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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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설교를 통해 회개의 전반적인 내용과 회개의 단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왜 회개해야 합니까? 왜 회개가 필요합니까? 혹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편한 마음이 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분은 없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결코 건강한 삶(Well-Being)이 아닙니다. 신앙의 결과로 삶이 건강해질 수는 있습니다. 건강한 삶의 목적은 상담학이나, 심리학의 목적이지 신앙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회개가 죄책감을 없애고, 우리 마음이 편해지고, 이런 목적일 수 없습니다.
회개에 관한 첫 설교에서 저는 회개가 우리에게 얼마나 복된 것인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회개하면 복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우리에게 임해야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어떤 것보다 복 되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가 복이고, 능력이기에 회개해야 한다면 사실 선택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을 받을 필요를 못 느낀다면, 내게 능력이 아쉽지 않다면, 회개는 그다지 필수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큰 문제가 없고, 결핍이 없고, 힘든 일이 없는 이에게 회개는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는. 마치 안하면 손해지만, 당장 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운동이나 공부같이 느껴집니다. 운동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는데 안 하는 것처럼, 회개도 그렇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복이고, 능력이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회개의 필요: 공의의 하나님
우리가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결코 그냥 두실 수 없습니다. 공의는 의를 행함과 더불어 불의를 형벌해야만 합니다. 불의를 그냥 둔다면 공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형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공의로우시기에 죄를 보면 공의의 완전한 만큼 완전하게 분노하십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죄를 형벌하고, 죄를 제거해야 해결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세상에 악이 있기에 의로우신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매일, 매일 세상의 모든 죄를 보시면서도 죄에 익숙해지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분노하시는 그런 공의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신지 죄를 차마 보지도 못하십니다.
하박국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죄에 대해 아주 철저하십니다.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십니다.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십니다.
앞의 두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잠시 묵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죄라도 보시면 분노가 일어나는데, 우리가 악한 사람이 아동이나 힘없는 여자를 학대하는 것을 볼 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분노가 헤아릴 수 없이 크게 일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런 분노가 세상의 죄를 보면서 매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죄를 보면 거부감과 역겨움으로, 그 죄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으십니다. 마치 우리가 죽은 사람의 시신에서 시체 썩은 물이 흘러나오고 구더기가 기어다니는 것을 볼 때 도저히 눈 뜨고 보지 못하는 것보다 헤아릴 수 없이 크게 하나님은 죄에 대해 거부감과 역겨움을 느끼십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죄를 어떻게 여기시는지 조금 이해가 되십니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실 뿐 아니라, 죄인을 심판하여 공의를 세우고, 공의를 세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심판하실 때, 형벌하실 때 마지못해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전자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후자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두 모습 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 6:11-13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12 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13 그 죽임 당한 시체들이 그 우상들 사이에,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 위에, 모든 산 꼭대기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손뼉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하라고 하십니다. 오호라!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반역하더니 이렇게 형벌을 받는구나, 오호라 잘 되었다. 오호라 기쁘구나!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면서 슬픔으로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었다면, 에스겔에서는 공의가 실현되고 죄인을 심판하므로, 그것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죄인을 형벌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잠언 1:23-30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24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25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그때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나를 부지런히 찾으리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경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를 행하던 그들이 재앙을 만날 때, 두려움이 임할 때 하나님께서 웃으시고 비웃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재앙을 만난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행하므로 벌어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고, 죄인을 형벌하기를 즐거워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이렇게 싫어하신다면 왜 수많은 죄에 대해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나? 내가 죄를 지어도 형벌하시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이렇게 끔찍히 미워하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시편 50:21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지금 세상에 수많은 죄가 있지만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고 교만하게 행하는 데도 형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기뻐한다거나, 죄를 미워하지 않거나, 죄인을 형벌하지 않아도 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분의 형벌을 미루게 하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 조화되기 어려운 하나님의 두 모습이 인간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 경험이나, 내가 느끼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렇게 죄를 미워하시는데,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회개하기를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하나님이 죄인을 형벌하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짓고도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씨름하고 싸워야 하고, 그러다 실수로 넘어지더라도 바로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더군다나 죄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두렵기에 안도감을 얻기 위해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밝히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계획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한 우리를, 그러나 죄가 유전된 우리를 형벌하지 않으실 수 있었다면, 죄인인 우리를 그냥 의인을 바꾸어 천국에 데려가실 수 있었다면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죄를 반드시 형벌해야 하기에 십자가를 계획하셨습니다.
여기 계신 모두가 아시듯,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예수님 한 분에게 온 인류의 죄를 다 전가하고, 온 인류가 받을 형벌을 예수님께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완전한 유기, 지옥의 형벌을 예수님께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바라본다면 반쪽만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 맞춘 곳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공의를 보아야 합니다.
죄가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도 심판하고 형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얼마나 공의로운 분이신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아는 만큼, 그리고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아는 만큼, 우리는 십자가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공의의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기에, 내가 죄인이어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형벌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제거하실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았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떻게 행하겠습니까? 먼저 죄를 짓기를 무엇보다 꺼려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죄와 싸우다가 넘어져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바로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로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언제나 회개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때마다 십자가의 공로를 간절히 의지하고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 십자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성도라 하는 이가 죄에 대해서 쉽게 생각합니다. 죄를 지어도 당장 회개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것이 죄인 줄 알아도 죄가 즐겁기에 우선 즐깁니다. 그리고 나중에 회개한다고 합니다. 자기 감정대로 분내고, 험담하고, 싸웁니다. 세상을 쫓는 것이 죄인줄 알면서도 절제하지 않습니다. 거룩하기를 힘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죄와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알면 절대로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알지만, 십자기를 진정 알지 못하기에 이렇게 행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십자가를 알았었다면 이제 십자가의 알맹이는 잃어버리고, 십자가의 형태만 마음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영혼에 남지 않고, 십자가의 지식만 머리에 있다면 과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회개라고 하면 그냥 회개인줄 압니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그냥 기도인줄 압니다. 예배라고 하면 그냥 예배인줄 압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기도라고 다 똑같지 않습니다. 예배라고 다 똑같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나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와 가증하게 여기는 기도가 나옵니다.
회개의 외형을 흉내낸다고 회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중심으로 회개할 때 진정한 회개가 됩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기초인 믿음이니, 회개니, 사랑이니, 순종이니, 구원이니 나름대로 생각하다가,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면 어쩌나,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너가 한 순종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너가 한 것은 회개가 아니었다. 너가 기도라고 한 것은 나에게 상달되지 않았다. 너가 한 사역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회개를 필수가 아니고 하면 좋은 것 정도로 여긴다면, 생각한다면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느껴진다면 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나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닌가, 이 정도면? 남들에게 피해 안 끼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도 하고, 이 정도면. 이런 마음이라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회개에 대해, 그리고 죄에 대해 너무 흐릿해져 있는 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죄와 회개와 너무 다른 것 아닙니까.
3. 본문에 나타난 공의의 하나님
본문에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당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온 성도가 희생제사를 드릴 때 빌라도가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죽였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자에서는 성전을 더럽히는 극악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이 이 사건을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엄하게 경고하시는 대답을 보면 이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동기가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갈릴리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은 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을 저주받은 곳, 낙후된 곳, 선한 것이 나지 못할 곳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근거로 그들이 저주받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사건이 겪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사람이니 예수님을 비방할 의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그런 사건을 당한 것이 그들이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희도 죄인이고, 너희도 그런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지 않으면 이들처럼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예를 덧붙이십니다. 갈릴리 사람이 아닌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나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참한 사건을 겪은 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들처럼 망할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받은 그들은 큰 재앙을 당한 이들이 죄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재앙을 당하지 않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볼 줄 모르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지금 재앙을 당하지 않아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멸망하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았듯이 예수님도 죄에 대해 철저하십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 질문하는 자들과 같이 교만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고 무섭게 다루고 계신지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가꾸었는데, 3년이 지나도 무화과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3년 만에 꼭 무화과 열매가 맺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에서는 3년이면 열매가 맺히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심을 때 열매를 얻기 위해 심었기에 열매가 맺히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당연히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를 키워온 3년의 시간을 생각하여 1년만 더 지켜보자고 합니다. 그래도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때 베어버리라고 요청합니다.
앞의 경고에 이은 비유인 것을 감안하여 해석을 한다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로, 무화과나무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회개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에 말씀을 선포하고 이적을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탄식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행한 이적을 소돔과 고모라에 행했다면, 그렇게 악했던 소돔과 고모라도 회개했을 것이라며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1-23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주인은 이제 이스라엘을 찍어버리겠다고,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이후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압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판을 받아 온 세계로 흩어져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두 번이나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같이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를 심판하고 지옥에 넣을 수 없어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우리 앞에 십자가가 놓였으니, 회개할 수 있으니, 이제 회개해야 합니다.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의식하고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행동의 죄, 내면의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점점 더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열매입니다. 회개의 열매입니다.
4. 결론
하나님은 사랑이며 공의이십니다. 하나님을 알되 잘 알아야 합니다. 그분을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성경을 기준으로 확인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무엇보다 확실하게 주신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진짜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 우상을 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지 않고,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내가 아무리 세상을 사랑해도, 내 중심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떠나 있어서 나를 기뻐하시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는 공의의 하나님을 아십시오. 인자의 하나님과 엄위의 하나님을 아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회개하기를 힘쓰십시오. 죄를 회개할 뿐 아니라 죄와 싸우고, 죄를 버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아래 겸손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뵈올 수 없고, 모든 복의 근원이신 그분을 뵙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고, 십자가의 공의에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열매를 맺어드려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회개의 열매, 즉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닮은 성품과 삶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겸손하게 회개하기를 힘쓰며, 죄와 싸우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인자 안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