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짐을 허용하는 믿음 고후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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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뉴타운교회 X 새빛교회 연합주일예배
박윤철 전도사
설교문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매 주 사회를 보는 것 만으로 등이 흥건해졌는데 말씀을 전해야한다니 그 책임이 막중하고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이 왔다는 것이 실감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끌고 가시는 대로 가다보니 자격없는 제가 여러분 앞에 서게 됐네요.
저에겐 특별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곳에 서서 화려한 언변으로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릴 수도 없고, 우리 성도 여러분처럼 삶의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까지 부르신 뜻에 순종하여 나왔습니다. 저번 설교때 너무 짧아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는데, 극복하고 싶었지만 오늘도 좀 짧을 예정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으셔서 큰 은혜를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지난 3월부터 우리 교회 막내 수현이가 연달아서 아팠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지난 주에 도저히 안되겠어서 성모병원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까 코로나바이러스, 파라인플루엔자, 라이노바이러스 이 3가지 바이러스가 연달아서 걸린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돌도 안된 아기가 3개월 동안 설사와 고열로 고생하고 / 이앓이 한다고 비명지르면서 잠을 못자서 / 그 모습을 보고있는 저희 부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었습니다. 아파서 쉬지않고 우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너무 듣기 힘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기를 사랑의 눈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이루말하기 어려운 자괴감도 함께 찾아왔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본 기억이 얼마 없습니다. 아픈데도 얼마나 일찍 일어나던지요. 새벽 5시만 되면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들때문에 아침에 침구에서 비비적 거릴 시간도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온 집안이 예민한 상태로 늘상 비상대기를 하며 지냈습니다. 게다가 수현이 문제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는 새빛교회를 일구어 나아가는데 필요한 자금도 마련하지 못하면서 계속 압박을 받고 있었고 그러면서 늘어난 업무량이 너무 과중해서 하루하루 무거운 쇳덩이에 짓눌리는 듯 했습니다. 말그대로 세상에 치여가며 몇 달을 살아온 것 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저희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건 바로 ‘아무리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예수 보혈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발라주셔서 이 아이를 회복시켜주세요. 아파하지 않고 잘 잘수있게 해주세요. 천군천사 모두 이 방에 불러주셔서 악한 영으로부터 보호해주시고 어서 열이 떨어지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발요...”
이런 식으로 기도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결국 입원치료를 하면서 상태가 호전되었는데 제 마음에는 ‘감사함’보다는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가 하는 ‘무력함’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확신하고, 신앙 생활을 하면 삶이 좀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적이 없으신가요? 그리고 지금 그 바라던 삶을 살고 계신가요? 다들 원하시는 건강을 얻으셨나요? 돈 때문에 쪼들리지 않고 부자가 되셨나요? 가정이 더욱 화목해지셨나요?
사실 이런 질문들은 아주 수준낮은 질문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를때나 할만한 질문들이죠. 하나님께서 저런 욕망을 들어주시기 위해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허덕일 때에는 어서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고 모든 것에 불평불만으로 대할때에는 이런 질문들이 우수수수 쏟아지는 것 입니다.
사실 저는 스스로 하나님께 받은 복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상 감사한 마음으로 지냅니다. 그러나 지난 삶을 살아가게 하셨던 은혜와 / 기쁨으로 가득차게 하셨던 기적들을 잠깐 몇 달 힘들었다고 또다시 망각하고 하나님께 따지게 되었음을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하나님 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나요?’, ‘안그래도 육아때문에 피로한 애엄마를 어디까지 몰아붙이실 생각이세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면서 사느라 너무 바빠서 애들 등원할때 나갔다가 퇴근도 밤 12시가 되서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 저희 가족을 다 찢어발기시려고 이러시는건가요!’
이런 식으로 원망의 기도가 자동으로 튀어나왔습니다. 말그대로 낙심한 것 입니다. 여러분. 이 낙심이라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겁니다. 키에르키고르라는 철학자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을 정도고, 그러므로 마귀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낙심하는 것 입니다. 절망하는 것 입니다.
성경에도 낙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 입니다. 갈멜산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불이 임하고,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친 바로 다음 장면에서,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쳐 로뎀나무 아래 주저 앉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기를 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 말 속엔 낙심과 절망, 하나님께 대한 서운함과 원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엘리야는 그 전에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위협 앞에 놓이자, 그 은혜는 다 사라지고, 남은 건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하는 깊은 무력감 뿐이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백성이 말을 듣지 않고, 광야에서 먹을 게 없다고 아우성칠때마다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백성을 내게 맡기셨나이까?” 그는 은혜를 체험하고도 또 의심했고, 기적을 보고도 또 분노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바울도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께 절규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8절에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줄 알았으니...’,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엘리야도, 모세도, 바울도, 저도, 그리고 어쩌면 여러분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또 따지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도 또 불평불만을 내세우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참 웃기는 일 입니다. 그렇게 불평이 많고 따지고 툴툴거릴거면 그냥 기도를 안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냥 하나님은 안계시나보다 하고 오늘 여기서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막걸리 하나에 김밥 2줄 챙겨서 여기 위에 북한산 족두리봉에 올라가야 하는거 아닌가요? 대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나 강한 믿음이었나요? 아뇨 그럴리가 없습니다.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려고 하는 저만 봐도 그럴리가 없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기도는 중단되었는데, 신앙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는 무너졌는데, 하나님을 향한 의지는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대체 이 믿음의 근간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그것을 쫓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8절을 보시면 고린도후서 4:8–9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어딘가 이상합니다.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했다고, 답답한 일을 당했다고, 박해를 받았다고, 거꾸러뜨림을 당했다고. 하지만 그는 동시에 말합니다. 싸이지 않았다. 낙심하지 않았다. 버림받지 않았다. 망하지 않았다. 바울의 상황에서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말을 같은 문장에서 함께 말할 수가 있나요? 넘어졌는데 완전히 넘어지진 않은것이고, 꺾였는데 부러지진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을 지탱한 힘은 무엇일까요?
7절을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과 같은 우리는 쉽게 깨지고, 금방 낙심합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내시고 질그릇된 우리를 끝없이 회복하십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단지 개념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 보배, 즉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은 단지 개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실제’ 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생명을 전하기 위해 죽음에게 스스로를 허용했습니다. 바울은 단지 위험에 노출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매일같이 경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통 속에서 매일 죽음으로 이끄는 세력에 종속되었지만, 동시에 그의 육체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통과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망하지 않았고, 낙심하지 않았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그 복음이 자신의 삶 안에서 증명되도록 허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매일 죽음을 살아내며, 예수의 생명을 몸으로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질그릇과 보배의 비유는, 단지 그가 스스로 약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깨짐을 허용하여 생명이 흘러나오게 하는 그릇으로 살아가는 그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8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라며 자신이 겪었던 고난들을 나열하기도 했는데,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난들을 ‘가벼운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어떻게 이것을 가볍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러나 이 말이 사실 틀린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그리고 지금도 자기안에 함께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보고 나니 지금 내가 겪는 고난과 앞으로 받을 상급을 비교해 보니까 이 고난은 너무 가볍고 일시적인 고난이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스스로 무능하다고 느끼거나, 능력이 없다거나 재주가 없다거나 하는 이런것은 사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보물이신 예수님이 계신데 내가 질그릇인게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보잘것없는 질그릇같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단지 바울의 어려움과 우리 스스로의 어려움을 비교하여 위안을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각자의 세계가 다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왜 바울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실제로 실천해야하는 복음의 정수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질그릇같은 존재라는 것은 믿으신다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고백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질그릇 같은 존재라면 앞으로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해야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다같이 해보겠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이 고백밖에는 없습니다. 공중권세 잡은 마귀가 활개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고난받을 것은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고난이 찾아오고 상황이 극심히 어려워질때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은 뒤에 반드시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매번 보게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신다고 강렬하게 느끼는 순간 중에 하나입니다. 이때야 말로 질그릇이 깨어져서 그 안에 보물인 예수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믿으신다면 아멘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귀로만 듣고 또다시 흘러가버리면 그것이 바로 ‘종교놀이’가 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를 실천해야합니다. ‘내가 질그릇처럼 깨어지는 것’,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첫번째로는 ‘자존심을 내려놓는 죽음’ 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을때, 예전 같았으면 바로 반박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한 발 물러서 보는 겁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에게 지적받았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먼저 ‘미안해요’라고 말해보는 겁니다. 내 논리가 맞더라도, 관계를 위해 말하지 않고 참아내는 것 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 자존심 강한 한국사람들이 많이들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벼운 고난’이라고 말한 것 처럼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실천하는 것 입니다.
두번째로는 ‘내 뜻’을 내려놓는 죽음입니다. 내가 계획한 일이 어그러졌을 때 억지로 붙잡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주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진심으로 내려놓는 것, 자녀의 인생을 내 뜻대로 조율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며 기다리는 것.
세번째로는 ‘내 이름’이 지워지는 죽음입니다. 내가 수고했지만 누군가에게 공이 돌아가도 기꺼이 뒤에 서는 것. 내가 한 일임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하나님만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 칭찬받지 않아도, 결과가 안 보여도 묵묵히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
네번째로는 ‘내 편함’을 포기하는 죽음입니다. 피곤한 하루 끝에도, 아이들을 위해 성경을 펴 읽고 기도해주는 것. 주말에 쉬고 싶은 욕구를 이겨내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 여유가 없어도, 어렵게 번 돈을 누군가의 필요를 위해 흘려보내는 것.
다섯번째로 ‘복수심’이 죽는 것입니다. 나를 배신한 사람을 위해 축복을 기도하며, 언젠가 그와 다시 손을 잡게 될 날을 기대하는 것. 나를 오해한 사람을 향해 해명보다 침묵으로 기다리는 것.
일상 속에서 이런 작은 죽음들은 십자가 앞에서 나의 자아가 깨어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으로써 생명이 또한 드러나게 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물러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세요.
더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용서하고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손에 쥐고 놓고싶지 않아하는 여러분의 인생을 이젠 놓으시고 포기하십시요. 주께서 더욱 좋은 것으로 저와 여러분의 삶을 채우실 것을 믿습니다. 맡은바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여러분. 이젠 무책임하게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던지십시요.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어차피 얼마안가 산산히 조각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내려놓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꽃피우는 것을 목격하십시요. 그것이 역설적으로 여러분의 삶을 가장 책임있게 돌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진심으로 십자가에 죽이며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은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인 이곳 뉴타운교회에서 여러분들이 서로서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도와주기위해서 모이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입니다. 모두 사랑하는 한 가족입니다. 앞으로의 삶 속에서 여러분들이 서로 삶을 나누고 예수님께서 드러나셨던 순간을 공유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말그대로 ‘시퍼렇게 살아계심을’ 누리며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질그릇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냈던 사도 바울을 오늘 만나보았습니다. 우리도 그의 영성을 닮게하셔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내는 주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버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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