 끔찍한 죄는 짓지 않으니까.’ 우리는 로마서 1장의 목록을 보며, 우리가 저지르지 않은 몇 가지 죄들 뒤에 숨어, 하나님을 바꾸고 있는 우리 자신의 수많은 우상들을 외면합니다.
5. 모세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5. 모세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자, 그렇다면 이 복음의 진리와 우리의 교묘한 방어막 사이에서,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단순히 나의 구원에 안도하며, 여전히 로마서 1장의 길을 걷고 있는 세상과 교회를 향해 정죄의 손가락질을 계속해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32장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바꾸는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며 그들을 ‘내버려 두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주님, 저들은 죄를 지었으니 마땅합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고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1절과 32절의 그의 기도는 우리의 심장을 울립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내버려두심’의 심판 앞에서 성도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모세의 기도는 ‘저들’을 향한 정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끌어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라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재판관이 아니라, 공동체의 죄를 끌어안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중보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33장 15절에서 다시 한번 부르짖습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그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정죄의 돌을 내려놓고 중보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교회 안팎의 죄악을 보며 “저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대신, “주님, 바로 저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가슴을 쳐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기도는 ‘그들’을 바꾸어 달라는 기도에서, ‘우리’를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분열되고 세속화된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공동체 안에 주님의 거룩한 임재를 다시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우리’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회복의 통로로 살아가야 합니다. 입술로는 정죄하면서 삶으로는 똑같은 우상을 섬기는 위선자가 아니라, 먼저 내 삶의 우상을 처절하게 부수고, 그 자리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가지고 상처 입은 세상과 지체들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마음을 품고, 모세와 같이 무너진 곳에 서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참된 제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하여, 서로를 정죄하는 대신 서로를 위해 울어주며, 무너진 ‘우리’의 회복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세워나가는 거룩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