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7.13. 주일4부예배. 청년의 때에 꼭 기억해야할 것들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1 views
Notes
Transcript

본문

고린도후서 5:9–15 NKRV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서론

오늘도 4부 청년 예배로 모인 청년들과 모든 예배자들을 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 예배를 통해 부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가득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하는 마음을 담아 이렇게 인사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시 한 번 앞뒤로도 인사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지난 주 김영준 형제의 아버지께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모든 유가족들에게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하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공동체가 이뤄가길 소망합니다.
이처럼 누군가의 장례 소식을 접하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땅의 삶을 마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잘나고 위대한 인간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참 신비로운 일입니다. 누구는 백 년을 넘게 살고, 누구는 그 절반을 살다 떠나며, 어떤 이는 채 꽃도 피우기 전에 꺾이고 맙니다. 그 누구도 닥쳐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이것은 위대한 신비이고,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기에 이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아무리 건강해 보여도, 아무리 앞날이 창창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여기까지다”라고 하시며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시간표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의 삶을 마친 후에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누군가는 담대하게 서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위선이나 가면도 통하지 않는 자리, 그곳에 선 인간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참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전할 때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청년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청년의 때에 이 진리를 듣고 깨닫는 것은 결코 이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때에 반드시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 번뿐인 청년의 때를 허비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담대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론 1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쓴 바울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평생을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살다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이 참 많이도 그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감옥에도 가두고, 매를 때리고,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게 하였어도, 바울은 죽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께 충성했던 사람이지요.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신실할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줬을까요?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10 NKRV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바울은 이 땅의 삶이 끝나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결산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심판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베마(Bēma)”입니다. 당시 로마의 큰 도시라면 어디든 그 중심 광장 한복판에 베마라 불리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공적인 연설을 하는 자리였는데, 가령 총독이나 재판관 같은 자들이 저기 높은 단 위에 서서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판결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일반 시민들은 그 아래에 서서 듣고, 그대로 따라야 했습니다.
이 자리는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로마 황제의 권위로 세워진 자리였습니다. 황제의 대리인으로 서 있는 사람의 눈짓 하나, 손짓 하나로 누군가의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곳이었겠지요. 그 앞에 불려 나오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숨소리조차 조심하게 됩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벌벌 떨며, 변명의 말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먼저 무릎이 꺾입니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 해도, 이 자리 앞에서는 입술은 말라붙고, 심장은 요동치며, 정신은 새하얘집니다. 감히 그 앞에서 속이려 하거나 도전하려 드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심판대만 해도 이렇게 두렵고 떨릴 일이겠거든, 하물며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어떻겠습니까? 황제는 이 세상에서의 생명과 죽음만 주관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곳에서의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황제의 눈 앞에서는 변명과 속임수가 통할 여지가 있었겠지만, 그리스도의 눈 앞에서는 그 어떤 불의한 시도도 통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온 우주와 영원한 세상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울에게는 이 진리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세우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삶의 방향을 올바로 세워갈 수 있도록 이 진리를 힘써 전하였다고 합니다. 11절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옮깁니다.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굳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있었습니다.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9 NKRV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그것이 바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두 가지 표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먼저, “기쁘시게 하다”는 표현입니다. 헬라어로는 εὐάρεστος(유아레스토스)라고 읽는데, 이 단어는 단순히 ‘즐겁게 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다’, ‘인정받다’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께 기꺼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래, 이 삶은 참 잘 살아냈구나” 하고 인정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만약 주님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영원한 절망과 고통, 곧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바울이 “힘쓰노라” 말할 때 사용한 헬라어 φιλοτιμέομαι(필로티메오마이) 또한 훨씬 강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한 ‘노력’이 아니라, ‘명예로운 목표를 향한 열망을 가지고 최을 다하는 것’, ‘그래서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전심전력하는 태도’를 뜻하지요.
이 단어는 마치 피땀을 흘려가며 대회를 준비하는 올림픽 선수에게 어울릴 법한 단어입니다. 선수는 결코 아무렇게나 준비하지 않습니다. 훈련의 순간마다 목표를 생각하며 전력을 다합니다. 밥을 먹는 것조차, 잠을 자는 것조차 모두 그 목표에 맞춰 조율합니다.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냅니다.
바울이 선교 여행을 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십시오! 지금이 그 삶을 준비할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심판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들을 향한 절박함이 바울이 남긴 편지에서 고스란히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이 진리에 대해서 깊이 한 번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이 진리 앞에 진지하게 마주 서서 여러분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각해 보십시오..

본론2

심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하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울은 매일 그 날을 바라보며 살았고, 그 때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며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물론 정답은 '그렇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전하는 것으로 마친다면 아주 큰 문제가 생깁니다. “심판 날에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흠도 점도 없는 모습으로 서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삽시다!”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다구요. 우리 중에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로 깊이 물든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을 외면한 채, ‘주님을 기쁘시게 하자’, ‘열심히 살자’고만 말하면, 우리는 곧 율법주의의 덫에 빠지고 맙니다. ‘잘 살아야 구원받는다’, ‘착하게 살아야 인정받는다’는 식의 왜곡된 신앙으로 전락하게 되지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해도 될까요? 안될까요?”하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병아리 같은 소리로 “안 돼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친구는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어요?”라고 물으면, 어김없이 해맑게 웃으며 “아니요!”라고 대답하죠. 영악합니다. 웃으면서 사기를 칩니다. 거짓말의 대가들이지요. 어디서 이런 것을 배운 걸까요?
이것이 바로 죄인된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아주 본능적으로 죄를 향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본모습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로마서 3:10–12 NKRV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무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보이신다 해도, 그 뜻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에 순종을 요구하셔도, 그 뜻을 따를 의지나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자신의 죄성 앞에 치를 떨며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로마서 7:18–19 NKRV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24 NKRV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이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 상태로는 아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도, 어디 그게 잘 실천이 되던가요?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 수록 더 잘 지키기는 커녕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만 속속들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우리 자신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 묶여 있다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가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셨습니다. 절망에 늪에 빠진 자들에게 친히 소망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 소망의 소식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죄인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은 선하게 살 수 없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해서 무언가를 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 묶여 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인간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소위 “위대한 교환”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가져가 짊어지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가져와 입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21 NKRV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죄에 넘어지지 않으신 완전한 의인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분께 짊어지우셔서, 마치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심판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덧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십니다.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하고 순결한 자로 보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 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립니다.
요한계시록 6:15–16 NKRV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차라리 산과 바위가 위에 떨어져 잠시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우게 되길, 그렇게 죽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게 될 것이랍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모든 생각과 마음과 영혼까지 산산히 깨뜨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그대로 쏟아집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이 진노를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랑하는 아들의 어깨 위에 짊어지게 하시고, 그 위에 진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아들을 손으로 내리치시고, 발로 짓밟으사 죄에 대한 저주와 형벌을 퍼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깊은 바다로 던지셨습니다.
너무 과하게 표현하는 것 같다구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미가 7:19 NKRV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고, 우리에게는 자신의 의를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댓가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9 NKRV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것을 믿는 자들은 이제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주를 믿는 자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가지고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은 자라면 그가 누구이던 사랑하는 아들을 보듯 보아 보십니다.
놀라운 소식입니다. 도저히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정말 놀라운 소식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유일한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붙들고 계십니까? 지금 그분의 의로 옷을 입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기뻐하며 즐거워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심판대에서 결코 여러분을 모른다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혹 그렇지 않으시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본론 3

내가 진짜로 믿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한 번 이야기해봅시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 놀라운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말입니다. 이 능력을 마주하고 변화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한 목사님이 복음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하시더라구요.
“제가 오늘 예배에 15분 늦게 도착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강단에 올라와서 이렇게 변명합니다. ‘오는 길에 타이어 하나가 펑크가 났습니다. 고치려고 차 밖으로 나갔다가, 실수로 고속도로 한가운데로 발을 내디뎠는데,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리는 대형 트럭이 저를 그대로 들이받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늦었습니다.’
여러분은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만약 제가 정말로 대형 트럭에 치였다면, 제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이곳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트럭과 충돌해도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충돌한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능력은 어떤 완고한 죄인의 마음이라 해도 녹여내어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도록 이끌어 내는 위대한 사랑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18세기 초,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지역에는 모라비안 공동체라는 교회가 세워져 뜨겁게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을 사용해달라고 기도하던 중, 이들은 ‘서인도 제도’라는 곳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사탕수수와 코코아 농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혹독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평생 복음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채 말이지요.
하지만 이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영국과 덴마크의 농장주들은 노예가 기독교인이 되면 노동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선교사들의 출입을 금지했습니다. 난파선이 와도, 사람들은 별채에 격리되어 노예들과 절대로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했는데, 스스로 노예가 되어 서인도 제도로 팔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레오나드 도버와 데이비드 니치만이라는 두 청년이 선교사로 자원하였습니다. 자신들을 농장주에게 노예로 팔아 달라고 공동체에 요청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유와 생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1732년의 어느 날, 두 사람이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기 위해 항구에 이르렀을 때, 가족들과 공동체는 그들을 위해 손에 손을 잡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그때 모라비안 공동체는 마지막으로 서로 손을 흔들며 이런 인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죽임당하신 어린 양이, 당하신 고난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기를!”
이것이 모라비안 공동체의 첫 선교사 파송이었고, 이후 그들은 150년간 2,158명의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어린 양이 인도하시면 어디든지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흉악한 죄인들을 이렇게까지 변화시킬 수가 있는 걸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14–15 NKRV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강권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핍박하며 죽이기까지 했던 죄인 중의 괴수 바울을요. 그러한 자도 용서하시고 품어주시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바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아 이제 그가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모든 사람은 같은 이유로 천국에 갑니다.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감당했던 바울도, 복음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았던 모라비안 선교사들도, 그리고 저와 여러분도, 오직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천국에 갑니다. 죄인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그 뒤를 따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그리고 저와 여러분도, 오직 단 한 가지 이유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크고, 너무 놀랍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순결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 이 벌레같은 인간을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실 수 있는건가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며 자신의 마음을 쏟아낸 바울의 고백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9절과 10절입니다.
고린도후서 5:9–10 NKRV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가 그토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이유는 단순히 심판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이 땅에서나 저 천국에서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자이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던 바울은 저 천국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쓰고 영원토록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았던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토록 변함도 없고 쇠함도 없을 것입니다.

결론

이제 다시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봅시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주를 믿어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그 받은 은혜를 따라 살아간 우리의 삶 또한 반드시 그리스도 앞에 드러나고 평가될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충성된 종으로 칭찬을 받겠지만, 어떤 이는 드릴 열매 없이 불타버린 흔적만 남아 부끄러운 심정을 안고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날 우리는 그분을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것, 그분을 위해 더 많이 헌신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여러분의 꿈과 비전과 목표를 두십시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청년의 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 한 번뿐인 청춘을 세상의 헛된 것에 허비하지 마십시오.
혹 이 자리에, 도무지 그렇게 사랑할 마음과 헌신할 결단이 일어나지 않는 청년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작고 초라한 마음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주를 뜨겁게 사랑하지 못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냉랭한 마음에라도 자신의 피를 쏟아 뜨거운 사랑의 불이 피어오르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데 이유가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청년의 때에 이러한 것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첫째,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둘째, 우리는 그 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담대히 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는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새벽 이슬들이여, 부디 여러분이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시길, 그래서 가장 복된 인생의 시절을 보내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잊을 수 없는 은혜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낳으신 아들이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이시고, 그 사랑의 모양 자체이십니다. 그가 이 땅에 오셨으나, 우리는 그 분을 눈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며, 죄악의 칼날로 그분을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칼자국 사이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그 피가 우리의 손을 흠뻑 적시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요. 그 사랑이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다는 것을요. 요한은 이 진리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가득 물들이게 되길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함께 찬양합시다.
주님 큰 영광 받으소서

축도

이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죄인된 우리를 자녀로 삼아 끝까지 품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이 없는 사랑과, 항상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걷게 하시는 성령님의 교통하시고 역사하심이,
이 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서, 다시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가겠다 결단하는 모든 청년들과 예배자들 위에, 이들의 가정과 학업과 생업과 비전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