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사람, 기도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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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19-20절
서론
기 도는 늘 합니다. 주님, 건강 주시고...
흥 청망청 쓴 카드값도 좀 어ᄄᅠᇂ게 해주시고요...
제 사보다 예배가 낫다 하셨으니
일 용할 양식도 넉넉히 부탁드리고요
교 회 안 빠지고 다닐 테니 이번 달 가스비도..
회 계는 제가 하고, 회개는 주님께 맡깁니다.
사무엘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사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이라는 단서를 통해 사사기와 사무엘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는 두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1-16장까지 범죄-진노-압제-부르짖음-구원-재범죄 라는 사이클이고 다른 하나는 17-21장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두 주제에 큰 하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16장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적어도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이 있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사사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7-21장의 내용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릴 적 합기도에서 낙법 대회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다 떨어지고 최종 4인까지 들었습니다. 나보다 먼저 1명만 더 떨어지면 최소 동메달은 따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차례였습니다. “이거 하나만 더 넘고 다른 사람이 걸리면 나는 메달을 딴다.”라는 마음올 힘차게 달려가 점프했습니다. 그 순간 뚝 다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인대를 많이 다쳐본 경험이 있기에 인대가 늘어났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부님은 제가 다쳤는지도 모른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뛸 수 있지?” 그때 더 적극적으로 아프다고 표현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인대가 늘어난 상태로 한 번 더 뛰었습니다. 그리고 인대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인대는 힘줄의 역할을 합니다. 당연히 그 힘줄이 끊어졌으니 무릎이 움직일 수가 없죠. 그래서 수술을 했습니다. 이때 미세한 신경들이 끊어졌고 지금도 그 감각이 둔하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에 속한 사람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니 인정을 안 하죠. 정말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 보신 경험들 다 있으실 겁니다. 처음에는 사방이 어둡지만 시간이 지나가 보십시오. 주변 사물이 인지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움직이고 활동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집니다. 살 만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에 속한 사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게 아니라 이미 어둠에 있는 자, 어둠에 속한 자인 것이죠.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오랜 시간 어둠에서, 죄로 인해 심각하게 물들어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영적 자가 진단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이 있는가, 없는가’입니다. 사사기 초반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정도 영적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후반부로 갈수록, 즉 시간이 흐를수록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렸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부르짖음도 없으니 하나님의 도우심도 없지요.
오늘 여러분들 스스로 영적 진단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이 있는 살아 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사사기 후반부에 나오는 부르짖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까? 기도하옵기는 기도하지 않았던 자는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도하는 자로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소망하고, 또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한나의 모습을 통해 기도에 대해 다시 들여다보고 나에게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본론 – 2.1 문제는 곧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다.
구소련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철도국에서 일하는 한 직원이 화차의 냉장고 속으로 들어간 후, 그만 실수로 밖의 문이 잠겨 그 화차의 냉장고 안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화차의 냉장고는 고장이 나 있었습니다. 기계가 작동이 되지 않아 공기도 충분했고, 온도도 섭씨 13도의 인간이 지내기에 알맞은 온도였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다른 직원이 냉장고 화차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죽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는데 왜 죽었을까? 사람들은 그 사람이 고장 난 냉장고 벽에 남긴 글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더랍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점점 몸이 차가와진다 나는 점차 몸이 얼어 옴을 느낀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일는지 모른다.” 자포자기가 자신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 중국에는 ‘바이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본래 농구 경기에서 심각하게 지고 있는 팀이나 선수들이 불가피한 패배 앞에서 노력을 포기해버리는 것을 표현한 용어입니다. 이것이 중국 사회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달성할 수 없는 사회적 기대와의 싸움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중국 청년들이 불가능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에너지를 쏟느니 더 높은 곳을 향한 노력이나 어떠한 성취도 본질적으로 포기하는 자포자기를 결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삼포족(연애, 결혼, 출산 포기)이나 오포족(취업, 결혼, 연애, 출산, 내 집 마련 포기)와 똑같습니다. 이것이 비단 젊은층만의 이야기입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염려는 포기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한나 역시 자신의 불임 문제를 가지고 자포자기 하고 있었습니다(8절).
가장 힘들 때 사기꾼이 등장한다고, 이때 우리가 경계해야 합니다.. 바로 자신의 결핍을 대체할 만한 것이 나를 유혹한다는 것이죠. 엘가나는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데 나로 만족하지 못하겠냐는 서운함을 표시합니다. 한나의 입장에서는 엘가나의 사랑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대체와 같습니다. 자녀는 없어도 남편이 잘해주니까, 나의 자녀가 교회는 안 나오지만 사회적으로는 알아주니까, 우리 자녀는 그래도 교회 다니고 구원은 받았으니까, 내가 원하는 꿈은 못 이루어도 나 먹고 살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자기 합리화와 같은 대체하려는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이 사기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8장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묻죠.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한나의 불임은 누구의 죄도 아닙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가진 삼포나 오포, 여러분들이 가진 고민과 염려는 누구의 죄도 아닙니다. 사회를, 누구를 탓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에 고통받는 이유는 그 이유를 잘 몰라서 일 때가 많습니다. 이유를 알면 이해도 되고 참 좋을 텐데, 그것을 알 수 없기에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한나처럼 자포자기 하고 주저앉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 일은 하나님의 역사, 간증이 되는 일입니다.
2.2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한다.
이제 한나는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응답이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기도는 인내이고 끈질김입니다. ”나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있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스스로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정말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하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기도하는 행위가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에서 나는 기도를 계속 하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계속 기도한다는 말은 연속성의 의미가 아닙니다. 정말 나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로만 향하고 있냐는 뜻입니다.
빌립보서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한국 교회 성도님들의 손꼽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 앞에 말씀들을 살펴보아야만 이 구절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비천에, 풍부에, 배고픔, 풍부, 궁핍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는데 그 비결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을 주시냐면, 6절과 7절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궁극적 이유가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면서도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염려와 근심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기도하다가도 못 견디고 뛰쳐나가서 내가 방법을 알아보고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왜? 마음과 생각이 평안하지 못하니까 기도할 때만 평안이고, 다시 현실로 나가면 또 근심, 걱정, 염려가 나를 엄습하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의 사람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그때 아브라함은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도착해 세겜에 이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땅에 기근이 들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심했던지 기근이 들었다는 그 구절 맨 앞과 맨 뒤로 기근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아브람은 그 기근을 못 버티고 이집트로 간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살 길 찾아나선 것이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싶은 자는 시편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시편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한국 사람들은 빨리 빨리 문화가 되어서 가만히 있지를 못 합니다. 비행기에서나 버스에서나 가만히 있지를 모르고 펄떡펄떡 일어나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히 5:7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서 능히 건지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건은 통곡과 눈물을 흘려서 경건이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에서 능히 건지실 이만 가만히 바라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근심에서, 염려에서 건져주실 이가 누구입니까? 정말 하나님만을 믿고 계십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문제의 해결자로 나서지만 기도의 사람은 가만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가면서 말이죠.
2.3 하나님의 응답은 사람 뒤에 온다.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기도합니다(12절).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이 한나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시점입니다. 18절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더라“ 하고 19절, 20절입니다. 한나의 기도 응답은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시작하던 때가 아니고,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기도할 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더 이상 한나가 그 문제를 가지고 근심하지 않을 때, 염려하지 않을 때 더 이상 그 문제에 영향을 받고 지배를 받지 않은 그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는 ‘응답’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 쉬운 일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일이 무엇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말 한마디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진짜 보고 싶었던 것, 하나님께서 진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한나가 더 이상 자신의 불임 문제, 그 결핍의 문제에서 종노릇 하지 않고 완전한 해방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을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더 이상 죄의 노예, 죄에 종노릇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다시 그 지배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의 기대는 응답이 아닙니다. 사람의 성장입니다. 믿음의 수준을 높이고서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으로 응답이 없습니까? 내가 그만한 믿음의 그릇이 안 돼서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환경을 바꿔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과 환경을 바꾸는 것은 사람의 성장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상황이, 환경이 악화 되면 또 기도의 자리를 벗어나고 기도의 자리에서 박차고 나가고 자신이 해결자로 나서는데 상황과 환경을 바꾼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바뀌어야죠. 사람이 성장해야지요. 창세기 4:7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더 이상 그 문제가 문제 되지 않아야지요. 하나님께서는 그걸 기대하고 보고싶으신 겁니다.
3. 결론
말씀을 준비하면서 들여다보니까 제 신앙 생활도 그랬습니다. 19살 크리스마스에 처음 교회에 나와 20살부터 기도를 하기 시작하더니 1. 2시간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도 그 영적 갈증,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에 세 시간을 기도했습니다. 새벽을 깨워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출근하고 다녀와서 전도하고 또 기도하고 잠자고 이런 일상이 반복이었습니다. 주변 형들이 물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교회에 나온 지 일 년도 안 된 초신자가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냐며 놀라면서 묻습니다. 처음에는 어디로 알바를 가야할까 작은 기도 제목부터 시작해서 이제 군대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기도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제게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주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캄보디아 단기 선교를 가야 하는데 한 두 달 전부터 제게 그런 확신이 생깁니다. 아 이 기간에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일주일을 지내고 이제 한국 비행기를 타기 직전 대절한 버스 안에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군대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목회를 하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인도자가 한 번 더 기도하자는 멘트에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 주시는 마음이 이 마음인데 이거 맞습니까?“ 목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제 군대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는 사실을 잘 알던 교회 형들에게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쁜 나머지 그것을 알리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말하지 말라는 겁닏자. 저는 꽤 오랫동안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만약 거기다가 얘기를 했으면 형들이 의심을 하는 모습과 대답을 듣고 내가 하나님의 응답을 의심하기 시작할까봐.
군대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도했는데 목회를 하라고 했다. 다른 사함이 들으면 동문서답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선교 기간에 하룻밤 신학생 형과 자면서 문득 그 형에게 질문했던 그 말이 떠올랐습니다. ”형 목회하는 사람들은 꼭 군대를 가야 하나요?“ ”별일이 아니라면 가는 게 맞지 한국 정서, 사회를 고려하면.“ 하나님의 응답은 동문서답이 아니었습니다. 가정 다 맡기고 군대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지기 전.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놔요. 정말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종노릇 하지 않고 자유와 해방 할 수 있도록 사람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응답을 주십니다.
사탄은 그렇게 우리에게 유혹합니다.
1.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 뭐가 되냐? 나가서 일을 해야지.
2.정신 없이 '바쁜데 한가하게' 기도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3.새벽기도에 나가면 '하루종일 졸려서' 헤롱헤롱 할거야. 전에도 그랬잖아.
4.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한 지 5분이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5.기도? 해야지.. 해야 하고 말고... 기도는 해야돼...나도 '언젠가는' 하겠지.
내일부터 하반기를 위한 특심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도하길 원하시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 문제에 자유 할 때 응답하십니다. 기도를 멈추셨다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하신다면 온전히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로 고정하십시오. 그렇다면 머지않아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질 것입니다. 특심 가운데 승리하시는 저희들 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