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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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고 형제 디모데는

하나님의 뜻 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골로새서의 배경을 살펴 보았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골로새서의 배경에 대해 공부 했습니다. 꼭 염두해야 할 배경은 첫째, 골로새 교회 구성원은 이방인 들이다. 둘째, 골로새 도시는 쇠퇴하는 중이었다. 셋째,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다.
골로새 교인들도 바울을 모르고 바울도 골로새 교인들을 모르는 상황에서 인사말은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인사말이 첫인상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방인들 이었고 따라서 이들이 인지하는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인지하는 하나님과는 달랐다는 점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로마시대의 사람들은 다신교의 관점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개념이 많은 신 가운데 한 하나님 이라는 생각이 먼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에 실제로 살아계셨던 실존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개념은 생소했을지라도 실존하셨던 예수님은 이들에게 부인할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였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로마 문화는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앞서는 문화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전들과 조각 화려한 건물 경기장등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화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었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신교의 세계속에서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더욱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실존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현상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제는 승천하시고 더이상 계시지 않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만졌고 경험했던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그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쇠퇴하고 있던 도시 골로새에서 새로운 희망을 본 골로새교회의 교인들은 바울의 편지에서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비록 한번도 보지 못한 바울이었으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에바브라가 바울에게서 복음을 배웠기 때문에 바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 스승격인 바울이 친히 편지로 골로새 교인들에게 소식을 전했으니 이들에게는 특별한 편지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모일 때 마다 이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편지의 서문은 그 의미가 새로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서문은 특별합니다. 우리는 잠시 스치듯 서문을 대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골로새서를 매일 한번씩 읽으시거나 들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저 역시 하루에 최소 한두번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서문이 저에게도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직까지 그렇게 못하셨다면 꼭 그렇게 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그래야 골로새 교인들이 경험했던 것들을 우리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과 믿음의 형제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가 너희에게 그리고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오는

τοῖς ἐν Κολοσσαῖς ἁγίοις καὶ πιστοῖς ἀδελφοῖς ἐν Χριστῷ· χάρι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예수님께 속한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과 믿음의 형제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단순한 인삿말입니다. 하지만 전에 말씀 드렸듯이 바울의 서신은 단어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야 정말 속에 있는 뜻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라는 단어는 순결해지기 위해 따로 분류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원래는 순결하지 않았던 이라는 전제가 붙고 둘째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결함을 위해 따로 구분해 놓은 이라는 방법이 제시됩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구분하였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고 대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지금은 우연히 교회 공동체에 속한 것처럼 생각이 되겠지만, 알고보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구분해 놓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태멘 교회 성도님들 역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따로 구분해 여기에 모이게 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연이 아니고 우연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때 당시 골로새 도시는 쇠락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모인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소망을 찾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에게 현실은 어둡고 매우 불투명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신이 어떤 의미가 있어야 했고 소속감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을 여기에 속하게 하기 위해 따로 분류해 놓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여기에 속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말이 얼마나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좋은 회사 좋은 단체 좋은 교회의 멤버가 되기를 원합니다. 학연 지연 인맥 이러한 것들이 세상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크리스챤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는 이러한 기준들이 중요합니다.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부심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아 따로 구분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그 어느 단체라 할지라도 영원할 수 없지만, 우리가 속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기 때문에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우리가 죽어 하나님 나라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러한 자부심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거나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원하고 바라기는 골로새서 공부를 통해 이러한 자부심을 알게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래봅니다.
두번째 그룹은 믿음의 형제들입니다. 이 그룹은 첫번째 그룹과 조금은 성격이 다릅니다. 물론 이 그룹 역시 성도의 그룹에 속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성도들과 믿음의 형제들로 구분을 했습니다. 성도는 구분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면 믿음의 형제들은 형제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즉 성도들 가운데 형제들 이라는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이 서신의 공동 저자인 디모데를 형제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는 첫번째로 리더를 지칭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새로 믿게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미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들은 새로 성도가 된 골로새 사람들을 믿음에 세우기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하고 수고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체계화되고 제도화된 교회라면 이들에게 직분도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른 권위가 있었겠지만, 신생 교회였던 골로새 교회에는 아직도 사회적 신분이 교회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을 가지고 새로 믿는 사람들을 돌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바울은 따로 구분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올바르게 세워주고 권위를 세우는 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그룹을 형제들 이라는 명칭으로 따로 구분한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로 형제라는 명칭은 가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맺어진 가족 관계라는 뜻입니다. 성도라는 단어가 부르심과 구별됨을 강조했다면 형제라는 단어는 그렇게 구별되어 가족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혈연 관계만큼 끈끈한 관계는 없습니다. 좋든 싫든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절대적인 인연입니다. 그렇듯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적인 인연을 맺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이 이를 추상적인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친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아는 그런 친족 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의 뜻과 성령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롭게 창조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관계를 배워야 합니다. 골로새서는 이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제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 생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하고 알아 가야 하고 익혀야 합니다.
세번째로 형제라는 단어는 앞의 형용사인 ‘피스토이스’ 가 붙어서 견고한 애정으로 떨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저는 이 단어를 믿음의 라고 해석을 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가 믿음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엔 어떤 이유도 논리도 만족스러운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고 약속대로 부활 하셨고 약속대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받아 들이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인 것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성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도 다 그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관계도 이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그것도 뼈속까지 유대인인 바리새파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이방인인 골로새 교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엄청난 인식의 변화입니다. 첫째로 골로새 교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 라고 할 수 있지만 그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절대로 아닙니다. 이방인들과는 말도 안섞고 밥도 안먹고 심지어 같이 걷지도 않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이러한 바울의 변화를 빌립보서를 통해 배웠습니다만 다시 한번 여기서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진심으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식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우리’ 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미국에 오래 사시면 사실 수록 잘 안쓰는 단어가 ‘우리’ 입니다. 서양 문화 자체가 그렇습니다. 서양 문화의 뿌리는 바로 그리스 문화이고 로마 시대에 그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로마는 통치를 위해 각 문화들을 통합하는 정책을 사용했지만 로마 시민과 비 시민의 차이는 매우 컸습니다. 사실상 지배 계층과 피 지배 계층이 철저히 나누어져 있었고 신분의 차이가 분명했던 시대가 로마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 라는 개념은 신분에 따라 붙여지고 더 나아가서 가족 관계가 아니면 사용될 수 없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우리’ 라는 단어를 골로새 교인들에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단어인지 우리는 피부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경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를 접한 골로새 교인들은 어쩌면 이 단어 하나로 울고 감격하고 놀라와 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이 굳이 ‘우리’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하나님 아버지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우리’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엔 바울의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의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마음과 심정이 이 단어에 배어나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렇게까지 성경을 자세히 보아야 하나 하는 의문점이 생기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제가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대하지만 골로새서는 편지입니다. 오늘날에는 편지가 매우 귀합니다. 안쓰거든요. 이메일도 있고 카톡도 있고 소통 수단이 다양하고 빠르고 편리하기 때문에 굳이 편지를 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특히 손 편지는 매우 매우 귀합니다. 이제 조금만 시대가 더 지나면 편지가 무언지 모르는 세대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편지가 지니는 감성을 모릅니다. 제 시대엔 연애 편지가 보편적이었습니다. 이메일이 있기는 했지만 연애 편지를 안보내고 이메일을 보내면 연애를 안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애편지는 말입니다, 한번 읽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자간 자간 단어 단어 하나 하나 느낌표 물음표 마침표에도 다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건 무슨 뜻일까 무슨 생각이었을까 고민하고 상상하고 벼래별 쓸데없는 짓을 합니다. 그게 연애 편지의 매력입니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고민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 바로 편지입니다. 골로새서가 바로 편지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 시대의 편지는 우리 시대의 편지와 더 다르겠지요? 훨씬 더 귀하고 값지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 바로 편지라는 말입니다. 제가 서두에 골로새서를 많이 읽으시고 반복해서 읽으라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골로새 교인들도 이 편지를 마르고 닳도록 외우도록 읽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어 단어 하나에 골로새 교인들이 감정을 이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제 은혜와 평강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로 오는 은혜와 평강을 말합니다. 물론 아주 일반적인 인사말이긴 합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서두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바울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골로새 교인들은 어땠을까요? 그 심정이 되지 않으면 골로새서를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쇠퇴해가는 도시에 살고 있었고 아마도 불안하고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제가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는 매우 따뜻하게 다가왔을 것이고 어쩌면 바울의 이 간단한 인삿말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져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제가 은혜와 평강에 대해 신학적이고 바울의 서신들에 대한 설명을 드릴 수는 있겠지만, 저는 골로새 교인들이 느꼈을 그런 감정들과 감격에 더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야 성경을 보는 깊이가 달라집니다. 우리 마음이 가난해야 하나님의 풍성함이 역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의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의 풍성함은 들어 올 공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간절히 여러분들께 부탁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하실 수 있는 준비를 하시라는 것입니다. 기도로 예배로 찬양으로 우리 마음을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는 상태로 만드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톡 건드리셔도 바로 반응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민감함 간절함이 없으면 우리는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 마당만 밟고 도장만 찍고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것도 없고 경험함도 없고 그러니 교회 가도 별거 없더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마당만 밟고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시기를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로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에 넘치게 역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항상 우리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 구절도 그냥 읽으면 지나가는 인삿말이 됩니다. 1절부터 3절이 아무 의미없는 상식적이고 반복적인 인삿말일 뿐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요? 정말 골로새 교인들은 그렇게 이 말들을 지나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닐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이 구절을 읽으면서 골로새 교인들은 넘치는 감격과 눈물로 더이상 편지를 읽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골로새 교인들에게 한번도 본적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교회가 생기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삶 속에 어떤 영향이 있다고는 피부로 느끼지 못할 상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외부적이고 환경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면의 변화와 기쁨과 감격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믿은지 오래 되어서 그런 감격과 기쁨마저도 없을 수 있습니다. 계속된 사역으로 피곤하고 지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지 않다면,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혼자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누군가의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다른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기도를 쉬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지속적이었고 반복적이었으며 구체적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바울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기도를 항상 감사함으로 드렸다는 말을 들은 골로새 교인들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보증 수표를 손에 쥔 그런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는 무엇어있을까요? 왜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감사 드렸을까요? 그 내용이 이제 다음 설교에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시고 다음 설교를 기대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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