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29 주일오후예배: 로마서 8:28-30; 마가복음 3:20-35;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39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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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28-30; 마가복음 3:31-35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을 함께 읽겠습니다.
39문: 중보자는 왜 반드시 사람이셔야 했습니까?
답: 중보자가 반드시 사람이셔야 했던 것은 그분이 우리의 본성을 향상시키시고, 율법에 순종하시고,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중보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양자 됨을 얻게 하시고 위로를 받으며,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감사, 회개,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주님께서 자비와 은혜를 베푸심으로 이 자리 가운데로 부르신 복을 받는 여러분. 오늘도 말씀의 자리에 잘 나아오셨습니다. 벌써 2025년도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데요. 추운 겨울이 끝나고 어느덧 무더운 여름 날씨가 성큼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변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은 언제나 한결 같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오늘도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말씀의 자리에 함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여러분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시면 어떤 생각이 나시나요? 가족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나를 생각해주고 내 편이 있다는 안도감을 주고, 내 마음이 쉴 곳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것은 단지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는 동거인이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그 무엇입니다. 미국의 여론 조사기관에서 한국을 비롯하여 선진국 반열에 든 17개의 국가의 성인 1만 9천명을 대상으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가치는 무엇인가?”라고 물어본 결과 17개 국가 중 (아쉽게도 한국은 아니지만) 무려 14개의 국가에서 1위가 가족이었습니다. 부모, 형제, 자녀와의 화목한 관계, 함께 지내는 즐거움, 자녀의 성취를 보는 기쁨, 자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 등등 가족에 대한 가치를 1순위로 뽑았습니다. 한국은 2위가 가족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족에 대한 가치는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돈이 최고라고 하는 시대에 있더라도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인류도 가족으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하와를 주심으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심판으로 출산의 고통이 생긴 것일뿐 출산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와가 죄를 지은 뒤에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벌은 출산할 때의 고통이지 출산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것이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원래 만드신 인류는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독자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창조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 언약 공동체,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나는 교회가 바로 가족이기도 합니다.
율법에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십계명부터 시작해서 가족에 대한 가르침들이 있으며, 신약에서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주의 훈계로 가르치라고 할 정도로 가족을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도 가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가족에 대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바로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교회라는 공동체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지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어도 혈통적으로는 모두가 야곱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교회는 민족조차 다른데, 어떻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론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데,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의도된 인간이 가족이라는 사실과 함께 가족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인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영원 전부터 예정하시면서 어떤 계획 속에 예정하셨는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어떤 최종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지으셨는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기 존재의 궁극적 의미인 그리스도를 향해서 예정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먼저 28절에서 바울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성령께서 신자들의 기도를 도우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신자를 위하여 선을 이루도록 작용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신 것은 그 이전에 이미 그분께서 인간을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29절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선택하시기 전에 먼저 인간을 예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이 앎은 단순히 그분의 지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가운데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예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의롭게 하시며 마지막에는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가운데서 인간에게 선한 것을 베푸시기 위하여 미리 보시고 준비하시며 선택하셨습니다. 미리 아신다는 것은 인간에게 좋은 것을 베푸시기 위하여 좋은 것들을 미리 보신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미리 준비하심으로써 모든 것이 그분께서 예정하신대로 이루어지도록 시간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을 분배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길 원하셨고, “영원으로부터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선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의 인간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의롭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시간과 역사 안에서 구체적인 현실이 됩니다.
29절부터 30절은 점짐적으로 예정의 실현을 향한 다양한 단계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단계들이 이어지는 것은 마치 웅장한 교향곡이 연주되는 것과 같은데, 이 단계의 정점은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재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각 단계들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 계획이 현실화되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우리에게 이 단계들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인간은 끊임없이 이 원천에로 돌아가야 하며 이 원천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 원천이란 다름 아닌 예정으로서, 이 예정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예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꼐서 인간을 향한 그분의 예정을 역사 가운데서 현실화하기 시작하는 행동이며 나아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예정을 역사화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예정의 구체적인 모습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29절에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계시지만, 인성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처럼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인간이 예정되고 이 예정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보장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인간 예정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성부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인간의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성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지니길 원하셨으므로 그리스도는 ‘수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시며 우리는 맏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 입양된 자녀가 됩니다. 바울이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들 속에서 항상 성도들을 향하여 그들의 하나님의 양자라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라고 한다면 그냥 개념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지만, 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주 실제적으로 우리가 맏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으로 양자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양자가 되도록 예정하시고, 이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도 이 목적을 향하여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으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형제로 결코 존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제가 아니고서는 28-30절에서 말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예정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형제로 인간들을 부르십니다.
이처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을 통해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왜 기독교가 기독교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수님이 절대적인 중심성을 보게 되며, 무엇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인간이 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가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과 그리스도를 떼어놓고서는 인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계획하신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족으로 지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로 지으시고, 그들이 아이를 낳고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만드신 것은 원래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시고, 우리의 맏형을 그리스도로 두시는 이 관계를 애초부터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있는 죄가 이 관계를 깨뜨리고, 이 관계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를 통해서 이 관계가 깨어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고, 그분은 자신의 계획을 결코 철회하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계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현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구원 예정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죄 가운데 놓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은 더할 나위 없는 그분의 성실하심이 드러나는 근거로서, 하나님은 죄 중에 있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며 그를 의롭게 만드십니다. 바로 인간의 죄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더 잘 보여주고 있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가족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것이 마침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이루어졌고, 구체적으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것은 31-35절이었지만, 20절부터 오늘 본문이 같은 맥락 속에 있기 때문에 20절부터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20-35절을 요약하자면, 누구의 집에 살 것인가 또는 누구의 가족이 될 것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가족은 두 개의 가족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여러분도 예상하고 계시듯이 하나님의 가족이며, 나머지 하나는 사탄의 가족입니다.
3장 20절부터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떤 집에 들어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집’에 들어가십니다. 이 집은 1장에 따라서 베드로의 집일 가능성이 크지만, 집에 들어가셨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부터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요. 이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집에까지 쫓아왔습니다. 그래서 식사할 여유조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식사하고자 한 자들은 앞의 문맥에 따라 예수님과 열두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고자 하셨지만, 쫓아온 무리들로인해 식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가 힘드셨습니다. 여기서 결과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 이들과 식사하고자 하셨다는 의도는 굉장히 중요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집에 있지만 식사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미 ‘가족’ 공동체가 되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함께 식사한다는 것.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가족이 하는 친교 행위입니다. 현대 도시 중심의 핵가족 사회의 집과는 달리 공동체 중심이었던 1세기의 지중해 세계에서 ‘집’이라는 것은 삼대로 구성된 직계가족과 친척, 그리고 종들까지 포함하는 대가족 개념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자 영역이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한 개인의 정체성은 그가 속한 ‘집’이 어디냐에 따라서 달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집’에서 식사 공동체로 지내고 있었다는 기록은 제자들이 알았든 몰랐든 이미 새로운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문제점과 함께 대조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진짜 혈통적 가족과의 대조적인 모습으로 말입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의 친족들이 어디에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친족들이 들은 소문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붙든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원어로는 어디에 가지 못하게 묶어놓는다는 뉘앙스입니다. 다시 말해 친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니 예수님이 아무 짓도 못하게 묶어두려고 온 것입니다. 묶어두려고 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족들마저도 이 소문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친족마저도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말씀을 가진 유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22-30절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이라고 폄하하며 모독합니다. 22절부터 보시면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 다른 말로는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폄하합니다. “바알세불”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상이고, 주로 성경에서는 마귀나 사탄을 대신해서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바알세불이라는 단어를 좀 더 면밀하게 살피면 아주 풍성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바알’이라는 단어는 주로 가나안 신을 가리키지만, 일반 명사로 사용될 때는 아버지 또는 ‘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불’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거처’ 혹은 ‘처소’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바알세불’이라는 것은 ‘집 주인’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0:25 에서 예수님께서 ‘바알세불’을 ‘집 주인’으로 풀이하셨을 때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신 것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리고 두 번째로 “바알세불”은 아까 말했듯이 사탄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집 주인’과 ‘사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바알세불이 예수님에게 사용될 때 ‘집 주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는 예수님의 축귀가 바알세불이 들렸기 때문이 아니라 27절에서 말하듯이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먼저 강한 자를 묶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예수님의 의도도 담겨있으며, 사탄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는 23절에서 예수님께서 반박하고 계시듯이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몰아낼 수 있겠소?”라고 응답하고 계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면서 그가 귀신들의 집 주인, 곧 사탄에게 불들려 축귀를 한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족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그를 묶어두려고 하였고, 서기관들은 한발 더 나아가 그가 “사탄에게 묶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마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지역적 경계를 넘어 압도적으로 많아짐에 따라 그에 대한 오해와 비난 역시 확산되고 있었는데, 그런 오해와 비난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을 비롯해서 특히 예수님의 친족과 유대 사회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있던 서기관들에게까지 퍼지기 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친족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 빠져있다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옛 시대에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유대 종말론에 따르면 현 시대는 악이 다스리지만 다가오는 시대는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의 우두머리에 힘입어 그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다”는 말은 세상은 악이 창궐하고 있는 세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이들의 시대적 이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 즉 메시아가 아니라 악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변호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능력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바로 비유는 “집” 혹은 “강한 자의 집”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은 방금 말한대로 예수님이 서기관들로부터 바알세불, 곧 귀신들의 집 주인에게 사로잡혀 축귀를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아주 논리적으로 만일 귀신의 우두머리의 권세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사탄의 나라가 분열되어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사탄의 권세에 붙들려 있다면 자기 집과 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을 왜 하겠는가’라고 오히려 반박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13-19절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열두 제자를 세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27절에서 그분이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는지 친히 알려주십니다. 바로 예쑤님이 이미 “강한 자” 곧 사탄을 묶어두었기 때문에 그 하수인인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귀는 결박당한 사탄은 비록 완전히 패망하진 않았지만 그 힘이 급격하게 약화되어 그 나라가 더 이상 설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사탄을 결정적으로 묶어두셨을까요? 그때는 바로 예수님 자신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이기셨을 때입니다.
마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전체 흐름을 두고 본다면 예수님의 이 비유에는 아주 강력한 역설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한 자를 먼저 묶어 놓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한 예수님은 결국 대제사장에 의해 묶이셔서 빌라도에게 넘겨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의해 도래하게 된 하나님 나라는 이런 ‘묶임’에 의해서 “끝장”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마가는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사탄의 집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있는 아들이심을 아주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더 나아가 이 서기관들을 향하여 아주 날카로운 말을 이어서 하십니다. 28-29절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는 용서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의 뜻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을 향하여 바알세불이라고 폄하하는 서기관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며, 이 서기관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사람들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바알세불이라고 비난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서기관들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이 서기관들이 사탄의 집에서 사는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히려 예수님은 누가 하나님의 집에 있는 사람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먼저 마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친족들과 자신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 안에 있는 제자들과의 공간적인 차이를 이야기해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집 안에 있지만, 31, 32절에서 마가는 예수님의 혈통적 가족들, 친족들이 집 밖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안과 밖은 집을 기준으로 한 공간적 구분이지만 마가는 이 공간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장치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밖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누이들이 찾는다고 함께 있던 무리들이 이야기해주자 예수님은 아주 충격적이게도 33절에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자신의 혈통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서 알아본 것처럼 그런 뜻이 아니라 누가 과연 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 새로운 가족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35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나의”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마가는 1장 1절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어떤 예수님인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바로 마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록한 이 마가복음을 시작하면서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적인 가족관계, 즉 혈통이나 친족이라는 가족관계에 매이는 분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3장은 전통적이고 인습적인 관계에 예수님을 묶어 둘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분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은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맏아들이 되어 우리를 모두 양자 삼으셔서 인간을 새로운 가족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마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가족은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며 또 어떻게 준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정통적인 율법 학자들에 의해 해석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맏아들로서 오신 예수님에 의해 결정되고 드러나는 것임을 마가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2장에서 예수님이 성도 제도와 상관 없이 누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시는 분으로, 그분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시며 안식일에 관한 하나님의 원래 뜻을 알려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맥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시며 새 시대, 새 가족 공동체를 가져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그러므로 자신을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길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집 밖에 서 있는 혈통적인 가족 역시 새로운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 조건은 예수님을 묶어두고 붙잡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정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두는 아버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집 또는 가족이 아니면 인간이 속할 수 있는 가족은 사탄의 집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서기관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집 안에서는 진정으로 서로를 향해 형제라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원래 어원은 고발하는 자라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탄의 집은 서로를 고발하고, 비방하며, 헐뜯고, 폄하하며, 혐오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사랑의 극대화가 되는 곳이 바로 사탄의 집입니다. 그곳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있지만 서로를 위하는 가족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가족입니다. 우리가 흔히 지옥을 불타는 곳이라고 떠올리지만, 이렇게 자기 사랑이 극대화가 된 곳을 상상해본다면 얼마나 끔찍한지 우리가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가족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가족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 가족으로 들어오게 만드시기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세우시고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 인간은 하나님의 가족에 머무르는 존재입니다. 성경적 인간됨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참된 인간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하나님께서 영원에서부터 예정하신 것에 따라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살아가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이 교회가 얼마나 복된 곳인지를 우리 모두가 누리며, 아직 이 가족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이 부러워하며 맛보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두는 우리야 말로 진정으로 서로를 향하여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복을 누리시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