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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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계 22:6-21
오늘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으로,
요한계시록의 결론이면서 성경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 성도의 구원,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성경이 말한 마지막 때가 아니냐”는 질문은 현대 사회에서 자주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특히 기독교 신앙이 없는 이들조차, 종종 현재의 불안한 시대 상황을 보며 무언가 종말적이라고 느끼곤 합니다.
지진, 기후 변화, 전염병 등 세계적 재난과 자연재해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성적 타락, 가정 붕괴, 생명 경시 등 사회적 붕괴로 혼란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국제적 갈등으로 3차 세계 대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빅데이터와 AI기술 발전으로 창조 질서 붕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교회 세속화, 종교 혼합주의 등으로 절대가치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으로 많은 사람들은 ‘자연이 경고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너무 이상해졌다’고 말합니다. ‘진짜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고 호소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과 진정한 소망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성도가 받을 보상에 대해 말해 줍니다.
그리고 성도는 어떻게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알려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과 진정한 소망을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약속(22:6-9)

6절을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22:6 NKRV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천사는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믿을만하며 참됩니다. 선지자들에게 영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이루어질 일,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이시려고 우리를 당신에게 보내셨습니다.”
계 22:16 을 보면 ‘그의 종들’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이 예언의 말씀이 왜 믿을만하고 참되다고 합니까?
그것은 선지자들에게 영을 부어 예언의 말씀을 주신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지금 요한과 교회들에게 반드시 되어질 일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전 6세기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다니엘을 통해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을 주셨고 그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단 2:45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니엘 2:45 NKRV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이 구절은 다니엘이 환상을 통해 본 신상과 관련된 예언이며, 손대지 아니한 돌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가 와서 금, 은, 쇠, 놋, 진흙으로 된 세상 나라를 무너뜨린다는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 역사상 실재한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받았고, 그것들은 놀랍도록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다니엘에 앞서 주전 8세기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65:17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사야 65:17 NKRV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 외에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수 많은 예언들을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주셨고 역사를 통해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동일한 하나님이 요한을 통해 장차 되어질 일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천사는 그 예언의 말씀이 믿을만하고 참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대 수사학에서는 효과적인 논증이 되려면 말하는 사람의 신뢰성 확보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즉, 화자의 권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화자를 믿을 수 없다면 그 말하는 내용도 믿을 수 없고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전하는 이 예언의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직접 나온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속히 올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10절과 함께 볼 때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절은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2:10 NKRV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다니엘서는 예언의 말씀을 마지막 때까지 봉함하라(단 12:4)고 하였으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인봉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예언의 말씀을 받은 시기는 주전 5세기 중반이었지만, 실제 이 말씀의 봉인이 해제된 것은 주전 2세기로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즉, 다니엘이 예언한 모든 것이 성취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천사가 요한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종말의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이 예언의 말씀은 교회에 선포되어야 하고, 성도들은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은 속히 오신다고 하셨으나 이 천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오지 않으셨다. 과연 이 예언을 믿을 수가 있나?’라고 질문합니다.
성도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인간의 시간 개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께는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고 했습니다.
“속히”라는 말은 절대적인 시간의 길이 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속에서 지체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시간은 질적 시간(Kairos)이지, 양적 시간(Chronos)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재림의 임박성은 성도들의 준비 상태를 촉구하기 위한 영적 긴장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실 수 있으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마 24:44)’고 권면합니다.
“속히”는 즉시성(immediacy)이 아닌 임박성(imminence)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언제든 오실 수 있으니 항상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인내와 구원 계획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9 NKRV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는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혼이 구원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때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최후 심판의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믿어야 합니다. 언제가 되더라도 심판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신앙에 나태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 믿지 않고, 그저 시간이 흘러갈 뿐이라고 생각하며 나태하게 살았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세속적인 일에만 몰두하였습니다. 하지만 홍수가 닥쳤을 때에야 그들의 나태함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재림도 노아의 때와 같이 임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마 24:37)
초기에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매우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로 인해 초기 신자들은 여러 가지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고, 신앙이 나태해지기도 했다. 이는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같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안다면 우리는 알람을 맞춰 놓고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예수님이 오실 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천사도 예수님 자신도 그 때를 알지 못하시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마 24:36).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잠이 들면 안됩니다.
세속적인 생활이 주는 쾌락과 잔재미에 빠져 주님과 멀어지면 안됩니다.
하나님 보다 돈과 명예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삶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헛된 철학과 속임수의 가면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더러운 영의 노예로 이끄는 음란한 습관과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천사들을 통해 예언의 말씀을 들은 요한은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 했습니다 . 그러자 천사는 자신이 요한과 선지자들과 이 책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자신에게 경배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했습니다.
천사는 인간보다는 더 뛰어난 존재이지만(히 2:7) 천사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천사는 하나님처럼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천사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외경인 에녹1서와 욥기 외경을 통해, 유대교에서는 대천사 미가엘이나 라파엘을 신성시 하고 특정 천사에게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신약시대 골로새교인들 중 영지주의자들은 천사들에게 계시를 구하거나 예배를 드리는 일이 있었습니다(골로새서 2:18). 그래서 초대 교부인 오리겐은 천사 숭배를 이단적 경향으로 규정하고 경고하였습니다.
중세시대에는 대천사 미가엘과 가브리엘을 위해 성당을 짓고 예배하는 관습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떤가요? 현대의 뉴에이지사상은 다양한 천사 숭배 관습들을 현대적인 모습으로 포장하여 교묘히 사람들을 우상 숭배로 미혹합니다.
수호천사의 개념이 그 중 하나입니다. 각 사람에게 배정된 천사가 있고 이 천사와 직접 교감하고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점성술을 가미하여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천사 카드가 타로 점을 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동양의 기(氣)사상과 에너지 의학, 명상 요가 등과 결합하여 천사 명상, 천사 테라피 등의 이름으로 상업화되었습니다.
천사 숭배는 단순히 천사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대신해 천사에게 의존하는 우상숭배가 분명합니다. 이것은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만이 모든 피조물의 경배 대상이라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거짓된 사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사 숭배를 단호히 배격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2. 성도가 받을 보상(10-17)

10절부터는 천사가 마지막 때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가 되어 행하실 보상과 심판과에 대하여 사도 요한에게 전합니다. 먼저,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2:11 NKRV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이 구절을 읽으면 선하신 하나님이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2024년 말에 번역된 새한글 성경을 보면 그런 오해가 사라집니다.
새한글성경 계 22:11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은 불의를 계속 저지르고, 더러운 사람은 계속 더럽혀지라지요.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계속 의를 실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계속 거룩한 채로 있으십시오.”
이 구절은 종말의 때가 되면 악한 자는 완악해져 변화가 불가능한 상태로 된다는것을 의미입니다.
평생 악한 습관에 따른 행동을 해 왔던 사람이 그 행동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랜 동안 어둠 가운데 살았던 사람은 빛 가운데로 나갈 길을 보여주어도 스스로 가지 못합니다. 누가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이 스스로 그 어둠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왕 아합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 이세벨의 악한 행동을 좇았고, 우상 숭배에 빠지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신 많은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아합과 그의 가족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고집스런 악행은 변화의 기회를 거부했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저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회개의 기간을 더 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더욱 악한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때에 일어날 풍조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딤후 3:1-5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1–5 NKRV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에 따르면 마지막 때의 특징은 고통의 때라고 것입니다.
지금 사도가 언급한 내용들 중에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서 일어나지 않는 현상들이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런 현상들이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하십니까?
이런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삶은 거친 죄악의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가야 하기 때문에 정말 힘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는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를 행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이 삶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에게 주실 상을 바라며, 전진해야 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쓰러지면 다시 부여잡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니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의 간증입니다.
저는 30년간 자본시장에서 치열한 경쟁과 탐욕, 실리주의의 한복판에서 일했습니다. 냉혹한 인간관계와 무한 경쟁 속에서 상처받은 수많은 동료들을 보았습니다.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하거나 직장을 떠나는 이들도 있었고, 나 역시 조직 내 권력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깊은 상처를 받고, 대인기피와 불면증을 겪으며 정신적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저에게 광야였고,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무너졌지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저를 다시 세우셨고, 저를 더욱 단단한 존재로 빚어 가셨습니다.
이 경험은 제가 상처 입은 자들을 향한 깊은 공감과 민감함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물 앞에서 피상적 조언이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사람, 함께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는 동행자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신비(μυστήριον)였으며, 저의 존재 깊숙한 곳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22:12–13 NKRV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주님은 다시 한번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밝히셨습니다. 알파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칭호를 자신에게도 사용하셨습니다. 이 칭호는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과 구별합니다. 예수님은 시간에 제한받지 않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행위에 따른 보상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원칙입니다.
선지자 예례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은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신다(렘 17:10)”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신다(롬 2:6)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벧전 1:17) 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언뜻보면, 이 구절들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나 선한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와 배치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그 해답이 제시된다.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2:14 NKRV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3. 마지막 경고와 축복(18-21)

요한계시록 22:14-21
요한계시록은 당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인해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종말의 순간이 될 것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합니다. 당신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소망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둘 때,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참으로 견고해질 수 있으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지 배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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