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량의 탈을 쓴 사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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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0:31-43

찬 204장 주의 말씀 듣고
오늘 새벽에 나눌 말씀의 제목은 ‘아량의 탈을 쓴 사악함’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량’이라는 덕목을 높이 평가합니다. 마음이 넓고, 남의 허물을 감싸주며,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성숙한 사람이라 여깁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며, 주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분노보다는 용서를, 심판보다는 긍휼을 택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아량이라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잘못된 대상에게 베풀어진 아량이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가리는 일이 되고, 사악함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아합 왕은 아람 왕 벤하닷 앞에서 관대함을 베풉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자비가 아니라, 자신의 계산과 정치적 유익에 근거한 잘못된 아량이었습니다.
아무런 댓가 없이 용서하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어떨 때에는 마땅한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하는 것이, 공의를 세우는 일일 수도 있는 것이죠.
오늘 이 아침,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베풀고 있는 아량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인지, 혹은 그 너그러움 뒤에 감추어진 사악함과 타협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겉으로는 관대함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칭찬받을 덕목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참된 분별력을 얻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긍휼과 단호함을 구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라는 나라가 전쟁을 벌입니다. 이 당시 북이스라엘 왕은 아합 왕이고요, 아람 왕의 이름은 벤하닷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두 나라간의 전쟁에서는요, 북이스라엘이 두번이나 승리하게 됩니다. 패한 아람의 왕이었던 벤하닷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어집니다. 그때 그의 신하들이 이렇게 조언합니다. 왕이여 아합에게 머리를 숙이고 자비를 구하라고 존언을 해요. 아합은 벤하닷을 “그는 내 형제라”라면서 관대하게 대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마차에 태워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까지 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놓아주고 언약을 맺습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진 상대를 놓아주는 것은요, 우리가 보기에는 자비를 베푼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요, 아니었습니다. 벤하닷은 하나님의 백성을 헤치려 군대를 일으킨 악인입니다. 그가 첫번째 전투에서 패할 때 뭐라고 한지 아세요? 읽지 않았지만 23절에 보면요,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다, 만일 평지에서 싸우면 우리가 이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멸시했고요, 한번의 패배후 다시금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사람입니다. 그런자에게 아량을 베푸는 것은요, 원수를 용서하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아합은 왕으로서 직무유기를 했습니다. 백성들을 마땅히 악인들의 손에서 보호해야 하는 일을 주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함에도, 그는 자신의 감정과 정치적 판단 때문에, 그것과 상관없이 그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되는 상황을 떠올려보세요. 다윗과 같은 인물은요, 결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악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골리앗과 같은 경우죠.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때에요. 다윗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량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어요. 오히려 거룩한 분노에 휩싸여 공의로 그를 심판하는 의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죠. 악에 대한 관대함과 아량은요, 오히려 방종을 낳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역사 가운데에서도 많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같은 경우는요, 나치 전범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수많은 전범들에게 엄중한 법의 심판을 내렸습니다. 이와 동시에요 독일 사회는요 나치의 역사적 죄악에 대해 끊임없이 교육하고 반성하는 문화를 세웠습니다. 그 결과 독일은요 세계적으로 가장 강한 과거청산의 모범국가, 공의를 세운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 전반에 경계심과 책임감을 세웠습니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어떠합니까? 일제강점기 시절에요. 일본에 붙어먹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있었습니까.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친일 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 식민 지배에 협력했던 일부 인물들이 정치와 행정, 교육, 군사 분야에 다시 자리잡으며 새로운 권력의 일부로 재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내려오고 있고요,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 친일의 유산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 곳곳에 잔존합니다. 대통령의 자리에서 말도안되는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도요,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사면을 해줘요, 정의보다는 타협과 현실논리가 우선시되는 풍토가 뿌리 깊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 두 역사의 흐름을 보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악을 악이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인간적인 아량과 관용으로 덮으려 할 때, 그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더 교묘하게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요, 아합이 벤하닷을 용서한 것은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벤하닷을 아합의 손에 넘겨서, 그를 심판하며 진멸하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42절 전반절에 보시면요.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벤하닷은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그 왕에게 아량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떄로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요, 그러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잘못이나 죄를 마냥 덮어두고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다른 사람의 죄 뿐만이 아니라 나의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대해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굳이 그것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합리화로 잘못된 아량을 베풀고 있는지 우리는 점검해야 합니다.
진정한 아량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여기서의 순종은, 때로느 정말로 자비와 아량을 베푸는 것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죄에 대한 단호한 거절과 공의를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말해야 할 때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끊어야 할 관계를 과감히 끊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단호해 보일 수 있어도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참된 믿음의 선택일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선택과 순종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 살펴볼 부분은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책임은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42절 말씀에 보면요.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하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선지자를 통하여 아합에게 이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은요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이미 아합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선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벤하닷을 아합의 손에 넘기셨고, 그를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그러나 아합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판단과 감정을 따랐고,그 불순종의 대가는 하나님께서 그대로 아합에게 돌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겁고, 그 뜻을 거역한 책임은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적인 감정으로 무시될 수 없고, 하나님의 명령은 상황논리나 현실 타협으로 덮을 수 없습니다.
아합은 잠시 벤하닷에게 관대함을 베풀며 정치적으로는 만족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결정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한 중대한 죄였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 되었고, 그의 생명과 백성들까지 그 책임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종종 순간의 유익을 좇아,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기준과 명령이 있음에도, “지금은 이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우리의 생각으로 그 뜻을 뒤로 미루고 타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그 선택의 결과는 반드시 내 삶에, 내 가정에, 내 사역과 교회에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실행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뜻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순간의 감정과 계산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자 되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히 순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아침을 깨워주시고 말씀 앞에 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들은 말씀처럼,아량이라는 이름으로 불순종을 감추려 했던 모든 순간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길 원합니다. 감정과 현실의 유익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뒤로 미뤘던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합이 벤하닷을 살려주며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했듯, 저희도 때로는 단호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고, 분별해야 할 때에 타협하며,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람의 눈치를 본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 우리의 판단보다 높으신 주님의 뜻에 늘 순종하게 하시고, 누구에게 아량을 베풀지, 언제 공의로 단호해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더하여 주옵소서. 사람의 눈에는 너그러움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불순종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도 늘 하나님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기를 워합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을 행하며, 공의 가운데 자비를 실천하는 우리의 삶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이 새벽에도 여러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아버지를 만나는 시간 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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