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전쟁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9 views
Notes
Transcript

루스드라 사건

세계관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세계관이란?
세계관이란 단어를 접할 때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철학, 신학, 인문학 등 어떤 한 학문을 오래 연구한 전문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관은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결코 어려운 개념이 아닙니다.
총신대학원에서 변증학을 가르치셨던 최재호 교수님은 세계관을 아주 쉽고 명쾌하게 정의합니다. “세계관이란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냥 아무 과정 없이 하는 것 같지만요. 상황을 보고, 주위의 소리들을 듣구요. 해석하고 판단하는 생각의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됩니다. 이게 세계관이라는거에요. 세계관은 생활의 아주 작고 사소한 영역속에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 행동도 자기만의 세계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떤 메뉴를 시킬지 메뉴판을 보고 어떤 메뉴가 있는지 정보를 봅니다. 그리고 예전에 ‘아 누가 여기 식당에는 이 메뉴가 맛있다고 했었는데’ 들었던 경험을 토대로 혹은 식당에 같이 간 사람들이 이 음식이 잘나간다더라 현장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생각을 되죠. 이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식당에서 먹을 메뉴를 주문합니다. 식당에서 메뉴 하나 고르는 것도 보고 듣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나름대로 일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나만의 틀이 나만의 세계관이 존재합니다.
세계관은 마치 안경과 같습니다. 어떤 색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 동일한 사람, 동일한 현상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반응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세계관의 안경에 따라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도토리를 보고 초등학생인 어린아이는 동화책속에 다람쥐의 귀여운 먹이를 떠올립니다. 시골에서 자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은요. 저 도토리를 주워다가 도토리묵을 해먹으면 맛있겠다 하며 입맛을 다집니다.
어르신과 초등학생이 본 것은 똑같은 도토리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본게 아니죠. 그런데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세계관이 다르면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되죠.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루스드라 사건은 이 세계관의 충돌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강력한 핍박을 피해 루스드라로 옮겨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7절은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과 바나바의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현장에는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평생 걸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중에 그 걷지 못하는 자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10절과 같이 선포합니다.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만약에 이 사람이 절망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는 바울의 이 명령을 조롱이나 헛된 희망으로 치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절망의 세계관은 복음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믿음의 틀, 세계관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순종했고,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가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죠. 한 영혼이 복음의 세계관을 통해 절망에서 구원으로 옮겨지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근데 전쟁은 여기서 부터 시작됩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루스드라의 무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자신들의 방언이 툭하고 튀어나오는거죠. 소아시아 중앙에 위치한 루스드라는 로마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당시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루스드라 원주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사용했던 루가오니아의 말을 사용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들의 말이 툭하고 튀어나오게 된거죠. 오매~ 아따~ 으미~ 이런 느낌이었겠죠. 자기들의 방언으로 이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그들의 무의식, 그들의 본래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다함께 11절,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왜 하필 제우스와 헤르메스였을까요? 루스드라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화가 있었습니다. 변신 이야기로 유명한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최고신 제우스와 그의 전령인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을 방문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박대했지만 오직 가난한 노부부만이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여 큰 복을 받았다는 전설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이 신화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그들의 ‘기본값’ 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의 기적을 보자마자, 자신들의 세계관이라는 서랍장에서 가장 익숙한 파일을 꺼내 이 사건에 끼워 맞춘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속신앙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이 눈 앞에 놀라운 광경을 보고 천지신명님. 조상님하고 외치는 것과 비슷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익숙한 신을 모셔와 13절과 같은 행동을 이어서 합니다. 13절 제가 읽겠습니다.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신격화 시켜 제사장들을 대동해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기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복음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무리의 사람들은 똑같은 기적을 통해 자신들의 오랜 전설이 실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세계관의 전쟁입니다. 똑같은 현장, 똑같은 사건 앞에서 복음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본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구원의 길로 가지만, 신화와 세속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본 사람은 헛된 우상을 만들어내고 멸망의 길로 달려갑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자기들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 기괴하고 끔찍한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복음이 왜곡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도둑질 당하는 순간,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좋은게 좋은거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그냥 두자고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계관의 전쟁터 한복판으로 용감하게 뛰어듭니다.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세계관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겁니다.
우리는 복음을 아는 자로서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복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올바른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우리의 본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본분을 다하기 위해 굉장히 단호한 태도로 상황에 개입합니다.
우리가 비성경적인 세계관에 사로 잡힌 이 세상속에 어떻게 복음을 지켜나아갈지 14절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4절의 행동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했으면 합니다. 첫번째는 옷을 찢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우리는 옷을 찢는 영적 애통함을 회복해야합니다. 성경에서 옷을 찢는다는 것은 주로 극한의 슬픔, 분노, 자기 부인 등을 나타내는 관습적인 행동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얼마나 이 상황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창조주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피조물인 자신들이 가로채는 끔찍한 광경앞에서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고통과 분노를 느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이 교회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온갖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진리인 양 행세하는 것을 보며 우리의 마음도 찢어집니까? 아니면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지 하며 무감각하게 방관하고 있습니까? 세계관 전쟁의 첫 걸음은 진리가 훼손되는 현실 앞에서 거룩한 슬픔 영적 애통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전지대에만 서서 복음을 이야기 한것이 아니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흥분하여 제사를 준비하는 광적인 무리들 한가운데로 자신들의 몸을 던졌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잘못하면 성난 무리들에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우리에게 안전한 지대는 어디일까요? 아마도 교회 공동체일겁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잘못된 세계관에 사로 잡혀 돈을 제우스처럼, 성공을 헤르메스처럼 숭배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세계관을 바로 잡을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교회라는 안전지대를 넘어 세상의 한복판으로 용기있게 뛰어들어가시길 축복합니다. 한복판이라는 것은 핵심적인 공간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 그냥 장소 가리지 않고 아무때나 잔소리 퍼붓고 휘집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부산대에서 있었던 사건인데요. 학교측에서 심어놓은 장승을 기독교 동아리의 멤버가 그 장을 뽑아서 훼손시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동아리에서 영구 제명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진짜 삶의 중심가운데 무엇을 필요로 하며 무엇에 목말라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실 수 있는지를 그들의 상황에 맞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맞춰주셨습니다. 우리가 애기를 볼 때 옹알이를 하면 같이 맞춰서 옹알이를 해주면서 소통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범주안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맞춰주고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게 그들의 중심부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전략이 되어야겠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는요. 침묵을 깨고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포하세요. 헛된 이데올로기나 신화나 미신등을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영혼이 살 수 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포가 없으면 사람들은 우상의 세계관속에 갇혀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삶의 모든 것을 우상과 세상적인 방식대로 해석해내는 것이죠. 이 세계관을 하나님을 기초로 다시 세울 수 있도록 소리를 내야 합니다.
오늘 15절에서 18절의 말씀이 그것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15절부터 18절까지 말씀을 교독으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부터 읽겠습니다. 시작.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이들에게 천지와 바다와 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선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의 질서를 다스리셔서 비를 내리시고, 결실을 맺게 하시는 선한 일을 하사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의 기쁨과 마음의 만족을 주시는 분이라고 설교합니다. 실체가 없는 세계관속에 있던 자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위해 제사를 드렸었는데 이제는 그 제사를 멈추게 됩니다.
마지막 18절 말씀입니다.
다함께 말씀을 읽겠습니다. 시작.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8절의 결과는 놀랍습니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겨우라는 단어에 주목해봅시다. 한번 굳어진 세계관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필사적인 외침이 없었다면 루스드라의 복음전도는 끔찍한 우상숭배 축제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과 바나바 뿐만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치열한 세계관의 전쟁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른 세계관을 주입시키려 합니다. 돈이 최고다. 성공해야 한다. 너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다. 이런 세속적인 신화들이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문화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눈과 귀와 생각을 파고 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나는 지금 어떤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내 삶의 기적과 일상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성공 신화가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이 애통한 상황을 보며 마음의 옷을 찢는 영적 애통함이 내게 있습니까? 교회라는 안전지대 너머에 있는 잘못된 세계관에 사로 잡힌 친구 동료 가족에게로 뛰어갈 용기가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들 가운데 침묵하지 않고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쁨과 만족이십니다 라고 외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계관의 전쟁속에 주님의 군사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이런 고백을 교회울타리 안에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의 이름을 외치는 모든 부영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회-
기도제목1
오늘 들은 말씀을 기억하며 개인을 위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인 세계관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게 하소서.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안목과 정욕을 근간으로 세속적인 세계관으로 살아갔습니다. 주님 썩어질 것에 눈과 귀와 마음이 빼앗겼던 지난 날들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타락한 관점을 회복시켜 주소서.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틀이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대한 세계관으로부터 넉넉하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여 한 번 부르짖고 기도하며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제목2
선교를 나간 지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제목3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주일에 드려질 예배를 위해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