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화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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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화해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화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화해가 무엇인가? 누군가와 싸워서 화가나고 꼴보기 싫지만, 다시 화목하게 잘 지내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정확하게 화해라는 뜻은 ‘싸움을 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감정을 푸는 것이나 싸웠던 상대방들끼리 서로를 용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들은 누군가와 싸우고 갈등이 일어났을 때, 화해를 잘하는가? 보통은 어려울 것이다. 전도사님도 화해하는 것이 지금 이 나이라도 쉬운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러분들의 나이였다면 친구와 갈등이 일어날 때, 주먹으로 싸우며 화해했지만 지금 그렇게 한다고 하면 다 큰 성인으로써 할 수 없다.
우리는 왜 화해하기가 어려울까? 첫 번째로 우리는 뭔가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화해하기 힘들다. 내가 먼저 화해를 하자고 하면 무시당할까봐 또는 약해보일까 하기 싫어지게 된다. 그래서 먼저 사과하거나 화해를 하면 왠지 ‘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친구들이 어떻게 보일까 걱정되면서 내가 먼저 사과하면 바보같아 보일까 걱정되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화가 나는 감정을 컨트롤 하기 어려워서이다. 상대방을 향해 느껴지는 분노와 실망, 상처 등의 감정을 느끼지만 이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잘 어떻게 풀어낼지 모르기에 화해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이미 감정이 분노로 가득한 상태에서 화해를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대체로 집이나 학교에서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화해의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본적이 없으면 화해 자체를 어색하고 어렵게 느끼게 된다. 세 번째로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서 화해하기 어렵다. “내가 먼저 다가가도 또 상처받으면 어쩌지?”하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이전에 반복적으로 비슷한 갈등을 겪었다면 더 화해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화해하기를 꺼려하고 어려워한다. 세상에서는 화해를 권장하지 않고 정 힘들면 인간관계를 손절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반드시 화해하라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왜 화해하며 살아야할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유대인 무리들에게 십계명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보통 십계명에 있는 율법을 해석해주고 쉽게 이해하고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렇게 혼냈던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선생인 랍비들이었다. 그중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 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에 대해서 명확한 해석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율법에 대해서 그저 누군가를 살해하지만 않으면 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를 온전하게 잘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반쪽짜리 율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떤 말씀을 하시냐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재판정에 설 것이고 자기 형제에게 라가(머리가 빈 놈)라고 하는 사람은 유대인의 최고 법정에 설 것이다. 그리고 미련한 놈이라고 형제에게 말하면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분노하고 무시하고 욕하면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무엇을 보시는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쉽게 화내고 말을 함부로 내뱉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마음 가운데 상대방을 존귀하게 여기는게 아니라, 가볍게 여기고 아래로 생각하고 무시하는 마음이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만, 옆에 있는 사람도 내가 함부로 대했던 아래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한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대상이다. 그만큼 주변에 형제들, 자매들에게 귀히 여기지 않고 함부로 하는 그 못된 마음을 너무나 싫어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23-24절에 그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해결되지 않은 미움과 원한을 여전히 가진 상태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한 마디로 누군가 싸우고 서로 화해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화해하고 예배드리러 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만큼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모습을 예수님이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인가? 예배는 정결하고 거룩한 예식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우리가 깨끗한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더러움과 함께하실 수 없고,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면 소멸되기 마련이다. 이를 위해 당연히 예배오기 전에 샤워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청결함, 정결함이 있냐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반드시 서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용서받은 은혜로 지금 이렇게 나와 예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도사님도 이 말씀 때문에 여동생과 엄마와 아침에 다투고 예배 드리기 전에 짜증부려서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사과하거나 타이밍을 놓쳤을 때 예배 마치고 사과의 말을 전하곤 했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겠는가? 가정에 평강이 흐른다. 그리고 왜 자기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냐고 물을 때 예수님 때문에 마음에 찔려서 그랬다고 고백했었다. 그렇다. 내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였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다. 여기있는 꿈사땅 모두가 예수님 사랑과 은혜 때문에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기 소망한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하나의 예화를 더 들어서 화해를 해야하는 타이밍이 긴급하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까지 주어지는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가능하다. 죽으면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전도사님이 가장 증오했던 사람은 우리 아버지였다. 항상 가정폭력으로 술을 마실 때마다 집에 있는 것들을 부수고, 엄마에게 폭언과 폭행을 자주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오했다. 그러나 중학교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점점 아버지를 용서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계속해서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가 없어서 성인되면 아버지께 찾아가서 사랑한다고 고백해야지 다짐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고2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날 장례식때 얼마나 목놓아 울었는지 모른다. 예수 믿는다는 놈이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버지께 살면서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도 못드리고, 복음도 전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너무나도 들었다. 만약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못해서 지옥에 계실까 마음에 슬픔이 가득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이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용서하는 기회가 날마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을 때야 용서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회개의 기회도 살아있을 때까지만 주어진다. 죽고 난 후에 하나님께 돌이키고 회개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그러면 그 죄값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더이상 예수님이 책임질 수 없고 영원토록 그 죄 값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해의 타이밍을 알려주신다. 가능한 빨리하라고 긴급하게 말씀하신다. 이에 사도 바울은 화해의 타이밍을 더 자세히 말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사도 바울은 해가 지기 전에는 화를 풀라고 말한다. 분노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당연히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하고 나에게 싫은 행동을 할 때 화가 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노를 계속해서 마음에 품는 것은 정신건강에도 너무나도 해롭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을 뿐더러 잠도 오지 않고 문제도 해결되기도 어렵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게 만드는게 분노이다. 결국 하루종일 분노하면 나만 손해이다. 그러니 분노는 하루 빨리 십자가 앞에 던져 버리는게 나에게 가장 유익하다. 여기 있는 여러분의 분노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말고, 어떻게 화목을 이루어갈지를 고민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할 자격이 없다. 예수님으로부터 너무나도 큰 은혜와 사랑으로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서를 받은 우리는 사랑할 자격밖에 없다. 그래서 십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친다. 이에 더해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성경 어디에도 누군가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은 없다. 심지어 누구까지 사랑하라고 하는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왜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다. 그 하나님의 형상은 서로 사랑하라고 지으셨다.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깨져버려서 남탓하고 서로 미워하게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우리 서로 사랑하기 소망한다. 오늘 설교 제목은 ‘믿음으로 화해하기’이다. 뭔가 내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 손해같은 느낌이든다. 그리고 그에 따른 억울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다 아신다. 원수같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영원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내가 굳이 복수할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원수 같았던 이집트에서 출애굽시키신 하나님, 바벨론과 로마 제국을 없애버리신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화해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화목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곳이 교회이든지, 학교이든지, 가정에서든지 더 나아가 앞으로 여러분이 다닐 직장에서 서로 미워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되면 서로 사랑하는 그 공동체가 얼마나 천국 같겠는가? 천국은 죽어서 누리는 것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 이 땅에서도 천국을 맛볼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 용서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있는 모든 곳이 화목을 이루어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가기를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