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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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을 고치시다

우리는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유대인을 보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여기며 죄인을 정죄하는 무리에게 ‘너희도 죄인이야’라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생명의 빛’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무리가 어둠 가운데 있음을 알려주고, 빛을 얻으라고 했다.
그 어둠은 무지를 나타내며, 그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알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 무지는 죽음을 의미하며,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생명을 얻게 되기를 원하셨다.
이제 이 가르침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신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보셨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육체적으로 맹인인 사람과 영적으로 맹인인 사람이 꼭 같다.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자들이나 영적으로 장애를 가진 자들도 같은 처지다.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이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같다.
예수님이 그 맹인을 측은하게 바라보시자 그 눈길을 따라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다.’
제자들도 자신들이 판단하기를 이 맹인을 이미 죄인으로 단정하고 있다.
제자들이 자라온 환경 그리고 그 환경 가운데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이 이미 그들에게 강력한 안경이 되어,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적대심이 강한 것이다. 자신들은 의인이고 약자들은 이미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런 낙인은 우리 나라에도 그 예가 있다. ‘화냥년’이라는 말이있는데 이는 정조를 지키지 않은 여인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일화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병자년’에 청나라 군사들이 조선을 침공했다.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이때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결국 성을 둘러 싼 청나라 군대에 패배하게 되어, 조선의 임금은 청나라 왕 앞에서 머리를 바닥에 치며 절하는 치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에 패한 조선은 많은 대가를 청나라에 치르게 되는데 이때 조선의 거의 모든 젊은 여성이 청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여인들은 청나라 군대의 성적인 노예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자유의 몸이 된 여인들은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돌아오게 되었지만
고향과 가족들은 환영하기는 커녕 몸이 더렵혀진 여인이 자결하지 않고 뻔뻔하게 돌아왔다며 그녀들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에 패배한 이유로 끌려가 수많은 치욕을 당한 여인들이 또 한번 큰 아픔을 겪게 되는 상황이다. 이 비난이 얼마나 거샜던지 마을마다 목을 매 자결한 여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으로 ‘환향녀’라고 불렀다가 그녀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화냥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정조를 지키지 않는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는 학교에도 못가고, 겸상도 하지 못하며, 자기 의지로 배우자를 결정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자유로워진 것은 불과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한 서양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이런 의식의 변화도 생기게 된 것이다.
John 9:3 NKRV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우리 주변에 안타까운 일을 겪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 말이나 판단을 삼가하고, 예수님께 지혜를 구하자.
예수님은 그를 향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침과 흙을 섞어서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이라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씻었더니 눈이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못알아봤으며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5장에서 38년된 병자는 자기를 고쳐준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고발했다.
그러나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는 조금 다르게 행동한다. 우리는 이 부분을 통하여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5장의 38년된 병자는 병이 고쳐진 이후로 자기 살 길을 찾아 유대인에게 예수를 팔고,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맹인은 조금 달랐다.
John 9:11–12 NKRV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처음에는 예수님이 ‘그 사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에서 믿는 대상,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정도의 인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디있는지 어떻게 만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잘못된 안경을 쓰고 사는 이웃들은 평생 맹인으로 살았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되자 그것을 축하해주기는 커녕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에게 찾아갑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생기려 할 때, 신앙생활을 잘 해보려고 했을 때 이렇게 주변에서 우리는 시험하고, 유혹하며, 괴롭히고, 넘어뜨리려 합니다. 38년된 병자는 저항 한 번 해보지 않고 너무 쉽게 믿음을 져버렸습니다. 언제든 자기가 만나고 싶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은 아마도 평생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바리새인들 앞에서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논쟁하는 것을 보았을 때 무언가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묻는 대답에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나 랍비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이지만 최소한의 존중의 의미입니다. ‘그 사람’보다는 훨씬 가까워진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John 9:17 NKRV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이제 바리새인들은 맹인의 부모를 찾아갑니다. 이들은 정말로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인들의 행동까지도 오히려 예수님이 정말로 맹인을 눈뜨게 한 것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 행위가 될 줄 알지 못했습니다.
맹인의 부모는 자신들을 추궁하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힘이 너무나 막강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은 ‘출교’를 당합니다.
여기서 ‘출교’란 사회적 고립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이 사회에서 ‘화냥년’과 같은 처지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 맹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자신을 찾아와 예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에게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이 ‘이상함’을 감지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비록 앞을 보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감각이 깨어있습니까??
John 9:31–33 NKRV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너무나 정확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세요.
이제 이 사람은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 사람’에서 ‘선지자’로 그리고 ‘선지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변합니다.
이제 관계의 변화가 단순히 타인과 나의 관계에서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과 나의 관계로 발전했다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초월적인 대상의 영향을 받는 자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이 말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교회’를 다니게 하신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고 했기에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경험한다.
처음에는 ‘그 교회’였다가 이후에 나에게 좋은 가르침이나 영향을 주는 장소로 기억되지만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처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만나 주십니다.
이제 맹인의 호칭이 또 한번 달라졌습니다. ‘주여’입니다.
이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인정하는 말로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말이며,
내가 상대방에서 순종하겠다는 의미의 고백이다.
John 9:38 NKRV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이것이 진정한 예배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경외함의 표현이다. 예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며 경외의 대상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못보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을 맹인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맹인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스스로 맹인이라고 여기면 죄가 없겠지만 본다고 생각하면 죄가 그대로 있다고 했다.
스스로 모른다고 여기며 배우려고 하면 죄사함을 받고, 안다고 여기거나 가볍게 생각하며 죄가 그대로 있다.
스스로 죽은 자라고 여기면 살게 되지만, 스스로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결국 죽게된다.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라.
서두르지 말고, 주저 앉거나 돌아서지도 말라.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반응이다.
출교를 두려워 하지 말라. 사회적 고립이나 고난을 두려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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