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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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 나의 사자
말라기 = 나의 사자
오늘 말씀은 저희가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만큼 저희가 이름 하나 만큼은 기억하고 있지만 저희가 보통 십일조에 대한 말씀 말고는 잘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실 말라기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 “나의 메신저”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꽤나 오랜 기간동안 사람들이 말라기를 사람의 이름으로 이해하지 않고 다른 어떤 예언자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이해할 때가 많았어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이 말씀에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내 사자를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내 사자가 히브리어로 말라기입니다. 그렇다보니 이 말라기를 누군가는 에스라다, 모르드개다, 학개다, 스가랴다 등등 말이 많았는데요,
결론적으로는 내용이 다른 예언서나 사람들의 문체와는 확연이 다르기 때문에 말라기라는 누군지 잘 모르는 어떤 예언자가 전한 말씀이다, 라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역사
역사
대신에 언제 쓰여졌는지는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셔서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최소한 성전이 다시 지어진 시점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저희가 성전 건축이 중단된 시점에서 학개 선지자의 말씀을 보았는데요, 사실 제가 좀 잘못 전달드린 부분이 있었는데, 성전 건축이 중단된 기간을 제가 8년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정확히는 8년이 아니라 16년이었습니다. 8년은 고레스왕과 다리오왕 사이에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캄비세스 2세라는 왕의 재위 기간을 말씀드리려다가 제가 실수로 성전 중단 기간과 헷갈렸던 것 같아요. 원래는 고레스 왕 제 2년부터 다리오 왕 제2년까지 16년이라는 기간 동안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었구요, 그로부터 약 4년 뒤인 다리오왕 제 육년에 성전이 드디어 완공이 됩니다.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이제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으니까 이제는 나라를 다시 바로 세워야겠죠. 성전 건축 이후에 백성들이 성벽을 다시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전 건축을 방해받았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벽 건축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많은 방해를 받았었습니다.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무려 두 왕이 재위하는 동안 성벽이 재건되지 않았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과 아닥사스다 왕이 있었는데요, 여기서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의 남편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역사적으로는 크세르크세스 왕이라고 해서 영화 300에 등장하는 대머리 왕, 막 온 몸에 금사슬로 치장한 무서운 왕으로도 알려져 있죠.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그리고 그 아들인 아닥사스다 왕때까지 성벽은 재건되지 못하고 있었다가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부탁하여 성벽재건을 하게 됩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성벽 재건은 순식간에 끝났습니다. 52일만에 끝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성전 건축이 완료된 시점으로부터 무려 70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이렇게 성벽을 지은 백성들 앞에서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다짐하게 됩니다.
특히 성벽 건축 이후에 중요한 개혁을 행했는데요, 바로 레위인과 십일조에 관한 개혁입니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레위 사람들은 성직을 도맡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성전에서 찬양하고 악기 연주하고 문지기를 하고 성전 주변을 관리하고 십일조를 관리하는 역할을 했고, 특히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은 제사장 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다른 일을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과 제사에 대한 일을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다른 지파 사람들의 십일조로 살아갈 수 있고, 또 그 중에서 십일조를 따로 구별해서 제사장들에게 주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레위 사람들이 성전을 관리하기 때문에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그냥 레위 사람들 먹고 살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버려두지 않는 것, 하나님의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함께 관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그런데 아닥사스다 왕 32년, 성벽을 건축한지는 12년 째 되는 해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었다가 다시 돌아와보니까 예전에 서약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했던 백성들이 다시 개판이 되어있는거예요. 십일조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성전을 관리하고 또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주어서 제사를 드리게 한다고 했는데, 그걸 안하니까 레위 사람들이 다 먹고 살려고 다른 데로 도망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전도 관리를 안해서 난리가 나고, 또한 이방사람들과 혼인을 맺어서 안식일도 안 지키고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던 겁니다.
저희가 주로 말라기를 십일조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바로 이 12년간, 성벽을 재건하고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서 개혁하기 까지의 기간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와 십일조를 회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라기가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이야기하면 십일조가 중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는 것이고, 제사와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공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왜 죄를 지었는가?
왜 죄를 지었는가?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분명히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온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우리가 하나님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안식일도 지키고 제사도 드리고 십일조도 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해놓고서는 왜 다시 그렇지 못한 삶으로 돌아간 것일까요?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옵니다. 먼저 13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먼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손하고 완악한 말로 거역했다, 라고 말씀하시구요 그래놓고서 “아니 하나님, 저희가 언제 하나님 한테 거역하고 대적했다고 그러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대체 어떤 완악한 말을 했는가 보니까 14-15절 말씀에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백성들이 “야, 하나님을 섬기면 뭐하냐? 지금 세상을 한번 봐봐, 교만한 사람들이 더 잘살고 복받은 사람이고,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더 번성하고 잘살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이 화를 면하고 나쁜일도 더 안당하는거 같은데?”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오늘날의 저희들 또한 많이 경험하고 보는 일들입니다. 사실 나쁜 짓해서 돈번사람들 잘먹고 잘사는걸 보는게 하루이틀이 아니잖아요? 특히 요즘도 보이스피싱처럼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벌고서는 처벌이 약하니까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사기 공화국이다, 사기 치고 감방가는게 연봉 수십억씩 받고 일하는 셈이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문제를 많이 보았던것 같아요. 하나님이 계시면 대체 왜 이런일이 일어나냐는 것이죠. 저희가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보았을 때도 말씀드렸지만 신정론, 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과연 정의로운 분이시냐에 대한 질문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데요, 말라기에서도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라는 질문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
말라기는 하박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17-18절 말씀을 함게 읽어볼까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신다는 말씀을 전하십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과연 정의로운 분인가? 라는 의문은 끊이지 않습니다. 악인이 잘먹고 잘살고,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헛되고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당장 우리 눈 앞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조차 의인으로 살기보다는 악인으로 살기 택하는 경우도 많이 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장” 눈 앞에는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아끼고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그렇게 하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날이 오면 어떻게 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먼저는 앞서 본문말슴에서 나온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같이 타버릴 용광로 같은 날이 이를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다른말로는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이죠.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의로운 태양이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광선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를 직역하면 새의 날개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마치 새가 날개로 새끼를 보호하듯 감싸고, 태양빛이 감싸는 것처럼 보호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죠.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그리고서는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를 통해 정하신 율법을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이틀전에 월요일 새벽기도 시간 때에도 제가 말씀을 전하기는 했는데, 이 호렙산, 다른 말로는 시내산으로도 불리는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처음 부르셔서 말씀하시는 출애굽기 3장 말씀을 그저께 읽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시는데요,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해서 영어로는 I am who I am, 좀더 정확한 번역으로는 I will be who I will be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좀더 잘 번역해보자면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일 지어다”라는 뜻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조금더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앞으로 너희에게 보여주고 행할 것으로 알게될 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된 에흐예(אֶֽהְיֶ֖ה)라고 하는 말은 ~이다, ~이 되다, 존재하다 라는 뜻을 가진 하야(הָיָה) 동사에서 1인칭인 ‘나’를 붙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 다른 말로 야훼라는 이름이 나왔어요. 하야 동사 앞에 3인칭 남성을 뜻하는 ‘그’를 붙여서 “그가 ~이 되다”, “그가 ~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 때에 너희가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라는 말씀이 여러번 등장합니다.지난번 에스겔 말씀에서도 보시면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야훼를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곧 앞으로 너희가 고국 땅에 돌아가게 되는 일을 봐라, 그 때에 그것이 내가 행한 일인 줄을 알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전하는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은 악인이 잘살고, 의인이 못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찾아오게 되면, 그 때가 되면,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치료하는 광선으로 감싸시고 악인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그래서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낼 것이니 그가 너희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저희는 이 엘리야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죠.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세례 요한이 먼저 주님 앞에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서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오늘 처음 읽은 말씀, 나의 사자를 내 앞에 보내시리라고 하신 3장 1절의 말씀의 나의 사자는 말라기는 바로 세례 요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역할은 하나님의 날을 불러오시는 그리스도, 메시야가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을 불러오실 메시야를 예비하는 자일 뿐이죠.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한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을 때에 “아니라”라고 겸손하게 대답하면서 자신은 뒤에 오는 이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엘리야가 먼저와서, 세례 요한이 먼저와서 누구의 길을 준비하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국 진정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 심판의 날, 치유하는 광선을 비추는 공의로운 태양은 부활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치료하는 광선
치료하는 광선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가지고 어제는 막 37도까지 올라가서 집밖에 나가기가 너무 싫더라구요. 월요일에도 저희가 쉬는 날이라서 막 어디 놀러갈 법도 한데, 너무 더우니까 새벽기도 끝나고 돌아와서는 한발자국도 안나갔던게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태양빛을 쫙 비춰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아이고 지금도 더운데 또 빛을 더하면 얼마나 더 더울까?”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저희가 “지금 당장” 덥다고 해서 태양빛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더운 태양빛이 사라지면 당장은 시원하니까 좋을 수도 있어요. 만약에 뜨거운 여름철에 어떤 한 버튼이 있어서 그 버튼을 딸깍! 하고 누르면 그 버튼을 누른 사람한테만 평생 태양빛이 안 쏘인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많은 사람들이 “아이고 더웠는데 잘 됐다”하면서 좋다고 누를 겁니다. 만약에 여전히 태양빛을 쐬고 싶다고 말하면 “저거저거 바보야 바보. 더운데 무슨 태양빛이야?”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겨울이 오게 되면 어떨까요? 추운 겨울날에도 태양빛이 한번도 땅을 쐬지 않으면 과연 인간이 살 수 있는 기온이 될까요? 그제서야 버튼을 눌렀던 사람들은 땅을 치고 후회를 하면서 추운 겨울을 보낼 수 밖에 없고, 더울 때 겨울에 비칠 따뜻한 태양을 생각했던, “태양이 필요할 그 날이 올거야”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따뜻한 태양빛을 만끽할 수 있을 겁니다.
결론
결론
본문말씀 4장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의인으로 살기 참 힘든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내가 할 일들로 너희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기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버튼 하나 딸깍해서 편해지는 것은 쉽습니다. 죄를 지어서 잘먹고 잘사는 것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반면에 더운 여름철을 참고 겨울에 비칠 따뜻한 태양을 기다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겨울까지 태양빛을 버리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따뜻한 광선을 맞이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시고, 자녀들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잃지 않고 의인으로서 살기 위해서 애쓰며 나아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날에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꼭 십일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잘 지키고, 지난 주 말씀처럼 저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죄로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 성전을 회복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저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며, 의인으로 살아갈 힘을 더하시는 성령의 충만하심을 간구하며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