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새벽기도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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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 NKRV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누가복음 18:31–43 NKRV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설교 제목: “예루살렘을 향하는 믿음의 길”

본문: 누가복음 18:31–43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어떤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고난 예고와 맹인 치유 사건을 연결하여, 우리가 정말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누구를 향해 부르짖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의 영적 시력이 회복되고, 믿음의 길로 다시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1대지: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보고 있는가?

본문: 누가복음 18:31–33

🔹 본문 해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이 말씀은 단순한 지리적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죄, 회복, 심판, 영광이 교차하는 구속사의 중심 무대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한 결정적 순간을 향해 나아가신다는 뜻입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겠고, 조롱을 받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이 말씀은 다섯 단계에 걸친 수난 서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겪으실 수치, 폭력, 죽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난 예측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 순종으로 이 길을 선택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인류를 구속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 신학적 강조: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구속의 길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실수나 적의 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23 — “하나님의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된 것이라.”
이사야 53장 — “우리는 그를 징벌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한다고 여겼으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은 이 길을 예언의 성취로서 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 현대적 적용: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보고, 따르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길은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는 십자가보다는 “편안함”, “치유”, “성공”, “형통”을 이야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은 영광 없는 고난도 아니고, 고난 없는 영광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이 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우리는 정말 이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나를 위한 신앙입니까, 주님을 위한 신앙입니까?

📌 예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선교사’

1900년대 초, 조선에 왔던 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처럼 자신의 인생을 복음 전도에 헌신하며, 조선에서 평생을 살다 묻혔습니다.
그에게 한 친구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힘든 길을 자청하느냐? 유럽에서 목회하면 편안할 텐데…”
그는 짧게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랐습니다. 그 길은 영광의 길은 아니었지만, 복음의 열매는 지금도 맺히고 있습니다.

🔹 실제적 적용 포인트

가정에서의 십자가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고난의 시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연습
직장과 사회에서의 십자가
정직함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진리를 선택하는 용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십자가
섬김을 받기보다 먼저 섬기고
오해받아도 끝까지 사랑하는 인내

✝️ 결론: 오늘 당신은 어떤 길을 보고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그 길은 쉽지 않습니다. 외롭고 험합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참된 생명으로, 부활의 영광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같이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지고 가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함께 걷는 자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2대지: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본문: 누가복음 18:34

🔹 본문 해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3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고, 그 뜻이 감추어졌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말을 알지 못하였더라.”
이 구절은 세 겹의 무지를 병렬적으로 강조합니다.
깨닫지 못하였고 (οὐκ ἔγνωσαν) – 지적으로 이해하지 못함
그 뜻이 감추어졌으며 (ἦν παρακεκαλυμμένον) – 계시적으로 가려짐
알지 못하더라 (οὐκ ἐγίωσκον) – 결과적으로 전혀 인식하지 못함
이는 단순한 지적 장애가 아니라, 영적 눈멀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계시의 감춤, 그리고 인간 기대와 신학적 틀에 갇힌 혼미함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 신학적 통찰: 왜 깨닫지 못했는가?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고난받는 메시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에 명확히 예언되었음에도(이사야 53장, 시편 22편),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아 사상은 ‘정치적 해방자’ 또는 ‘영광의 왕’이었지 ‘십자가에 달릴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24장에서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눅 24:31)
즉,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성령의 조명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계시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 현대적 적용: 오늘 우리의 귀는 열려 있는가?

오늘날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영적 무지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습니다.
성경 공부도 합니다.
성경책을 매일 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 말씀이 내 삶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나는 그 말씀 앞에 어떤 응답을 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기대가 말씀을 가립니다. 제자들이 영광의 메시아만을 기대했던 것처럼, 우리는 위로와 복만을 기대합니다. 고난, 회개, 순종의 메시지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을 정보로만 대합니다. 말씀을 삶의 진리로 받아들이기보다, 성경 지식이나 문화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구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조명하실 때, 우리는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질 수 있습니다.

📌 예화: “듣고도 들리지 않는 귀”

어느 날, 아들이 귀가 멀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보청기를 사드렸습니다. 며칠 후,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요즘 제가 하는 말 잘 들리세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이제 네가 말하는 건 다 들리긴 하는데… 듣기 싫은 건 여전히 안 들리는구나.”
이 말은 웃픈 이야기지만, 우리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을 때만' 듣고, '받아들이고 싶은 부분만' 받아들이는 귀는 결코 변화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히 4:12).
그러나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민감합니까? 성도는 설교를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말씀에 대한 무감각은 영적 병입니다. 그 병은 회개로만 치유됩니다.

🔹 적용 질문

나는 예수님의 음성을 정말 듣고 있는가?
내 신앙의 핵심은 내가 바라는 메시아상인가, 성경이 계시하는 메시아인가?
나는 말씀을 들을 귀를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 하는가?

✝️ 결론: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5)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오늘날 교회의 진짜 회복은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설교의 회복이 아닌 청중의 회복, 강단의 회복이 아닌 회개하는 귀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내가 하는 말을, 너는 듣고 있느냐?”

📍 3대지: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를 부르고 있는가?

본문: 누가복음 18:35–43

🔹 본문 해설: 맹인의 외침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이 인물은 세상적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누가복음 저자는 이 맹인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예수의 정체를 인식한 사람으로 그려냅니다.
그는 군중의 소리를 듣고,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 18:38)
이 한 마디 속에는 믿음의 핵심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 메시아에 대한 고백
“불쌍히 여기소서” → 자기 무능의 인식과 은혜에의 의탁
이 맹인은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예수를 ‘올바로 보고’ 있으며, 그의 고백은 앞서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던 예수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오히려 분명히 드러냅니다.

🔹 신학적 통찰: 맹인의 외침은 참된 믿음의 모델이다

맹인은 육체적으로는 눈먼 자였지만, 영적으로는 밝은 자였습니다. 그는 보지 않고도 믿는 자의 대표이며, 누가복음이 의도적으로 제시하는 믿음의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멈추어 세우시고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눅 18:41)
그는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κύριε, ἵνα ἀναβλέψω)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 18:42)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구원하다”(σῴζω)**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시력을 회복시켰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의 믿음이 ‘영혼을 구원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이 기적이 단지 치유 사건이 아니라, 구원 사건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 현대적 적용: 오늘 우리는 어떤 믿음으로 예수를 부르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부릅니까? 기도할 때, 찬양할 때, 삶의 위기 앞에서…
하지만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음으로 부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누구로 알고 있는가? 맹인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 곧 왕이신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문제 해결사’로만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부르고 있는가? 그는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자기 무력함과 은혜에 대한 전적인 의탁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조건적이고 계산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끝까지 부르고 있는가? 군중은 그를 꾸짖고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그는 “더욱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변의 시선이나 자기의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외침을 멈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 예화: 바울과 신라의 찬송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신라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힙니다. 매질을 당하고, 족쇄에 채워졌지만 그들은 밤중에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5)
그들의 찬송은 상황을 무시한 맹목적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찬송은 믿음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찬송을 들으시고 옥문을 여시고,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에 이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맹인의 외침, 바울과 신라의 찬송 모두 믿음으로 예수를 부른 자들의 승리였습니다.

🔹 믿음의 열매: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니라”

맹인은 단지 치유만 받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무리도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 18:43)
그는 예배하는 자가 되었고, 제자도의 길에 들어섰으며, 공동체 전체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열매입니다:
기도응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

✝️ 결론: 당신은 오늘 어떤 믿음으로 예수를 부르고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분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구원의 길입니다. 그 길가에서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예수님은 반드시 멈추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정확히 알고, 겸손히 부르며, 응답받은 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시작되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은 단지 구원을 요청하는 외침이 아니라, 응답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의 시작입니다.
아멘.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부류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믿음으로 예수를 부른 맹인.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고난과 영광의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길은 어렵고 낯설지만, 참된 생명의 길입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말씀을 들으십시오. 믿음으로 예수님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 길 끝에, 구원이 있고 부활이 있으며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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