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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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7:11-17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2025. 7. 2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어떤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봤었는데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떤 사람인가? 바로 이 백부장과 같은 사람이다.’ 하고 백부장을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델로 등장을 시킴으로써, 우리가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교훈을 주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떤 돌보심을 받는가, 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과부가 등장을 합니다. 이방인 다음에 과부, 계속해서 전통적인 구원의 대상에서 벗어난 자들이 등장을 하죠. 백부장은 권력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어요. 반면에 과부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가난해요.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에서 경건한 자 시므온이 이런 찬송을 불렀어요. 누가복음 2장 32절에,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 찬송처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면서 동시에 이방인의 구원자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구원하실뿐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 이방인들까지도 구원하셔요. 그래서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서 이방인 백부장에게 구원의 빛을 비춰 주신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한 여인을 찾아오셔요.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한 비천한 여인에게 영광을 비추십니다. 자, 오늘 본문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예수님이 나인이란 성으로 들어가셨어요. 나인은 나사렛보다 남동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요. 그리고 가버나움과 비교를 하면, 가버나움에서 약 4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지도를 한번 봐 볼까요? 지도에 나인 성이 있죠. 위로 10키로미터를 올라가면 나사렛이 나오고, 북동쪽으로 40키로미터를 가면 가버나움이 나와요.
예수님이 백부장의 종을 고치실 때 가버나움에 계셨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나인 성으로 들어가고 계셔요. 가버나움에서 나오셔서 40키로를 걸어서 나인 성까지 오신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다시 보면, “그 후에” 라고 했거든요. 그 후에. 그러니까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그 후에, 곧바로 나인 성으로 오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막 나인 성으로 들어가시는 중이에요. 아직 들어가신 게 아닙니다. 들어가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그때 마침 성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어요. 자, 오늘 본문 12절 같이 읽어볼까요? 12절 시작,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예수님이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어요. 이제 조금만 가면 성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와요. 장례행렬이죠. 성 안에 시체를 매장할 수 없기 때문에, 성 밖으로 나오고 있어요. 나인 성은 그 이름의 뜻이 “아름다움”이라는 뜻이거든요. 이 아름다운 성의 입구에서 한 쪽은 나가고, 한 쪽은 들어가려고 해요.
한쪽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죽은 자를 메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성에 생명은 들어오고, 죽음은 나가고 있는 상황이에요.
이때 죽은 자는 누굽니까? 한 어머니의 독잡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어요.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던 사람이죠. 그런데 그 아들까지 죽어버렸어요. 이제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고. 이 여인이 이제 뭘 보고 살아야 할까요? 소망을 둘 곳이 없어요. 누가 이 여인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돼요.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한 마디를 하십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요. 13절에 보니까,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울고 있는 과부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울지 말라” 아니, 아들이 죽어서 엄마가 울고 있는데, 울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지금 상황에 맞는 말입니까? 지금 13절 문장 자체가 이상해요.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거든요. 그러면 불쌍한 마음으로 뭔가 위로의 말을 해야되잖아요. ‘아이고,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기운 내세요.’ 이런 말을 해야 정상이죠. 그런데 너무나 냉정한 말씀을 하셔요. 울지 말라.
그러면서 밑에 14절에 보면,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셨어요. 14절도 봐 볼까요? 1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셨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멈췄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예수님이 지금 장례행렬을 방해하고 계시거든요. 상주에게 울지 말라고 하더니, 관을 만져요. 그래서 행렬이 멈췄습니다. 빨리 무덤에 매장을 해야 이 슬픔의 행렬이 끝날 텐데, 예수님 때문에 지연되고 있어요. 사람들이 아마도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 사람은 뭔데 행패야? 미친 사람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죽은 자를 향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치 자는 사람 깨우듯이, 죽은 시체에게 일어나라고 하셔요. 일어나라.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정말로 죽은 자가 일어났어요. 15절에 보니까,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었던 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말을 하는 겁니다. 이때 시체가 누워있던 관이 우리가 생각하는 관이 아니에요. 관을 헬라어로 “소로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시체를 눕혀놓고 들고 나르는 운반대 같은 겁니다. 사진 한번 봐 볼까요? 이게 소로습니다. 이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사람들이 들고 나르는 거예요.
시체가 이 위에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난 겁니다. 관뚜껑이 없으니까 일어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어요. 베로 칭칭 감아논 시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난 거예요. 심지어 말도 해요. 기절초풍할 일이 일어난 겁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뭘 한 게 없어요. 그냥 손을 얹고 일어나라고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어서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 겁니다.
자, 그런데 지금 이 장면은 구약의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죠. 과거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르밧에 가서 과부를 만나 떡 한 조각을 달라고 합니다. 본래는 과부가 곡식가루 남은 걸로 떡을 만들어서 아들이랑 먹고 같이 죽으려고 했는데, 이것을 엘리야에게 대접해요. 그래서 그 뒤에 과부의 통에서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서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물질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뒤에, 과부의 아들이 갑자기 죽어버려요. 아들이 갑자기 병이 들어가지고, 뭘 해보기도 전에 죽어버렸어요. 이때 엘리야가 이 아들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살아났어요.
여러분, 이 아들이 왜 살아난 겁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기 때문에 살아난 거죠. 사르밧 과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입술로 고백했어요. 열왕기상 17장 24절에 과부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시라는 것과, 그에게서 여호와의 능력이 나온 사실을 안 겁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면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리겠어요?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신 거죠.
특별히 누가복음은 이 사건을 오늘 본문의 사건과 연결을 시킵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사건과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사건, 이 두 사건을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누가복음만의 독자적인 신학입니다. 나인 성 과부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에는 안 나와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과부와 과부를 연결시키고, 엘리야와 예수님을 연결시키는 이 구조가 누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구조인 겁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것처럼,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어요. 그 시체를 메고 성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는데, 시체가 일어나서 말을 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능력이라야 가능한 일이에요.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7장 1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이 사람들은 다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을 떠올렸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엘리야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어떤 선지잡니까? 큰 선지자죠. 큰 선지자. 여기서 크다는 말이 헬라어로 “메가스”라는 말이에요. 영어 “메가”가 이 말에서 나온 겁니다. 메가. 엄청나게 크다는 거예요. 엘리야도 대단한데,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한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 본인이 말씀하신 게 아니라, 백성들이 증언하고 있어요. “이 분은 큰 선지자다. 하나님께서 이 분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이렇게 증언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왜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큰 선지자라고 증언했을까요? 물론 죽은 사람을 살려내니까 놀라워서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지금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와 비교하고 있는 거예요. 과거에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어떻게 살렸는지를 비교해요.
엘리야는 어떻게 살렸습니까? 죽은 아들을 다락방에 옮겨놓고, 그 위에 엘리야가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어요. 다시 말해서, 자기는 능력이 없고, 하나님께 능력을 구한 겁니다. 자기가 생명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도록 통로 역할을 한 거죠.
반면에 예수님은요, 그런 번거로운 절차가 없어요. 그냥 손을 대고 말 한 마디만 하셨어요. 일어나라. 이는 곧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생명이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구할 필요 없이, 직접 자기가 생명을 주셔요. 엘리야랑 비교가 안 되죠. 이것을 사람들이 보고 깨달은 거예요. “아, 이 분은 엘리야랑은 차원이 다른 분이구나. 그냥 자기가 살려버리는구나.” 그러면서 이런 위대한 분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 땅의 그 누구보다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 2장 9절부터 11절에 이렇게 고백을 했어요. 빌립보서 2장 9절부터 1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입니다. 세상에 뛰어난 이름이 많지만 예수님께 비할 수가 없어요. 엘리야, 모세, 노아, 다 뛰어나지만 예수님의 이름은 그 모두를 뛰어넘으셔요. 그런 분이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사실은 이게 더 엄청난 사건이죠.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게 더 말이 안 돼요. 어떻게 그런 위대하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거절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리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이 땅에 오실 수가 있을까?
상상이 되십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100평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그거 버리고 반지하 가서 살라고 하면 가겠어요? 1, 2년 사는 것도 아니에요. 33년 동안 살아야 돼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33년을 사셨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땅에서 수고하고 희생하셨어요.
여러분,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을까요? 왜 모든 영광 다 버리고 이 낮은 곳에 오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 13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13절 다시 봐 볼까요? 13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아멘.
주께서 불쌍히 여기셨어요.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윱니다.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 거예요.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아들을 살려주신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속량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자기 백성.
특별히 13절에서 예수님을 주로 칭하고 있죠.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최초로 예수님을 주로 칭하는 말씀입니다. 이전까지는 항상 예수로 칭했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예수라는 이름으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최초로 “주께서” 라고 칭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로 부르는 장면들은 있었죠. 누가복음 5장에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말을 했었고, 또 오늘 본문 바로 위에 백부장이 뭐라고 했어요?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이렇게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이것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말이고요. 이거는 다른 거예요. 예수님이 주체로서 어떤 행동을 하시는 데 있어서, 예수로서가 아니라 주로서 행하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본래는 “예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거예요.
이것이 뭘 의미할까요? 예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구속주로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하나님으로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16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을 시켜주는데요. 16절도 다시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아멘.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돌보심이 확인 되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다시 말해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 사건인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신 거예요.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큰 선지자로 알고, 그를 보내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신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내려와서 백성을 돌보신 겁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신이 자기 피조물을 돌보겠다고 100층 아파트 버리고 반지하로 내려올 수가 있냐는 말이에요.
말이 안 되는 은혭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은혜는 또 없어요. 자기 피조물을 돌보기 위해서 신이 자기의 모든 영광을 버린다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유일한 은혭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은 겁니다.
여러분, 이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혭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거예요. 과부는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는 말을 안 했거든요. 오늘 본문 어디에도 과부가 믿음이 있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어쩌면 과부는 예수님이 누군지도 몰랐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들을 살려주셨어요.
이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앞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 전부터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시고, 돌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요.
하나님은 항상 자기 백성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자기가 택하신 백성, 그래서 믿음을 가진 백성,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될 백성에게 관심을 주시고 돌봐주셔요.
나인 성 과부는 비록 지금은 믿음이 없지만, 이후에 믿음을 갖게 될 백성입니다. 만약에 그녀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분명히 믿음에 대한 언급이 본문 안에 들어갔을 거예요. 하지만 믿음에 대한 말이 없죠. 그녀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들이 살아난 뒤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반드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지금 믿지 않아도 반드시 믿게 돼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시거든요. 그 상황이 빨리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온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믿음으로 판단해서는 안 돼요. 지금은 믿음이 없어도 나중에 믿음이 생길 수 있거든요. 그리고 나보다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할 수도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든, 그가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 말씀은 냉정한 말씀이 아니라 그에게 더이상 울 일이 없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울지 말라고 하면 그건 미친 사람이죠. 하지만 아들이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에, 더이상 울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울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고통을 헤아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돌보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부요함을 주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슬퍼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반드시 돌보심을 받습니다. 그 돌보심이 어쩌면 우리 기대와는 다를 수도 있어요. 위로의 말씀을 기대했는데, 울지 말라는 냉정한 말씀이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울지 말라고 하셨다면, 더이상 울 일이 없게 된다는 겁니다. 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더이상 두려울 일이 없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요. 말씀대로 이루시는 능력의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엘리야보다 더 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주님의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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