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은혜에 의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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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설교 시작
📖 설교 시작
건강한 교회의 가치, 오늘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너무나 방대한 주제이긴 하지만, 건강한 교회와 관련해 생각했을 때, 사랑을 빼놓고 교회를 말할 수는 없겠죠. / 그만큼 건강한 교회에 있어서 사랑은 핵심적인 가치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계명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내 기준과 필요에 따른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일 수 밖에 없습니다. / 따라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웃으로 흘러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죠. / 교회를 향한 사랑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 우리의 결단과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사랑을 아낌없이 흘려보낸 인물이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삭개오입니다.
키 작은 삭개오는 뭔가 귀여운 이미지가 있죠. 그래서, 주일학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귀엽게만은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 오늘 본문 2절은 말합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성경은 삭개오를 세리장이고 부자라고 말합니다. / 당시 로마 제국은 자신들의 식민지로부터 무리하게 세금을 징수했는데, 그 세금을 걷기 위해 고용한 자들이 바로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로마 정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청구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챙겼습니다. / 동족을 등쳐먹는 파렴치한 자들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일제의 앞잡이들을 혐오했듯이 유대인들도요. 세리들을 경멸했습니다. / 그런데, 삭개오는 무려 그 세리 중에서도 세리들을 관리하는 세리장이었습니다. / 사람들이 정말 싫어하고 경멸했겠죠.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이야기는 모두가 미워하고 혐오하는 삭개오가 구원을 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 구원과는 가장 상관없어 보이고, 멀어 보이는 자가 구원을 받은 것이죠.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진 은혜의 구원은 삭개오를 변화시켰고, 삭개오로 하여금 넘치는 사랑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공동체인 건강한 교회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우리 삶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어야 하는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세 가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1. 나무 위로 올라가라
1. 나무 위로 올라가라
첫번째 나무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구원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교만과 자존심입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 만약 오늘날 거리에서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지역의 시장이 그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 아마 주위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비웃었을 겁니다.
오늘 우리 문화에서도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품위있는 일이 아니죠. / 그런데, 그 사람이 세리장에다가 모두가 아는 부자인 겁니다. / 우리가 아는 부자들은 절대 그런 행동을 안합니다. / 그런데, 삭개오는 사회적 지위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한 겁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건 코 흘리는 애들이나 하는 짓이지, 다 큰 어른이 할 짓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갔다라는 것은 그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 군중들의 비웃음과 시선을 각오하고 올라간 것입니다. / 자신의 교만과 자존심을 모두 다 내려놓은 것이죠.
따라서 삭개오 이야기는 나무에 올라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삶 가운데 구원이 역사할 수 없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우습게 보이는 것을 각오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C.S. 루이스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이 저지른 실수는 우리가 자라면서 더 이상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여러분,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매년마다 우리 교회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축제인 우리들세상을 하는데, 여러분, 대부분이 자원봉사로 섬겼을 것입니다. / 그때 아이들을 보면서 어땠습니까? / 진짜 “우리들세상”인양 즐겁고 천진난만하게 놀죠.
제 딸이 5살도 안되서 난생 처음 롯데월드에 갔었는데요. / 그때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 진짜 모험과 신비가 가득찬 나라에 온 것처럼, 깜짝 놀란 경이로운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면서 한참을 걸어다니더라고요.
여러분,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혀주면 어떻습니까? / 기억을 더듬어서 여러분이 아이었을 때, 부모님이 동화를 읽어주었을 때 어땠나요? / 그 이야기에 완전히 푹 빠져버리죠. 마음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찹니다.
왜 그렇죠? / 동화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세상 너머 어딘가에 신비로운 세계가 있다고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 선과 악이 존재하고, 서로 갈등하지만, 결국은 선이 승리한다는 동화의 이야기는 우리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푹 빠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어떠해지죠? / 제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니깐 그러더라고요. / “뽀로로는 애기들이나 보는거지. 이제 나 그런거 안 봐” / 우리 사회는 어른이 되면 유치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어떻게 됩니까? / 아는게 많아지고, 지식은 점점 늘어나지만, 오히려 상상력은 줄어들고 경이로움은 사라져 갑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단지 우연한 진화의 결과일 뿐이고, 죽으면 그냥 사라지는 존재다.” /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는 선과 악은 의미가 없습니다. /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사라지고, 그때그때 상황과 필요에 따라 판단하며 살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요? / 영적 존재인 천사와 마귀의 존재를 믿는다고요? / 우주의 왕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사망과 악의 권세를 이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라는 것을 믿는다고요?
이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어린아이입니다. / 세상은 여러분을 지적인 원시인이라고 비웃을 겁니다. / “그건 어린애들이나 믿는 이야기지. 지금 시대에 그런 걸 믿는다고? 넌 아직 철이 안 든 거야. 바보 같은 거야.” 세상은 나무에 올라가 있는 여러분을 비웃을 겁니다.
여러분 그래요. / 세상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른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적 신앙의 동화같은 이야기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철 좀 들어라. 우주에서 당신 혼자라는 혹독한 현실을 마주해라”
그렇다면, 기독교는 신화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오늘날 세상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그래요 / 어린아이처럼 낮아지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도,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어린애처럼 보이더라도, 교만과 자존심을 기꺼이 버리라는 겁니다. / 우습게 보일지라도 나무에 올라가라는 것이죠.
흥미럽게도 나무 위에는 역사상 많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 오늘 그 중 2명만 소개하겠습니다.
첫번째는 흑인 인권을 운동을 이끈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입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님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저는 인간이란 인생이라는 바다에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이고, 우리는 진화에 의해서 생겨난 우연한 존재이고, 선과 악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각자의 의견일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언젠가 인류는 전쟁과 폭력을 이겨내고 신의 제단 앞에 엎드려 승리의 왕관을 쓰게 될 것이며, 비폭력의 구원하는 선이 땅의 지배를 선언할 것이라고 여전히 저는 믿습니다.”
마틴루터킹 목사님은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세계가 있을 것이고, 사자와 양이 함께 눕는 세상, 해피엔딩으로 인류 역사가 막이 내릴 것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 선과 악이 분명히 존재하고, 결국에는 선이 승리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 마틴루터킹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노벨상 수상의 현장에서 기꺼이 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두번째는 나무 위에 있는 분은 이어령 교수님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 한국 사회 안에서 상징적인 석학이었습니다. / 하지만, 완고한 무신론자고, 기독교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 그의 나이 74세에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 그야말로 한국 지성계에 폭탄을 터뜨린 거죠. /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쓴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보게 되면 이어령 교수님은 말합니다. / “요즈음 나는 70평생 동안 한 번도 하지 않던 일들을 하고 삽니다. 세례를 받은 것이 그렇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이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면 망령이 났다고들 합니다. 요즘엔 그것을 점잖게 알츠하이머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심지어 어떤 친구는 "예수쟁이 됐다면서"라고 비웃습니다. 오랜 세월 글을 써왔지만 누구도 내 면전에다 대고 '글쟁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데 세례를 받자마자 나를 '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어령 교수님은 지금 무엇을 한 것입니까? / 수치를 무릎쓰고, 나무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한 때는 나무 위에 올라간 자들을 향해 비판하던 자였지만, 이제는 나무 위에 올라가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무릎을 꿇고,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 그리고 이어령 교수님, 이 두 분은 모두 세상 너머의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비웃음을 무릅쓰고 나무 위로 올라간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렸을 적에 동화를 읽거나, 그러한 영화를 봤을 때 어땠나요? / 여러분의 마음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올랐을 겁니다. / 그리고, 아마 그때만큼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 그 경이로움은 사라집니다. / 그리고 세상은 그럴듯한 이성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상상력과 믿음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다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요? / 그래서, 어른이 되면 동화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 너머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다른 세계의 영웅이 이 세상에 와서 희생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구출했다고 말하죠.
하지만, 이 이야기는 또 하나의 동화가 아닙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실제 역사이고 사실입니다. / 우리를 경이로움으로 다시 뜀 뛰게 만드는 모든 이야기 중에 이야기. 모든 근본이 되는 진짜 이야기죠.
그러기에 여러분, 어린아이같은 경이로움을 포기하지 마십시요. / 여러분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쫓아내지 마세요. / 계속해서 나무에 올라가십시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비웃을 것이고, 바보 같다고 말할 겁니다. / 하지만, 그 시선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하지 마세요. / 철든 어른이 되기 위해서 상상력과 호기심을 버려야 한다라는 말을 듣지 마세요. /
“내가 춤을 출 때 다 비웃겠지만, 그들도 주 알게 되면 함께 기뻐 춤을 추게 되리” 진짜 바보는 누구인지 결국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산과 바다를 보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고, /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복음을 믿으세요. 나무 위로 올라가세요. 경이로움으로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건강한 교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나무에 올라간 자들이 많은 교회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 처음에는 복음의 감격으로 나무에 올라갔지만, 시간이 흐르면 슬슬 내려오기 시작하죠. / 복음의 감격이 사라지고, 교회 생활에 익숙한 종교인으로 살아갑니다. /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새신자들이나 올라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은 복음으로 시작해서 무엇으로 끝나는 겁니까? / 나의 열심? 공로? 나의 헌신? 아닙니다. /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을 끝나는 겁니다. /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살아가야 하고, 은혜로 마쳐야 하는 것입니다. / 계속해서 나무에 올라가야 한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나의 열심과 나의 의로움으로 인해 은혜의 나무에서 내려오려고 하죠. / 몸이 무거워지는 겁니다.
마치 말년 병장이 군기가 빠져서
마치 영적으로 둔감하여 몸이 비대해진 엘리 제사장처럼 나는 자꾸만 은혜의 나무에서 내려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 각자의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대부분 다 아시겠지만,
그러다 보니깐 어떻게 됩니까? / 오늘 본문을 보면 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향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군중이 나오죠 / 다른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 그 군중들이 나일 수도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경우가 있는데요. // 세상에는 죄인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도덕적으로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교회 안에도 이러한 군중들이 있다는 것이죠. / 교회 역사를 살펴봐도 이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 우월감을 가지고,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죄인보듯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죠.
교회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위선과 모순이 있습니다. 그 군중들이 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비추는 자들의 불완전한 모습 때문에 진리까지 포기해서는 안되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에 영향받지 마시고, 삭개오가 했던 일을 하십시오. “예수님이 정말로 누구지 알고 싶다”라는 노력을 멈추지 마세요.
/ 여러분 저는 교회의 부흥은 나무에 올라가지 않는 자들이 나무에 올라가기 시작할 때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2. 군중을 이기라
2. 군중을 이기라
둘째, 군중을 극복해야 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이유가 군중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군중들이 어떠한 군중들입니까? 삭개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군중이죠.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우리의 교만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이기 싫어하고, 나무에 올라가고 싶지도, 자존심을 내려놓기 싫어합니다.
기독교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두번째 큰 이유는 이러한 독선적이면서 도덕적인 종교인들때문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세상에는 죄인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도덕적으로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뼈아픈 현실이지만,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교회 역사를 살펴봐도 이러한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우월감을 가지고,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죄인보듯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죠.
저는 많은 이들로부터 이 이유 때문에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어떻게 교회에 저런 사람이 있냐?’라는 것이죠. 기독교가 진리라면 그럴 수 없다라는 겁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을 정죄하는 군중에 가려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자, 삭개오가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가 예수님을 직접 봅니다.
물론 여러분, “사람 보지 말고, 하나님 바라보고 신앙생활하라” 말이 게으른 대답이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 불편한 말일 수 있지만,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자기 의에 둘러싸인 사람들을 지나쳐야 합니다. 그들로 인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교회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위선과 모순이 있습니다. 그 군중들이 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비추는 자들의 불완전한 모습 때문에 진리까지 포기해서는 안되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에 영향받지 마시고, 삭개오가 했던 일을 하십시오. “예수님이 정말로 누구지 알고 싶다”라는 노력을 멈추지 마세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특이한 점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우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는 단호하게 대하십니다.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얍잡아봤는데요.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시고 꾸짖으십니다.
반면에, 창녀들과 세리들과 죄인들, 오늘날 우리가 흘겨보고 손가락질 하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게 대하십니다. 삭개오를 보고 죄인이라 손가락질하는 군중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죠.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할께요) 유일하게 빡친 모습을 보인 곳이 어디냐면 성전 밖에 있는 죄인들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 있는 성경 교사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있는 장로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폭탄과 같은 말씀입니다. 복음은 단지 듣기 좋은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칼과 같죠.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보다 홍등가에 있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의와 도덕주의, 교만에 대해 단호하게 배격하셨습니다. 삭개오에게 죄인이라고 외치는 군중들에게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하셨을 겁니다.
왜 그러신 걸까요? 종교적인 도덕주의자들은 내가 충분히 선하고 훌륭하기 때문에 내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다“ 선하고 자격이 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직감적으로 가장 잘 빨리 이해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웃사이더들이죠. 죄인들과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싸들은요. 내가 너무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구원자가 필요없죠.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혜가 있을 필요가 없죠. 나의 의로움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이 도덕적 인싸들의 자기 의로움이 예수님을 못박게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에 예수님께로 나아가려고 했는데, 나를 정죄하고, 상처주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기독교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군중들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그 군중들이 아닐까, 나로 인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위선적인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라
3.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라
자, 첫 번째로 나무에 올라가야 하고, 두 번째로 군중을 피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예수님의 구원이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보고 먼저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은 내가 너의 집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집을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룻밤 정도 묵으시고 식사를 하러 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의 역사를 원한다면 이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점을 배워야 합니다. 크게 두가지인데요. 첫번째는 순서를 보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삭개오가 ‘예수님, 제가 더이상 사람을 속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니깐, 예수님께서 “내가 너의 집에 유하겠다”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닙니다. 삭개오는 회개조차 하지 않았어요.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은 말합니다. “삭개오. 죄인 주제에 예수님을 초대한다고? 먼저 네가 회개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초대 해.” 틀린 말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고 먼저 말씀하시죠. “내가 너의 집에 유하겠다”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내가 너에 집에 유하겠다라고 말씀하시니깐, 삭개오가 “주님 제가 저의 잘못된 삶을 바로 잡겠습니다”라고 고백하죠.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이 회개하면, 선하고 의롭게 살면, 너와 함께 살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라는 것이죠. “내가 너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너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함께 있기 원한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예수님의 식사 초대 앞에 삭개오는 어떠했습니까? 6절은 기록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했다”
돈 모으기에 급급한 자기 밖에 모르는 삭개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조건없이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삭개오의 마음 한켠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나 같은 놈을 안다고? 나 같은 놈의 집에 오신다고”
많은 이들로부터 멸시를 받아서 꽁꽁 닫아둔 삭개오의 마음에 은혜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구멍사이로 기쁨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죠.
더 애틋한게 무엇이냐면, 삭개오의 고백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그만두겠다라고 말할 때, 그 모습을 보십시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아까와서 어쩔수 없이 하는 말이 아니죠? 어떤 느낌입니까?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아버지, 이것 좀 보세요” 삭개오의 회개에는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먼저 자신을 찾아온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는 변하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 변화는요. 사랑의 결과입니다. 은혜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요.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번째, 알아야 할 것은요. 예수님의 은혜는 여러분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킨다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누군가에 집에 사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전적으로 함께 하고 싶다는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으로 소문난 삭개오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지만, 집에서 식사하는 것은 가족 중심에서 일어나는 친밀한 행위조. 이 당시 티비도 전기도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끼리 식사를 하면 그 자리에서 함께 먹고, 떠들고, 대화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는 것은 친밀감을 넘어서 가족들끼리만 누리는 일상적인 삶 속까지 그 사람을 초대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나의 구원을 바란다면, 일요일에만 나를 만나지 말아라. 나는 너의 일상적인 삶 깊숙히까지 들어가, 너와 함께 하고 싶다. 네 삶 구석구석까지 내 은혜와 사랑의 흘러들어가기를 원한다”
삭개오를 변화시킨 것은 죄인에게 베풀어주시는 이 은혜와 사랑때문입니다. 그 결과 삭개오는 어떻게 합니까? 성경에는 수입의 10%를 헌금하라고 하지만, 삭개오는 50%를 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누군가를 속였을 때 속인 금액에 5분의 1일 더한 금액을 갚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400%를 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 삭개오는 성경이 요구하는 것을 넘어 자신에게 부어진 은혜에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삭개오가 성경이 말한대로 10%만 나누겠다고 했다면, 그는 이미 충분한 부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큰 희생이 아니죠. 그래서, 삭개오는 내가 받은 은혜와 복음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50%, 그 이상이라도 내겠다고 한겁니다.
그는 이제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자가 된겁니다. 은혜는 삶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은혜는 원칙만 남아있는 앙상한 삶에서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풍성한 삶으로 변화시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너의 집에 유하길 원한다. 함께 더불어 먹고, 교제하고, 너의 일상속으로 들어가 나의 사랑과 은혜, 복음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너가 돈을 쓰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학교와 직장생활, 사람들과 관계하는 모든 것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싶다”
여러분, 복음은 우리의 모든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말씀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3장은 교회에게 쓴 말씀입니다.
즉, 여러분이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일요일에만 그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여러분의 삶에 데려와야 합니다. 그분을 영접해야 해요.
혹시, 지금도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분 계십니까? 삭개오와 같이 기쁨으로 그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집에 거실 뿐만 아니라 주방, 안방 구석 구석까지 예수님을 데려가세요.
“목사님, 제 방이 지금 너무 누추해서 안되겠습니다. 방을 좀 깨끗히 치우고 난 이후에 예수님을 초대할께요. 지금은 아닌거 같아요.”
여러분, 제가 말씀드렸죠. 깨끗하게 한 이후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에 노크하고 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여러분의 삶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요.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하신 일을 보세요. 예수님은 어떻게 모두가 외면하는 아웃사이더, 삭개오에게 너의 집에 갈 것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분은 태초 이전부터 삼위일체 관계 안에서 핵심적인 인사이더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서 계신 분.
그런데, 그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은 철저하게 아웃사이더로 살아가셨죠. 구유에서 태어났고, 성 밖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으심으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았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아웃사이더들의 마음을 깊이 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일을 했든지 상관없이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바라보시며 그 이름을 이미 아시죠.
“누구 누구야. 속히 내려와라. 내가 너희 집에 가겠다” 그분은 죄인의 친구이며, 우리 모두의 친구이십니다.
여러분이 나무에 올라가서 군중을 뚫고,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게 될 때 그분의 은혜와 사랑, 구원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