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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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요한복음 11:32–35 NKRV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오늘 여러분들과 공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공감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서 느끼는 마음의 능력’이다. 사자성어로 하면 무엇인가? “역지사지”이다. 쉽게 말해, 슬픈 사람을 보고 그 마음속에 들어가서 같이 아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어떤 슬픈 이야기를 듣고, “내가 만약에 너였다면, 나도 너무나 슬펐을 것 같아” 지금 옆에 사람과 한번 간단하게 나누어보라. 자신이 슬펐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이야기해주고, 전도사님이 말한 예시로 답을 해주면 된다. “불쌍해”, “안됐다..” 이런 것은 공감이 아니라 동정이다. 공감이 부족한 사람들 여기에 많을 것이다. 전도사님도 공감을 하나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감은 훈련을 하면 공감능력이 길러진다. 왜냐하면 공감은 지능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면서 예수님이 공감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성경을 해석하는데 참으로 많은 어려움과 고민을 하게 되었다.
본문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다. 이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옥합을 깬 사건 이후에 그 집안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그 집에서 사람을 보내어서 소식을 전했다. 그것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에 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야기를 듣고 “이 병은 죽게 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이 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당장에 그 집으로 가서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살려야 하지 않는가? 거기까지는 12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라 어서 급하게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동하지 않으시고 그곳에 잠깐도 아니고 이틀이나 머물러 계셨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해보니 이미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안치된 지 벌써 4일이나 되었다. 이스라엘 중동의 날씨는 어떤가? 엄청나게 더워서 시체의 부패도 빠르게 진행된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둘 다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저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면서 오열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변에 함께 있던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비통하게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다. 그러면서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냐고 찾으시면서 나사로의 무덤 근처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 장면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진짜 예수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또 어떤 사람은 “아니 맹인도 고치셨으면, 죽지 않게 막으셨어야지..”하는 이야기들을 한다. 뭔가 이 장면까지만 생각하면, 예수님은 엄청나게 감성적이시고 공감도 최고로 잘해주시며 함께 아파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 계속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무덤 앞에 놓인 돌을 옮겨 놓으라고 사람들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여동생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님, 오빠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이미 4일이나 되어 냄새가 심각합니다.”라고 말하니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꾸짖으신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이러한 이야기로 인하여서 예수님의 눈물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기 위해 전통적인 유대인 방식의 슬픔을 표현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족을 읽은 것에 관한 슬퍼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픈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당시 시대에서 최고로 칭찬 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멀리서 온 종교지도자가 시간을 내어 위로를 해준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치 수학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의 장례식장에 피타고라스가 온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마음이 너무나 따뜻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해석이다. 두 번째로는 주변의 사람들과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이 진정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음을 슬퍼하시며 분노보다는 덜한 격한 마음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해석이 맞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100%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100%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있었다. 부활은 종말의 때에 모든 육체가 부활할 것을 알고 있었다.
요한복음 11:24 NKRV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은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그때 마르다는 “네, 주님. 저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에 오시기로 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금 말고 마지막 날에 살리실 것을 믿고 있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동안 머무실 때,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요한복음 11:11 NKRV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때 이미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한 것인데, 제자들은 진짜 잠을 자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잠들었으니, 낫게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진짜 잔 줄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1:14–15 NKRV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무엇을 위해서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것인가? “믿게 하려 함”이다. 그렇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진정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작성한 책이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하고 실제로 어떤 능력이 있으시며,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을 하실 지에 대해 자세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옮기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성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신다.
요한복음 11:41–42 NKRV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에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 주변에 있는 무리들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린 기도는 그가 곧 행하실 일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마리아와 마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셨다는 것을 보다 쉽게 믿도록 하기 위해서 이 기도를 드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신다. 그때 죽었던 나사로가 미라처럼 천으로 감겨있는 상태로 나오는데 그 얼굴에는 수건에 싸였다.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명령하신다. 예수님은 이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라는 요한복음 5장 21절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다. 예수님이 진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생명을 가져오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주변의 사람들이 본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죽음 이후에 부활할 것을 가리킬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그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을 가리키는 표적이다. 나사로는 이 일을 경험하고 그는 죽었으나,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 번째로, 우리가 완전히 망한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님만이 참 소망이시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마리아와 마르다는 완전히 미래를 잃어버린 상황이다. 집안에 유일한 남자 형제가 죽었다는 것은 집안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경제력은 남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나사로가 죽어버린 상태에서 어느 누가 살릴 수 있는가? 아무리 똑똑하고 세계 최고의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죽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은 몇 퍼센트인가? 완전히 0%이다. 정말 끝나버린 것이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 이러한 상태였다.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0%인 인간들이었다. 죽은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예수님이 택하여 주신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하나도 없다. 죽은 나사로를 봤을 때 상태가 어땠는가? 그의 무덤에는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 몸에 영혼이 있겠는가? 이미 떠나가고 없는 실제로 죽은 상태이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영적으로 이러한 상태라는 것을 기억하시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구약에서 하나님이 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보아도 믿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렇다. 믿음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과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성령을 통해 믿음주셔야 믿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을 찾을 수도 알 수도 없는 우리에게 예배라는 것을 주님께서 만들어주셔서 이렇게 드릴 수 있는 것이고, 믿음주셔서 우리가 교회에 나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으신 창조주이요, 구속주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신데, 하물며 우리의 가장 힘들고 망한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를 버려두시겠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을 반드시 믿으시기 바란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100% 인간이시며, 100% 하나님이시다. 반인반신도 아니고 50:50도 아니다. 어쩔 때는 인간이셨다가 기적을 베푸실 때는 하나님이신 분이 아니다. 모든 순간에 다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다 아신다. 그래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인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과 고통을 다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힘든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공감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깊은 참된 위로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 땅에서 아무리 뛰어난 심리학자에게 상담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내 영혼에 깊은 만족을 얻기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내 모든 상황을 24시간 일거수일투족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기에 나의 모든 상황을 다 보고 계시고 나를 창조하셨기에 가장 잘 아시고, 심지어 나의 미래 일까지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한 분이시다. 그러니 우리의 삶을 맡겨드리기에 너무나 좋은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100% 참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저주와 죄악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 예수님은 100% 참 하나님이시기에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믿음’이다. 어떤 믿음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 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아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다.
요한복음 20:31 NKRV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그리스도, 구원자라는 것을 기억하시라. 요한복음을 쓴 이유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썼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처럼 4대 성인으로 좋은 가르침을 주는 분으로만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요,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4대 성인에 있는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이들은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성인이라 부르지 않고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우리를 어두운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고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 부르셨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드리는 이 예배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처럼 하나님을 찾을 수도 알 수도 없었던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린 죄인된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신 귀하고 거룩한 제도가 매주 드리는 주일 예배라는 사실이다. 이렇게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러주신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다. 바로 ‘믿음’이다. 그 믿음은 평범한 일상에서나 완전히 망한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다 끝난 것 같은 가능성 0%인 곳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가 성경에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작은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라. 그리하여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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