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타락의 길

신동조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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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타는 갈증에 마시는 바닷물
현대문명의 에피큐리아니즘
정욕은 기독교 문화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온 서구 사회에 ‘부도덕’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어 왔고, 따라서 사람들은 이 욕망을 매우 은밀하고 음성적으로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이 거리와 광장에서 당당히 활보하고 있으며 성애가 공공연한 볼거리이자 대중적 즐길거리가 된 상황이다. 사람들은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성에 관련된 정보와 영상과 뉴스를 접하며 지낸다. 이런 상황은 정욕이 자본과 결탁하면서 더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피터 크리프트는 “만약 성이 현대 사회에서 제거된다면 우리 사회는 경제 공황에 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성적 흥미를 주는 요소가 빠진 상업 광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은 이미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사회에 피해가 되지 않는 한 개인의 성욕과 성적 권리를 국가가 통제하고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주의적 사고와 영상 산업과 인터넷 기술의 발달 역시 정욕의 문화가 만연하는데 일조했다. 오늘의 세대는 로고스적인 이성보다 에로스적인 감성을 더 중시하며,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스토아주의보다는 ‘너 자신을 즐기라’는 에피큐리아니즘에 훨씬 큰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적 고인물
성욕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성을 만드시면서 성적 욕망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성욕은 인간 창조의 독특성에서 말미암는 신비롭고 독특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구별된 두 사람으로 창조하셨다. (창 1:27) 사람은 구별된 주 돈재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피조물이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 협의하고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듯이, 그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역시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 관계 맺으며 살도록 설계되었다. 즉 사람은 고립된 개인으로가 아니라 남녀가 상호적 관계와 친밀한 연합 안에서 살도록 지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전인적 하나됨을 이루도록 성을 고안하셨다. 따라서 이간은 성을 통해 상대방뿐 아니라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도 알아갈 수 있다.
상대의 몸을 이용하기
정욕은 성욕과는 성격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과도한 성적 욕망’으로 정의되는 정욕은 왜곡된 성욕이라 할 수 있다. 상대를 원하지만 단지 자신의 쾌락만을 목적으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다. 정욕이라는 단어는 본래 ‘사치’ 혹은 ‘탕진’을 의미하는 라틴어 ‘룩수리아’에서 왔는데 자신을 위해 상대의 육체와 감정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는 성적 욕망을 가리킨다. 정욕은 지극히 이기적인 성욕인 것이다. (마 5:28) 예수님은 자기 욕망을 채우거나 자극하려는 마음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것, 즉 정욕을 강하게 정죄하셨다. 정욕은 상대의 인격과 삶, 내면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상대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대상으로 취급한다. 정욕은 상대방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인격적 대상인 ‘너’가 아니라 비인격적 ‘그것’으로 대하는 것이다. 결국 정욕은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허락하신 성욕을 왜곡하는 것이다. 사랑이 상대에 관심이 있다면, 정욕은 짜릿한 욕구 충족에 더 관심이 있다. 사랑은 상대와의 언약에 신실하고자 하는 반면, 정욕은 삶을 나누고 돌보아주려는 마음이 없다. 사랑은 서로에게 숨김이 없고 발가벗어도 부끄럽지 않지만. 정욕은 중요한 것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 사랑은 인격적 교감으로 따듯해지지만, 정욕은 외롭고 고독하다. 사랑은 미래를 위해 떄로 절제하지만, 정욕은 현재 감정과 만족에만 골몰한다. 따라서 정욕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는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쾌락이 충족되지 않으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사랑에는 신실하고 지속적인 헌신이 동반되지만 정욕에는 순간의 희열과 만족만 있을 뿐이다. 정욕은 육체적 쾌락과 정서적 애틋함과 짜릿함을 추구하고 서로 교환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자기만족이다. 오직 그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찾고 이용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욕이 자기만족을 위해 상대를 즐기는 것이라면, 사랑은 하나님을 위해 상대를 즐기는 것이고 말했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법에 자기 욕망을 종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정욕, 그 강렬한 흡인력
구약성경에 정욕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갑’은 ‘숨’ 혹은 ‘자연의 기운’이라는 어원에서 왔다. 또한 신약 성경에는 ‘에피투미아’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 역시 공기와 물 등의 파괴적인 흐름, 강한 생체적인 힘, 충동, 욕망 등을 뜻하는 어원을 가지며, 정욕의 의미로도 쓰였다. 즉 정욕은 아주 강한 육체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 이야기, 그리고 암논과 다말 이야기는 엄청난 기운과 충동을 가진 정욕의 이와 같은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정욕에 사로잡히면 이성의 제재를 거부하게 되며, 심지어 어떤 결과가 드러날지 예상하면서도 무모하게 정욕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이처럼 정욕은 왠만해서는 제어하기 힘든 강렬한 힘으로 인간을 덮쳐 오지만, 그럼에도 의지가 분명히 개입된다는 점에서 결코 핑계를 댈 수 없는 심각한 죄다.
육체적이자 영적인 죄
정욕은 육체에 속한 죄인 것 같지만 근원적으로는 마음과 정신에서 말미암는 죄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정욕을 육체의 죄인 동시에 영적인 죄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욕은 육체의 약함보다 의지의 약함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정욕의 습관을 버리는 데 주저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는 의미자 부족하기 떄문이라고 보았다. 카시아누스 역시 정욕이 육체에 속한 죄이지만 영혼의 죄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산상수훈에서 살인, 간음 및 음란은 ‘마음에서’온다고 하신 말씀 (마 15:19)을 인용하면서, 정욕은 마음 즉 의지에 따라 생기고 그것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마 5:28)이라는 말씀 역시, 정욕이 마음에서 시작됨을 뜻하신 것이라 해석했다. 그는 이런 해석을 제시하며 정욕과 싸우려면 근원적인 마음의 문제를 점검해야 한다고 가르쳤닥.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솔로몬의 잠언을 깊이 새길 것을 강조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정욕의 원인들 : 최상 정욕과 바닥 정욕
정욕은 나태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 나태해지면 정욕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커진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다윗이 밧세바를 불러들인 사건이다. 세이어즈는 인생이 최상의 상태에 오를 때와 바닥으로 내려갈 때 모두 정욕에 취약하다고 분석했다. 우선 사람이 성취를 통해 정점에 이를 때 정욕에 빠지기 쉬운 이유는 교만과 방자함으로 쉽게 유혹받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뚜렷한 삶의 목표와 활력이 없을 때, 곧 삶이 파도의 바닥에 있는 상태에 있을 떄가 정욕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고 빠져나오기도 힘들다고 보았다.
짧은 쾌락과 불행한 결말
정욕의 열매는 의외로 쓰다. 그것은 처음의 기대를 꺠뜨리고 냉엄하고 차디찬 결과를 낳는다. 사람들은 이것이 초래할 결과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한 채 잠깐의 달콤함에 취해 정욕에 빠져들고, 결국 쓰라린 배신을 당한다. (잠 5:3-4) 잠언 기자는 이런 관계를 맺는 사람은 마치 숯불을 밟으면서 그을리거나 데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잠 6:28) 정욕을 좇으면 결국 화상을 입기 마련이다. 또한 음햄하는 자는 마치 새가 생명을 잃을 줄도 모르고 그물로 들어가듯(잠 7:23) 비참한 결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불을 향해 뛰어드는 것과 같다. (예> 암논과 다말 - 다윗과 밧세바 : 하나님의 심판) 대개 정욕에 빠지는 이들은 패가망신하고 가산도 탕진하게 마련이다. 정욕은 본인과 가족에게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입히고 공동체에도 큰 피해를 주게 된다. 하지만 신자들이 정욕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깊이 새겨 두어야 할 사실은 정욕이 성령이 거하시는 몸을 더럽혀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는 치명적인 죄악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음행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엄중히 경고한다. (갈 5:19,21 ; 고전 6:9-10) 우리는 정욕에 몸을 내맡기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간혹 이런 실 수 이후에도 회개하고 이전보다 더 크게 쓰임받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궁극적 대안 : 근원적 쾌락
도로시 세이어즈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정작 포르노와 음란한 것들에 더 탐닉하고 더욱 큰 지루함과 싫증을 느끼는 원인을, 참된 즐거움을 차단하는 영적 빈곤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정욕이라는 문제에 대해 내놓는 그 어떤 표면적 대응책도 성공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사람들은 인생에서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없을 때 그 허전함을 달래고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정욕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성적으로 문란한 젊은 시절을 보내다 회심한 후 정욕에서 벗어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는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회심 이후 계속 독신으로 살았는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그에게 훨씬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영적인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육체적 쾌락에 빠질 수 밖에 없고, 육체적 쾌락을 아무리 많이 즐기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근원적 기쁨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허저하고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중요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성은 결코 하나님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근원적인 쾌락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오며, 정욕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잃어 버린 인간이 선택한 왜곡된 쾌락의 길일 뿐이다.
(칠죄종)
음욕
한국교회는 불과 일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청소년들이나 청년들 상대로 특강이나 수련회 같은 곳에서 ‘혼전 순결 서약’ 같은 것을 했습니다. 결혼 전까지는 성관계를 하지 않고 상대방 배우자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순결한 몸을 지키겠다는 약속입니다. 대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교회들이 성적 순결을 강조합니다. 한국교회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더더욱 성에 대해 보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에 대한 보수적 관점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관점을 강조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유교적 가부장제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를 못했고, 약자들에게 가혹한 태도를 보이는 사회적 성향이 강하다는 겁니다. 한국 교회 역시 이러한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 현장의 성에 관한 이해들을 보면, 한국 교회는 기본적으로 성문제를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첫째, 성관계에 대한 부정적 시각, 둘째, 세상의 문화를 기본적으로 ‘음란’한 것으로 이해, 셋째, 성에 관한 담론 자체를 꺼려 하고 감추려는 경향, 넷째, 여성에게 가혹한 성적 잣대를 적용하고 여성 자체를 성적 대상화하는 경향 등입니다. 물론 가정과 결혼을 중요시하고 특히 결혼과 관련하여 배우자 간의 약속을 중요시하는 차원에서 무분별한 성관계를 금지하고 제한하는 성경의 관점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날 한국 교회 현장의 성에 대한 왜곡된 관점과 기준, 그리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적용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위험합니다. 또한 한국 교회는 성에 관한 문제나 왜곡된 성욕 탓에 일어나는 문제를 성경과 상관없거나 심지어는 성경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대처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를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칠죄종에서 음욕을 의미하는 라틴어 Luxuria는 영어로 lust의 의미와 유사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성적인 욕구를 뜻합니다. 그런데 칠죄종에서 언급하는 ‘음욕’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실제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음욕은 단순히 성적인 욕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까지를 의미하며, 성적인 욕구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무분별하게 타인에게 표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음욕’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기 때문에 위헙합니다. 칠죄종 ‘음욕’은 결국 개인은 물론 가정과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죄를 의미합니다.
다만 성적 충동과 음욕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성적 욕구는 식욕, 수면욕 등과 같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성적 욕구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성적 욕구를 어떻게 절제하고 통제하는가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성에 관한 관점과 기준도 자신들의 역사, 사회적 배경인 로마 제국의 문화와 로마 제국이 형성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기 교회가 생각했던 음욕의 문제는 단순한 성욕에 관한 내용 이상의 의미가 있는 개념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속으로 ㅣ 고린도전서의 배경과 특징
주후 1세기 고린도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는 북쪽 그리스 본토와 남쪽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병목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북쪽으로는 레카이온 항구가, 남쪽으로는 겐그레아 항구가 있어 그리스 남북의 무역 및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로 들어가거나 나가는 무역과 교통량의 대부분은 고린도를 경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린도는 농사나 유목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의 생업보다는 무역과 사업으로 부유해졌고, 그리고 이들을 위한 다양한 접객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는 지역 특성상 다양한 인종들이 혼재한 도시였으며, 인구의 25%가 노예로 구성된 빈부 격차가 극심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주로 로마인들로 구성된 부유층은 매우 향락적이고 문란한 쾌락들을 즐겼습니다. 당시 문헌들을 참고해보면, ‘고린도 사람처럼 산다.’는 말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말과 거의 동일시 되었고, 고린도의 젊은 여자들은 창기와 유사한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에는 다양한 인종의 구성 때문에 수많은 종교들이 혼재해 있었고,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신전들은 다양한 문화적 행사 및 자극적인 이벤트를 많이 열었습니다. 이런 많은 신들 가운데 고린도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주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신전을 통해 각종 성적 환락과 음향이 ‘사랑’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둔갑하여 아름다운 행위로 포장되어 사람등게데 권장되곤 했습니다. 특히 아프로디테 여신과 관련된 축제들이 있는 경우 신전 사제들의 매춘 행위가 공식적으로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고린도 지역 사람들에게 ‘음욕’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되는 감정이었으며 신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다른 죄의식 없이 다양한 성적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성적으로 문란한 음행 사건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이에 대해 교회의 즉각적인 치리를 요구하며 엄중하게 책망했습니다. 또한 교회가 금해야 할 순결의 가치에 대한 교훈을 길고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전서는 교회 속으로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는 세상의 영향력 때문에 분열되고 변질되는 교회를 다시금 올바로 세우기 위한 서신서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구성원들은 당시 고린도 사회의 구성원이 그랬듯이 다수의 빈민층으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이방 민족의 종교와 문화적 사상들이 혼재한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교회 내에는 다양한 가치와 풍습들을 가지고 있느 그룹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각각 교회에 영향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회들의 상황과 유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하는 정체성을 어떤 문화나 가치보다도 우선하며, 어떤 문화나 가치라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보다 우선시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에게 당시 고린도 지역의 문화와 풍습으로 말미암아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음행의 문제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납할 수 없는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교회는 결혼과 가정을 깨뜨리는 어떤 형태의 범죄도 결코 허용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매우 엄중하고 문책했고, 이에 대해 교회의 빠른 치리를 요구하는 한편, 재발 방지를 위해 성도들에게 여러 권면들을 합니다. 교회의 치리는 기본적으로 죄를 지은 이들을 정죄하고 벌을 주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죄를 지은 이를 올바른 길로 돌이켜 결국 그를 회복시키고 다시 교회 공동체의 온전한 성도로 복귀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례적으로 교회 내에서 음행한 사람을 아예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음해하고 피해를 입혔던 이들에게도 관용을 베풀고, 그들을 정죄하려는 이들에게 용납해 줄 것을 말했던 사도 바울의 모습을 생각할 때, 매우 엄격한 판결입니다. 이는 그만큼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음행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본문을 따라 생각해보기ㅣ 음욕과 순결의 의미
고린도지역의 아프로디테 숭배로 말미암은 그곳 사람들의 난잡한 성 윤리는 현대는 물론 당대에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문란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성범죄,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일과 이에 대한 과시는 고린도교회 역시 이런 성적 문란함에 심각하게 물들어 있다는 정황을 보여 줍니다. 욕망이 제약 없는 실제적 행동으로 이어지게 될 때 하나님 나라의 근간 중 하나인 가정과 결혼 제도가 붕괴되고, 이는 결국 공동체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게 됩니다. 음향의 쾌락은 일종의 중독처럼 그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 - 공동체 전체를 파멸시킵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게 준 사도 바울의 경책과 권면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성경적 성적 윤리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 이러한 중대한 성범죄가 일어났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일이 버젓이 밝혀졌음에도 범죄를 저지른 이가 부끄러워하거나 회개하기는커녕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교회는 이런 범죄가 드러났음에도 오히려 그게 뭐 어떠냐고 아무런 문제의식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평균 성 윤리가 성경의 기준은 고사하고 다른 이방인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통탄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탄식과 분노를 오늘 날 한국교회 역시 심각하고 무겁게 받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못지 않게 한국교회 내에서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성범죄가 숱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문제가 터져도 그 교회 지도자나 성도가 힘과 권력, 돈이 있으면 그냥 무마되거나, 노회아 총회에서도 치리는 커녕 무죄 판결로 무마해주거나, 아예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각성과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한느 부분입니다.
정말 제대로 된 복음을 듣고 회심했다면, 그들의 삶 역시 성령님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 백성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정상이자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은 성도는 커녕 이방인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열하고 음란한 모습들이었습니다. 이는 훌륭한 신학과 올바른 지도자들이 교회에 무척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것만으로는 교회가 온전케 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음행의 문제는 음욕이 어떤 것인지, 어떤 파급력을 교회에 미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음욕을 다스리지 못하고 탐닉하는 사람이 생겼고, 이를 제대로 치리하지 못하자 교회 전체의 타락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고전 5:6-8)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타락시켰던 음행을 ‘누룩’에 비유합니다. 사도바울은 음욕이 교회 성도들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는 전염병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묵은 누룩’, 즉 음욕을 따르던 과거의 악한 풍습 자체를 버리고, 성실함과 진실함이라는 ‘새로운 누룩’으로 삶의 기반 자체를 바구라고 권면합니다. 음욕을 따르는 음행을 버리기 위해 성실과 진실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의 음행 문제는 단순한 성범죄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죄를 저지른 이가 보여 주었던 교만한 모습과 과시적 태도가 이 문제의 본질인 성욕 이상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 역시 음행 문제를 성적 일탈로만 취급하지 않고 더 근본적인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음행과 그 원인이 된 음욕의 본질을 들여야 보면, 그것들은 당시의 사회 권력 문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로마 제국 영향 아래 있던 당시 상황에서 성적 피해자들은 대부분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여성, 아동) 여성들의 상업적 성매매ㅐ와 동성애들이 죄악이라는 인식 없이 부유층을 중심으로 지역 전체에서 행해졌습니다. 이는 성범죄의 본질인 자기 육체의 쾌락을 만족 시키기 위해 자신보다 약자신 이를 힘으로든, 돈으로든, 협박으로든, 아니면 세뇌로든 굴복시켜서 결국 자신을 위한 성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구너력에 의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대상은 주로 사회적 신분이 낮고 힘이 없어 저항력이 낮은 여성, 아동이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어떤 형태의 성범죄라도 묵인해서는 안되며, 이는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올바른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성욕을 없애라고 하지 않고, 혹은 타락한 성 문화를 근절시키라고도 하지 않고, 그 대신 성도들의 마음 근간 자체를 바꾸라고 말합니다. 또한 성실과 진실한 공동체, 즉 타인, 특히 약자와 소수자들을 자기 욕구를 만족시키는 상대고 보지 않도록 서로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 참되고 올바름을 지향하는 공동체가 될 것을 권면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결’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초기 교회가 추구했던 ‘순결’은 단순히 결혼 전까지 성관계를 하지 않거나 성적으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적 타락의 성향과 이에 따른 결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 (거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 5:11) 또한 세상의 성적 타락을 교회가 정죄하고 심판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러한 사조에 섞이지 않고, 이를 교회 내에 용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공동체가 세상과는 달리 서로에게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곳(성실과 진실)임을 증명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는 성도 개인의 노력은 물론 교회 공동체 전체의 분명한 인식과 교회 내에 일어난 성범죄에 대한 단호한 대처가 함께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전인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약자, 결혼, 가정의 보호), 동시에 신실하고 진실한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쾌락을 추구하겠지만, 그 속에서도 교회는 누구에게나 믿을 수 있고 약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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