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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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 10:29-34(신약 111쪽)
설교제목: 신앙과 이데올로기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성경이라는 것이 참 흥미로운 책임을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또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참고한 자료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관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데요.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잘 아시는 예수님의 비유중 하나입니다. 바로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이지요. 아시는 것처럼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길가에 강도를 만나서 옷이 벗겨진 한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그 길을 지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살피지 않고 지나가 버렸는데요.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건져 돌보아 줍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답을 하시는 것인데요. 이 비유 속에서 눈여겨 볼 것은 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돌보지 않고 그냥지나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이에 관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을 따랐기 때문으로 해석을 하는데요. 율법에서 죽은 것과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게 되는 것이고요. 제사를 행하고 돕는 역할을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부정하게 되면, 그들이 맡은 역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관해서 제가 접한 새로운 해석은 이러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돕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약 강도 만난 자가 유대인이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부정하게 될지라도 강도 만난자를 도울 것이지만요. 이방인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이웃은 유대인만이 해당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과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마리아인에게는 특히 더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는데요. 이는 역사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에 속한 이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결혼을 통해 이른바 혼혈민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의 정체성을 이방인과 다르지 않게 보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배신한 이들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돌보는 이로 등장하는 것이 충격을 주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에 관하여 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결론적으로 이 비유는 이데올로기 혹은 율법주의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참된 신앙을 따르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말이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텐데요. 이렇게 말해 볼게요. 요사이에 청년부는 창립주일발표회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참석을 못하는 청년도 있고 또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같이 노래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운 청년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약간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오곤 합니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론 이런 겁니다. 누구는 열심히하는데, 누구는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식의 생각이 있는 것이죠. 그러한 이야기가 이 일을 준비하는 것에 결코 좋게 작용하지 않으니까요. 이 과정에서 마음이 상하는 청년들이 생기곤 합니다.
제가 중재를 해야겠다 싶어서요. 이 일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이러한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가 각자가 사정이 다 다르고 각자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인데,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이 일을 기쁘게 할 수 없다면, 그와 같은 열심과 노력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요. 오히려 조금은 부족하고 아쉬움이 있더라도 함께 어울어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을 모은는 것에 관심해야 한다’라고요.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목적과 방향이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는데요. 우리가 찬양을 하고 또 이 일을 함께 모여 준비하는 것이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면요. 우리가 관심할 것은 우리의 찬양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시게 받을 것이냐 하는 것에 있지요. 그런데 자칫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이 지나쳐서 더 잘해야하지 하는 이유로 때로는 비수가 될 말을 상대를 향해 너무 쉽게 내뱉고요. 그로인해 이 일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혹은 자기의 만족을 위한 일로 바꿔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돼요. 저는 그 또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정하진 않지만요. 결과적으로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은 하나님과는 무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요.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나님께 더 거룩해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거에요. 율법을 따르는 것에 철저했고요. 그것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을 멀리하고자 애를 썼을 거에요. 그들은 어쩌면 중요한 제사 지금 우리로 치면 예배를 앞두고 만반의 준비를 하며 가고 있던 중인지도 모르죠.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고 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서요. 눈 앞에 강도 맞아 죽어가는 자를 외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냐는 것이죠? 오히려 그와 같은 철저함들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하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도, 제사장과 레위인 뿐만 아니라 강도 맞은 사람마져도요. 그런데 왜 신앙의 열심으로 차별을 가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이웃을 돌보지 않고 외면하는 일을 하느냐는 것이죠. 분명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고 그로인해서 차별짓는 자신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요. 또한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어요. 신앙 안에서 민주주이든,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모든 것은 하나될 수 있어요. 신앙은 보다 크고 높은 차원의 것이어서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 따위로 규정되지 않는 것이죠. 달리 말해보자면, 가족 중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과 국민의 힘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가령,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나와 같은 당을 지지하지 않으니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말할 것인가요? 반대로 자식이 부모에게 그렇게 말할 것인가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나 자식이 있다면 어리석은 것이죠.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보같은 사람이죠. 미우나 고우나 우리가 가족이라는 것에서 서로 이해되고 포용되는 것이지 어떤 이념 곧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세계를 위협하게 둬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서로를 공격하는 행위는 너무나 비신앙적인 행위라는 거예요. 신앙의 그릇은 그것보다 크기 때문이죠. 그래서 과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9.11테러나 우리나라의 봉은사 땅밟기 같은 행위는 결코 신앙적인 행위라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신앙의 목적과 의의가 누군가를 죽이고 배제하는 것에 있지 않으니까요.
다시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생각해 보셔야 해요.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당시에 존경받는 신앙인의 모습이 얼마나 비신앙적인 모습인지를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어요. 그것은 지극히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에 사로잡힌 모습이지 결코 신앙의 모습은 아니라는 거에요. 반면에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통해 신앙이란 이런 것임을 밝히 드러내주고 있어요. 고통당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를 돌보고 사랑을 베푸는 일 말이지요.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생각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열심을 내어 달려온 내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배제했던 적은 없나요? 혹은 그것을 옳다고 믿으며 여전히 내 열심으로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을 다한 신앙생활을 통해 남은 것은 무엇인가요? 내 마음은 평안해졌으며, 내 안에 사랑이 흘러 넘치고 있나요? 해를 거듭할수록 내 신앙생활에 열매가 영글고 기쁨이 차오르고 있나요?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가요? 어쩌면 내가 열심을 다하는 그 신앙생활이 하나님과 전혀 관계 없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갇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다름을 기꺼이 포용하고 그것 너머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우리는 참된 신앙생활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서로 다른 사람을 신앙 안에서 사랑할 수 있는 복된 날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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