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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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통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곤란한 상황을 연출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맞지만 지금까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따르면 이 여인을 분명히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돌로 치지도 않았고,
그저 용서해줘야 한다며 풀어주지도 않았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상황을 종결시켰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은 사건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돌로 치라고 하는 사람들, 내가 돌로 쳐야하는 상황, 그리고 돌로 친 이후의 상황
모두 어둠이며 죽음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저항하는 것, 돌로 치는 것을 저지하는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도 모두 어둠이며 죽음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하는 순간 그 시간과 공간에 빛이 비추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생명의 빛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늘 본문은 이전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전제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모른다.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우리가 습득하는 지식과 경험을 통해 이해되는데 우리가 배우는 이론들은 복잡한 세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한때 기독교에서 파생되어 온 많은 이론들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규칙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 이론들은 일부 권력자들에 의해 착취와 억압 그리고 불평등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에 생겨나게 된 고등 이론들은 사람들을 계몽시켰다고 주장한다. 고등 이론들은 서구 사회(기독교)의 억압적 구조를 폭로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 페미니즘 이론, 비판적 인종 이론, 퀴어 이론 등의 이론들 때문에 비판적 사고는 늘었지만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했냐는 질문에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우리 삶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게 보이지만 실상 그것을 우리가 누릴 수 없는 괴로움에 더 힘겨워 할 뿐이다.
2.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습득해 온 내용들은 어느새 우리의 랜즈가 되어 그것들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경향이라는 것이 생겨버렸다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 마주보는 그림]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검은 배경에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것’으로 볼 수 있고, ‘흰 배경에 검정 꽃 병으로 볼 수도 있다.’ ‘문화’라는 것은 일종의 경험으로 어떤 무리들은 이것을 흰색 중심으로 보도록 경험되고, 어떤 무리는 검정색을 중심으로 보도록 교육되었다.
과거에 종교적 사상으로는 흰색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무조건 정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지금 인간의 지성은 이것을 어느 한 쪽으로 보지 않고,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데 까지 진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코드는 하루에도 수없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고, 그때마다 둘 다 맞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때마다 적절하게 어느 때는 마주보는 사람이 맞고, 어느 때는 꽃병이 맞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음성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리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마치 피아노 건반에 있는 흰색과 검정색의 건반의 배열을 놓고,
언제 어떤 색의 건반을 쳐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대로 치는 행위를 연주라고 할 수 없고, 그것을 아름답게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또 한쪽으로 치우친 연주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악보에 따라서 때로는 검정색 때로는 흰색의 건반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악보를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주일에 일을 해야 하나? 쉬어야 하나?
대통령 후보 중 1번을 찍어야 하나? 2번을 찍어야 하나?
아픈 데 병원에 가야 하나? 기도해야 하나?
간음한 여인을 고발해야 하나? 위로해야 하나?
안식일을 지켜야 하나? 아픈 사람을 고쳐줘야 하나?
이런 질문들은 모두 위의 그림과 같다. 이것을 어느 한쪽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의한 판단이지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예수님께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문화에서 두 진영이나 입장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경우, 성경은 종종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고 그 둘보다 풍부한 것을 제시한다. 어느 진영에서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절묘한 해결책인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광장으로 데리고 나왔을 때, 그녀를 돌로 치거나 그녀를 보호해 주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 둘을 뛰어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상황을 해결하신다.
기독교의 진리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또 양쪽으로 섞어서 흐려지지도 않는다.
근본적으로 보수적이고, 보수적으로 급진적이며, 전통적으로 진보적이고, 진취적으로 전통적이며, 냉정하게 낙관적이고, 낙관적으로 냉정할 것이다.
2.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습득해 온 내용들은 어느새 우리의 랜즈가 되어 그것들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경향이라는 것이 생겨버렸다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도 못했다.
이제 이 랜즈를 벗어버리고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그것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다는 뜻이다.
이제 바뀐 랜즈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달리보이게 된다.
그리고 나의 자아와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따르는 양무리가 된다.
C.S 루이스
“난 해가 떴다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그것은 내가 해를 보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해를 통해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예배 전에 본문이라도 읽어보라.
북스터디 분량의 책은 읽어보라.
찬양의 가사를 한 번 묵상해보라.
그리고 기도하라.
이렇게 했을 때
우리의 인생 위에 이야기는 더 넓고 깊은 언어의 새로운 이야기로 덮어쓰기가 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진정한 이야기의 맥락에서 사는 삶은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을 충족시키고, 세계와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게 해 준다.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