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2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깊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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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으로 가신 예수님
혼자 산으로 가신 예수님
디베랴의 바다 건너편 벳세다라는 장소에서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그곳은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입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벳세다’의 어원은 ‘벳’ 집이라는 뜻과 ‘세다’ 양식(물고기 등) 입니다.
그래서 고기잡이의 집 또는 양식의 집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다 어부인 것도 지명과 관련이 있게 보입니다.
그 양식의 집에서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일 때,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으로 오천명의 사람들이 원대로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목포출신 제자들이 서울에 갔다가 스타가 되어 목포로 다시 오니 평화광장에 오천명의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들이 배고파서 난처해 할 때 한 아이가 스시도시락을 가져왔더니 그것으로 오천명이 먹고 남았다.
약 8천만원 정도 금액이 사용된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해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뿌듯하고 으쓱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덕을 보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표적으로 보며 즐거워 할 때
그들을 피하여 산으로 떠나 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산으로 가셨을까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일까요?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이때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들을 똑같이 경험하시는 분입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오천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을 경청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축제의 분위기와 환호 그리고 영광
그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할 때에 사람이 받는 유혹은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감지하시고 곧 바로 ‘기도’를 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시험이나 유혹에도 자유롭고, 배고픔이나 졸음이나 죽음의 위협에서도
아무렇지 않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40일 금식하며 사탄에게 유혹을 받을 때에도 기도로 물리치셨고,
피곤하셨고 배고프셨지만 기도로 이기셨고,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할 수만 있다면 그 길만은 가지 않기를 바랬지만
기도함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졸고 있었죠,
예수님께서 행햐하는 영광을 함께 취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인파가 다 떠나고 난 이후의 공허함이 몰려올 때
그때 날은 저물고 바다는 어둠고 캄캄했습니다.
극도의 허무함과 공허함이 몰려올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리고 큰 파도까지 일자
조금 전까지 누렸던 그 영광과 그 기쁨은 모두 다 사라지고
깊은 두려움만이 내면을 장악합니다.
아마 우리 현실 가운데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텐데
특히 연예인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많이 일어나죠.
요즘 트롯이 정말 인기인데
한 예능프로에서 유명한 트롯가수가 공연장에 가서 반짝이는 옷을 입고 무대에 서니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하고, 무대가 끝나자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기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정을 마친 그 가수는 근처 모텔방에 가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난 이후에
편의점에 가서 먹을 것을 사고, 방에서 티비를 보며 식사를 했습니다.
그 가수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계속 그런 인기를 누리면 행복할까요??
그가 누리던 행복이 사라지면 그는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저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복음이며,
큰 행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티비를 보는 것도 좋지만
그가 온전한 삶을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기도’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온전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두려움이란 인간과 공존하는 감정인데 그 중에서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더 큰 희망이다.
예수님이 주실 것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이 희망이다.
예수님이 주실 것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이 희망이다.
이튿날 벳세다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았습니다. 어디로 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분명히 어제 항구에 배가 한척 있었고, 제자들만 그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근처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동네를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안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디베랴에서 건너 온 배들을 다시 타고 가버나움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말이 ‘랍비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극존칭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누히 말했듯 예수님을 선생님이나 선지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는 이유가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는 이유는 예수님을 얻기 위한 목적이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계속 상기시키고, 설명해주십니다.
미국과 유렵의 여론조사에서 이런 현상을 분석했을 때 이 시대에 관하여 내린 결론은 ‘희망의 상실’시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인데 점점 더 희망을 잃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상 가장 생활이 편리하고 수명도 길어졌으며 부요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불안하고 행복감이 없는 절망감에 살아가는 이유이다.
공장에서 단순업무를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두사람은 나이와 성별, 교육수준 및 생활환경까지 똑같다. 다만 갑에게는 1년 후에 연봉을 3천만원 주기로 했고, 을에게는 1억을 주기로 하였다.
갑이 을에게 말했다.
“매일 8시간씩 일년 동안 해야한다니 정말 지겹지 않아?”
을이 대답했습니다.
“아니 나는 너무 신나는데, 일할 때마다 휘파람이 절로 나와”
이것은 단순히 수입이 다른 이유만은 아니다.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우리는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깊은 희망’이다.
느와르나 우울하고 절망적인 드라마나 영화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며,
맛있는 음식이나 감미로운 음악은 잠깐의 희망은 줄 수 있지만 금새 사라져버리는 안개와 같은 희망이다.
우리는 현재만 살면서 ‘당장의 갈망’만을 추구해서는 각자의 삶을 감당할 수 없다.
넷플릭스 시리즈와 영화 순위를 보라.
느와르, 여행, 요리, 노래이다.
무엇이 느껴지는가??
사람들은 희망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희망을 주는 대상이 무엇인지 결정한다.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이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가 잘 되는 것이 희망이며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집이나 주식이 오르는 것이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희망이 현실이 되는 쾌락도 그 희망이 실현되지 않는 절망도 모두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현재를 사는 어른들은 어릴 적 들었던 동화의 결론의 힘으로 살고 있다”
“고난이 있었지만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
“선한 이들은 보상을 받고, 악한 이들은 벌을 받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단순한 어린이 교육용 메시지가 아니라,
사실 인간 정신의 서사적 본능, 다시 말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내러티브의 구도’**입니다.
즉, 인간은 서사를 따라 살고, 서사를 따라 희망을 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동화에서 배운 구조—“결국은 잘 될 거야”
이 말을 의식하든 무의식하든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문화,
특히 당신이 언급한 넷플릭스의 인기 콘텐츠들은 이 동화의 결론을 전복하거나 부정합니다.
정의는 승리하지 않고,
선한 이는 끝내 짓밟히고,
사랑은 환상처럼 취급되며,
우리 자녀들은 이런 생각이 무의식에 깊게 자리매김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
당장에 큰 위험이 없더라도 내면의 깊은 공허에 빠져 위로가 필요하지만 위로받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현실 도피로 요리, 여행, 혹은 검은 운명 속의 욕망을 소비합니다.
이것은 단지 오락 콘텐츠의 유행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가 더 이상 희망을 신뢰하지 않게 된 징후입니다.
‘희망을 품는 것이 미련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잘 될 거라는 말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고 여기는 세대.
바로 그것이 희망의 고갈 시대라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는 생명의 떡이니
단지 먹고 배부르는 것에 그치는 떡을 쫓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삶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깨닫고,
그 분이 선생님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정말 우리에게 온전한 삶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구원자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다시 셋팅이 됩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나의 삶은 더 나아질 것이고,
그분으로 인하여 나의 삶에 고난들을 모두 이겨낼 것이며,
그분으로 인하여 나의 삶의 의미가 확실해지고,
그분으로 인하여 나는 죽음을 이기고 더 깊은 희망으로 살아갈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세요.
그분은 그가 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고,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과 같이 대표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옆에서 보았고,
그가 직접 물 위를 걷는 경험도 했으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수시로 물 위를 걸어다니며 모든 병자를 다 고치는 초능력을 갖게 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경험하는 기적이란 자신의 초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하실 일에 대한 매개체로의 역할만을 감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번에 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도
우리가 부요하거나 능력이 있어서 나의 능력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돈을 옮기시는 것도 하나님이신데
그분에 뜻에 따라 순종하는 것만 우리가 감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비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댐을 건설하여 엄청난 물이 가둬져 있는데
그들은 그 댐 너머의 물을 보지 못한채 언제부터 댐 자체를 만드는 것에 매료되어
계속해서 흙을 모아다가 댐을 더 견고하고 높이 쌓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이 사는 터전은 가물고 매말랐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큰 댐을 보며 자랑스러워 했고, 행복해했습니다.
자신들의 갈증을 댐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더 열심히 댐을 만드는 것에 열중했습니다.
이때에 오병이어와 같은 이 돈이 한 학생에게로 가는 순간 큰 손이 댐 중앙을 움켜쥔 것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힘들게 모은 흙이 옮겨지는 것을 보며 마음 아파 했지만 그 흙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 구멍에서 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구멍은 점점 커져서 댐을 허물고 마침내 엄청난 물들이 쏟아서 사방으로 퍼지고 매마른 땅들은 흥건하게 적셔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갈증이 해소되고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일시적인 희망이 아니라 더 깊은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어 주십니다.
그 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삶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