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잇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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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8:1-12
1.배경
오늘 말씀의 배경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일부터 시작됩니다. 이 앉은뱅이는 날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향해 구걸을 했으니 그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름은 몰라도 미문 앞에 있는 앉은뱅이라고 하면 다 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앉은뱅이가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뛰어 서서 걸으며, 그 두 사람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걷기 시작한 앉은뱅이가 잠잠했겠습니까? 얼굴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치고, 목소리에는 생기가 가득하고, 행동도 큼직큼직했을 것입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망이 없는 슬픈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구걸하던 그 앉은뱅이가 걸어서 성전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졌겠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면서 그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켰다고 믿으며 두 사람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요약하자면 3장 16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리라” 베드로가 고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이 앉은뱅이가 완전히 낫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예수’ 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이미 몇 주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를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들도 다 흩어졌고, 그의 가르침도 다 허상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백성들에게 예수라는 인물은 서서히 잊혀져가는 존재였을지 모릅니다. 건축자들이 무언가를 만들려다가 버린 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베드로의 증언과 눈앞에 버젓이 보이는 증거, 예수의 이름으로 난생 처음 걷게 된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경을 풀어가며 예수가 곧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되었던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베드로의 설교는 죽어있던 영혼들을 깨우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향한 목마름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가 쓸모없어진 돌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라는 돌이 내 삶을 지탱하는 기초석이라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예수님은 어떤 돌입니까? 오늘 하루만 점검해보십시오. 나의 지식과, 나의 감정과 나의 의지에 있어서 예수님이 자리한 곳이 있었습니까? 쏟아지는 많은 정보와 뉴스들, 세상이 정한 기준 사이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슬프고 화나고 미움이 싹트는 그 순간에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예수님이 계신 곳을 택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는 사역의 현장에는 예수님이 계십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각할 틈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침에 눈을 뜨면 핸드폰부터 켭니다. 차를 타고가다가도 빨간불에 또 핸드폰을 봅니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기 싫어합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릴 때부터 자격증을 따고, 학원차를 타고 하루를 시작한 아이가, 학원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릴 때부터 너무 바빠서 하늘을 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어쩌면 예수님은 내 삶을 지탱하는 기초석이 아니라, 건축자가 버린 돌처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주일에 한 번 구경하고 돌아오는 유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2.사두개인들
오늘 우리가 읽은 4장 본문을 보면, 앉은뱅이가 낫게 된 일로, 백성들에게 설교를 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입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더 예민했습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보수적인 바리새인들과 대비되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존재와 부활에 관하여 믿었다면 사두개인들은 영도 없고 천사도 없고 부활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전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곱게 들릴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의 이 설교를 싫어한 결정적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백성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명예와 권력, 부를 빼앗기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습니다.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심문을 해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면 이단으로 정죄해서 제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날이 이미 저물어 바로 심문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천사나 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더 이상 대화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도덕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한 일은 오히려 칭찬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걷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두개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을 가두어버립니다. 자신들의 명분을 앞세워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그 사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간 완성되어질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모델 하우스와 같은 이 땅의 현실과 부딪히며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돈은 필요합니다. 양식도 있어야 하고, 입을 옷도 있어야 하고, 잠을 잘 수 있는 집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방인들은 무너질 세상을 건설하는 건축가들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더 올라가기만 하지만 바벨탑이 무너졌던 것처럼 세상은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의 길을 걷는 사람들로 인해서 말입니다.
3.집 모퉁이의 머릿돌
베드로와 요한이 갇히고 이틀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최고 법정 기구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그의 가족들도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가 죽어서 이제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사도들의 이적과 설교로 인해 다시 불씨가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뭔가 심상치 않다. 라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사도들을 겁박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거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 때처럼 하나님을 모욕하면 반역죄로 처형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그 분위기를 모르겠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자가, 공의회원들의 그 무게감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8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와 함께 하시며, 그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그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지경이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예수님의 공생애기간 동안 들었던 말씀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다 읽지는 못했지만 성령을 받은 후 시작된 베드로의 설교는 구약성경을 근거로, 선지자들이 말한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변증합니다. 그리고 오늘 살폈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도 확신에 찬 어조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말씀에 근거한 믿음에 확신이 있으니 자신을 겁박하려고 하는 자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 대항하여 담대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을 지탱하는 기초석이 되는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모습니다. 성경과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믿음과 하나 되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자신 있게 예수가 누구이신지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좀 믿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합니다. 베드로는 시편 118편22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가리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가치 없는 돌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을 여는 첫 출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집을 짓기 위한 모퉁이돌이 세워졌다면, 그 모퉁이돌이 기준이 되어 이제 서로 연결되어지며 옆으로 넓어지고, 위로는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완성을 꿈꾸며 살아가는 자들이라면, 우리 각 자의 삶의 기초석이 모퉁이돌 되시는 예수님과 꼭 같아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넘치는 것은 깎아내고, 부족한 것은 채워가면서 모퉁이돌과 같은 모양을 갖추어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예수 때문에 살아가고, 예수 때문에 찬양하고, 예수 때문에 완전하고, 예수 때문에 사함 받고, 예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 때문에 의롭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풍성함은 아마 말로다 형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까요? 베드로 자신이 예수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이름을 듣고, 믿은 앉은뱅이 역시 예수 때문에 일어나 걷기 시작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매일이 이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상관없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아니라, 모퉁이돌 되시는 예수님께서 내 삶의 기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그 이름의 능력을 힘입어 담대함으로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예수 때문에 고난이 와도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우리 태화교회 성도님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