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제2: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레위기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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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레위기5:1-6
1.속죄제1: 더러움을 씻는 정결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한 번 더 속죄제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원래 계획은 수요예배 설교 때마다 레위기 5가지 제사를 한 주에 하나씩 살펴보려고 했는데 속죄제에서 시간분배가 잘 못 되어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한 번 더, 속죄제에 대한 말씀을 마저 상고 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은 레위기 4장 말씀을 중심으로, 속죄제를 왜 드려야 하며, 어떻게 드리는지를 정리했습니다.
먼저, 속죄제는 왜 드려야 할까요? 속죄제에 사용된 속죄의 원어적 의미는 ‘정결, 정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결제’로 불린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정결제’라는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속죄제는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고, 제사법을 알려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제사를 통해 백성들과 만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자들은, 누구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번제와 소제, 화목제로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아무나 아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명을 어긴 사람, 즉 죄를 지은 사람은 그 더러운 상태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 상태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죄인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저들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 속죄제를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속죄제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앞에 3개의 제사]와 [속죄제]는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첫째, 번제와 소제, 화목제는 제물을 태우는 것에 집중했다면, 속죄제는 제물의 피에 더 주목합니다. 왜입니까?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며,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번제와 소제, 화목제는 희생제물 중심으로 차례대로 소개했다면, 속죄제는 제물을 드리는 헌제자 중심으로 차례대로 소개합니다. 헌제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앞에 3개의 제사는 소, 양이나 염소, 비둘기 순으로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속죄제는 가장 먼저 <제사장>이 나오고, 그다음으로 <회중>, <족장>, <평민>이 뒤를 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각각의 헌제자들이 드리는 제물과 그 제물의 피를 뿌리고, 바르는 장소 역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만일 제사장이 범죄하면 흠 없는 수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의 피를 회막에 가지고 들어가서 먼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 짓는 휘장에 일곱 번 뿌립니다. 다음으로 성소 안에 있는 향단 뿔들에 그 피를 바르고, 남은 피 전부는 성소 밖, 번제단 밑에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평민이 범죄하면 어떨까요? 흠 없는 암염소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 암염소의 피는 제사장 때와는 달리 성막 안에 있는 향단 뿔이 아닌,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남은 피 전부는 그 번제단 밑에 쏟아부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헌제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어떤 제물로, 어디에 피를 뿌리고 발라야 하는지 차이를 두셨을까요?
죄는 사람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그 죄인이 머무는 곳까지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죄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함께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출애굽기 금송아지 사건>을 잘 아실 겁니다. 모세가 율법과 계명을 받기 위해 산 위에 올라간 사이,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이 애굽 땅에서 백성들을 인도해 낸 신이라 부르며 그 앞에서 춤추며 뛰놀았습니다. 하나님은 산 위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며, 너희는 나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다른 신을 만들어 거기에 온 정성과 마음을 쏟아부은 것입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모세는 돌판을 깨뜨렸고, 죄 때문에 레위 자손의 손에 의해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죄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절부터 3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출33:1-3)
1절과 2절만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실 것처럼 보이지만, 3절을 읽다 보면 식은땀이 흐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들과 함께 올라가다가는 모두 진멸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은 임재하지 않으십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가나안 정탐 사건> 뒤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의 징계가 내려졌는데도 불구하고, 뒤늦게 정복하려고 올라갔다가 결국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됩니다. 모세가 뒤늦게 올라가는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경고했는지 보십시오. 민수기 14장 4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민14:42)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이 성소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대표해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막중한 임무를 맡은 제사장이 죄를 짓고, 성소에 들어가 그곳을 더럽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을 막고, 백성들과의 만남을 가로막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평민이 똑같은 죄를 지었다 해도,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사역의 중함이 남다르고, 영향력 역시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헌제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속죄제의 제물이 달라지고, 피를 뿌리고 바르는 곳도 달라지는 이유입니다.
2.죄를 간과하지 말라.
이 속죄제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무심코 지은 죄를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속죄제에서 제물의 피를 뿌리고, 바르고, 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소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소가 깨끗해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그래야만 하나님이 성소 가운데 임재하시며, 그곳에서 백성들을 만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 역시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평강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죄를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과 1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고전3:16-1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인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게 살라고 당부합니다. 만약 성전인 우리가 죄로 간과해서 더럽혀지면 어떻게 될까요? 금송아지 사건처럼, 가나안 정탐사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실까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죄로 더럽혀지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근심하십니다. 슬퍼하십니다.
요즘 같은 여름철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 또 기분 좋게 입을 수 있습니까? 땀을 한 바가지 흘린 셔츠를 내일 또 입는다고 생각해봅시오. 얼마나 찝찝합니까? 집에 오자마자 갈아입어야죠. 영적인 옷도 매 한가지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은 새 사람이라는 옷을 매일 매일 갈아입던 사람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이라는 옷을 다시 꺼내 입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죄로 얼룩진 그 옷을 다시 꺼내 입은 우리를 바라보는 성령 하나님께서 근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우리가 아내를 기분 좋게 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선은 아내가 싫어하는 옷을 입지 말아야 합니다. 제 딴에는 멋있다고 생각해서 산 카키색 야상이 있는데, 그 옷을 입을 때마다 북한에 있는 사람이 생각난다고 입지 말라고 눈치를 줍니다.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래서 아내가 싫어하는 옷을 입지 않으면 무난히 넘어갑니다. 그런데 아내를 웃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내가 사준 옷을 입으면 됩니다. 제가 스타일에 고집이 있어서 이제는 옷도 잘 안 사주는데, 어쩌다 아내가 사준 셔츠나 남방을 입으면 감탄사가 나옵니다. 그래 그거지.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안 입느냐며 나무라면서, 얼굴은 웃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이런 마음이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새 사람으로 살아가면 격려하면서 응원하시겠지만, 또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가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근심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죄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할까요? 에베소서 4장 말씀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25절부터 29절까지 말씀을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4:25-29)
이웃에게 참된 것을 말해야 하는데, 거짓으로 속일 때 성령님이 근심하십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폭력을 행사하고, 욕하며,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수군수군될 때 성령님이 근심하십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 그 틈사이로 자꾸만 사단이 공격해올 때, 성령님은 근심하십니다. 내 손으로 수고하여 어려운 사람을 돕겠노라 마음먹었는데 다시 남의 것을 도둑질했을 때, 성령님은 근심하십니다. 선한 말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며 덕을 세워야 하는데, 전혀 덕이 되지 않는 더러운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면 성령님은 근심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눈을 떠서, 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기까지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처럼, 죄를 지었다는 부끄러움도 없이 그냥 하루를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 죄가 과연 하나님의 성전인 나를 더럽히면 얼마나 더럽힐 수 있겠어 생각하며 간과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작게 여기는 그 죄가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원흉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5:23-24)
형제와 싸운 채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다면, 돌아가서 먼저 화해하고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아무리 좋은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 해도, 죄로 더럽혀진 성도들과 거룩하신 하나님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도 않으십니다. 가식적인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봐야 그것은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이 죄를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서 말입니다.
3.더러운 죄를 씻어내라
히브리서 9장 1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1-14)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짐승이 아닌 스스로가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짐승의 피는 매번, 매년마다 흘려야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단 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짐승의 피를 뿌리고, 바르며, 부음으로써 성소가 깨끗하게 된 것처럼,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의 보혈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믿는 자들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죽은 양심을 살리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셔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죄 용서함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는 날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합니다. 때로는 죄의 세력에 굴복당해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았음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다같이 요한일서 말씀을 읽어볼까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17세기 스코틀랜드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보스턴은 회개를 미루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젊은이들이여 왜 회개를 미루는가? 왜 다루기도 어렵고 길들이기도 힘든 야생 나귀 새끼처럼 행동하는가? 아마도 회개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아. 지금 짊어진 죄의 빚이 적어서 하나님의 정의의 빚을 더 많이 짊어지려는 것인가? 처음부터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사실, 곧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으면 정죄를 면할 수 없는 상태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회개하지 않으면 더 이상 죄를 보태지 않더라도 이미 멸망하기에 충분한 죄를 짊어지고 있는 상태임을 모르는가?”
토마스 보스턴은 지금 바로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가 쌓이고 쌓일 것이며,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다고 해도 핑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회개를 예배로 들어가기 전, 하나의 순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회개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했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고 까지 말합니다. 그만큼 회개를 통해 죄를 멀리하며, 주인의 손에 쓰임 받는 깨끗한 그릇이 되고자 애를 쓴 것입니다.
4.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레위기 5장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죄도 숨기지 말고 씻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죄입니까? 우리 양심의 죄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무엇이 우리의 양심을 찌릅니까? 예를 들어, 목격자가 없는 어떤 사건사고와 관련해, 사고현장에서 목격자를 찾는다는 현수막을 보았는데 내가 유일한 목격자인 것입니다. 내가 본 것과 알고 있는 것을 진술만하면 문제가 해결 되는데 괜히 사건에 휘말리기 싫어서 모른척한다면 그 또한 자기의 죄를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2절은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부정한 것들에 닿기만 해도 더럽혀진 것으로 여기십니다. 특별히 죽은 사체들은 더합니다.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 부정한 가축의 사체, 부정한 곤충의 사체를 만졌으면 혹 모르고 만졌다 하더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 허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정한 짐승은 먹을 수 있으나, 부정한 짐승은 먹을 수 없습니다. 가축이나 곤충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부정하다면 더 가까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곤충이라는 것이 죽어서 나뭇잎에 붙어 있을 수도 있고, 우연히 닿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 역시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3절 역시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번에는 사체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부정에 닿았을 때입니다. 남성의 몽정이나 남녀의 성관계 후를 가리킵니다. 이 것 또한 당사자만 알 수 있고, 두 사람의 은밀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역시도 깨달았다면 허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4절은 또 어떻습니까? 경솔한 약속, 서원 역시도 입술로 맹세했다가 지키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역시 허물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1절부터 4절까지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죄와 허물이 있는데, 내 양심이 그것을 유죄로 선언했다면 그 또한 죄로 더럽혀진 것이기 때문에 속죄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제를 드리기에 앞서, 무엇을 명령하십니까? 5절 말씀입니다.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레위기5:5) 4장에서 살펴보았던 제사장과 회중, 족장과 평민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에는 이런 언급이 없었는데, 5장에서는 1절부터 4절까지에 기록된 허물 중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어느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숨기지 말고 그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양 떼의 암컷 어린양을 속죄 제물로 드려, 피를 뿌리고 바르며, 부어서 더러움을 씻어내라 말씀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더럽혀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속죄제를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소에 제물의 피를 뿌리고, 바르며, 부음으로써 그곳을 정결하게 하시고, 헌제자들의 죄 역시 사하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숨길 수 있는 은밀한 죄까지도 남김없이 들추어내시며, 우리의 잘못을 자복하고, 속죄제로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짐승의 피를 흘리는 속죄제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에 담겨있는 영적인 의미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바로 성령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인 우리가 죄로 더럽혀지면 성령하나님은 근심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육체의 정욕을 따를수록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를 씻어내야 합니다. 죄 사함을 위한 피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친히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양심도 살려내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주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기 위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죄들을 낱낱이 아뢰이며, 잘못하였노라 자복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우리에게 더하여 질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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