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이냐, 어린 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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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벨론이냐, 어린 양이냐
본문: 요한계시록 9:1-12
[서론]
최근에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당시 고난과 핍박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때문에 육체적, 사회적, 경제적 고통들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고 계시며 지켜주시는지 알려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그들처럼 고난과 핍박을 겪고 있나?
우리가 예수님때문에 어떤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나?
오히려 예수님때문에 잘먹고 잘살기를 바라고 있지 않나?
그럼 과연 편안하게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여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우상숭배와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저항하다가 고난받고 있던 자들을 위한 책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통받을때 하늘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요?
요한이 환상속에 본 바벨론의 용과 괴물, 짐승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것이 과연 첨단과학과 문화 속에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세상 속에서 무엇을 거부하고 저항하며 살아갈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대로 읽고 살아내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며 오늘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본론1]
우선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부터 크게 세가지 심판이 이어집니다.
첫번째가 7번의 인 심판이고, 두번째가 7번의 나팔 심판이고, 세번째가 7번의 대접 심판입니다.
세가지가 7번씩 심판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두 3과 7이라는 숫자가 완전하고 철저한 심판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다섯번째 나팔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장면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별이 하나 떨어집니다.
이 별은 타락한 천사인 사탄을 상징합니다.
그 사탄이 아비소스, 즉 무저갱의 문을 여는 열쇠를 받습니다.
‘무저갱’이란 끝이 없는 구멍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을 스올 또는 음부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지옥으로 개념이 확장되어 사탄이 거주하는 곳이자 갇혀있는 곳이 됩니다.
사탄이 열쇠로 무저갱, 지옥의 문을 열자 그곳에서 연기가 솟구쳐 올라 온 하늘과 해를 가립니다.
그리고 그 연기와 함께 메뚜기가 쏟아져 나와 온 땅을 덮습니다.
이 메뚜기들은 아바돈 혹은 아볼루온으로 불리는 사탄의 군대입니다.
이들은 무저갱에서 풀려나 세상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메뚜기떼를 묘사하는 표현들을 보십시오.
7절입니다.
마치 전투채비를 한 말들과 같고, 머리에는 금면류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사람얼굴 같습니다.
머리털은 여자의 머리털 같고, 이빨은 사자의 이빨같고, 쇠로 된 가슴막이도 있습니다.
꼬리는 전갈꼬리같고 치명적인 침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이 내는 날개소리는 마치 전쟁터의 수많은 말들이 끄는 병거소리와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존재가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요?
이것은 실체가 있긴 하지만 비유로 읽어야 합니다.
세상의 악을 심판하는 사탄의 추종자들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체를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너무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먼저, 무저갱, 즉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를 사탄이 누군가에게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누가 준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놀라운 점은 사탄이 결국 자기 세력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만든 세계가 바로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자기 졸개인 메뚜기떼를 통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심판합니다.
자기 파멸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사탄이 뭔가 엄청난 일을 할거 같지만 결국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세운 바벨론이 아무리 잘나가도 결국 스스로 무너질 제국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로마 제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로마 황제는 결국 신이 되어 숭배받았습니다.
로마제국이 만든 질서를 거부하면 온갖 사회, 경제적 불이익과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로마 제국의 타락한 가치관과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저항했습니다.
힘과 폭력, 억압과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로마제국, 로마황제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그들의 울부짖음과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나팔 심판으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여전히 바벨론과 그 바벨론을 추종하는 자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은 악의 세력을 사용해 그들이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하십니다.
반면에 이런 바벨론을 거부하며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이 보호하십니다.
그들은 인치심, 즉 도장이 찍혀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심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바벨론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사탄이 세워놓은 바벨론은 우리를 교묘하게 우상숭배의 길로 끌어들입니다.
돈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게 만듭니다.
땀 흘리지 않고 한방에 많은 돈을 벌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게 만듭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로또 열풍, 주식과 코인 열풍, 부동산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바벨론의 가치관이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속 바벨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많은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 깊이 여전히 바벨론의 통치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성공주의, 쾌락주의, 소비주의 모두 우리를 유혹하는 바벨론의 얼굴들 입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만든 최고의 우상인 소비주의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쌓아야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결국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택배로 받고, 그 상자를 뜯을 때 짜릿함을 느낍니다.
TV를 보니 어떤 분은 재정상황도 안좋은데 값비싼 캠핑도구를 사놓구선 2년 동안 묵혀 두었더라구요.
최근 캠핑 열풍이 부니 자신도 탑승해야 살아남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속은 것입니다.
그러한 선택의 만족은 일시적이고 가짜입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 뿐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하다가 결국 타인과 세상의 고통에는 무관심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만 끊임없이 추구할뿐 남에게는 진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폭염에 고통받는 쪽방촌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무더운 날씨에 에이컨이 없이 지냅니다.
또한 회사의 갑질과 비양심적 운영으로 고통받고 희생된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SPC사건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고통 속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바벨론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는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과연 누구를 따를 것이냐? 어린 양이냐 아니면 바벨론이냐?”
이 질문이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본론2]
그러나 이런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비하심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심판에는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메뚜기떼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시간이 5개월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기간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주님의 심판이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왜 한번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질질 끄시는 것일까요?
왜 죽지도 못하게 하시고 극심한 고통만 받게 하시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멸망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따르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타락하고 거짓된 질서에서 돌아서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무리에 합류하라는 것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수 없는 고통이란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수 없는 영적 파탄상태를 의미합니다.
육체적 고통은 오히려 나은 것일지 모릅니다.
정신적 고통, 영적 고통은 쉽게 해결할 수없는 훨씬 더 끔찍한 고통입니다.
세상은 더욱 편리해 졌지만 우리의 정신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고칠수 없는 정신적인 질병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우울증, 공황장애, 번아웃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이 닫혀 쓰레기 방에 갇혀사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죽고 싶을만큼 괴롭지만 죽을 수도 없는 사람들,
반쯤 죽은 상태로 버티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고통들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화려한 바벨론의 숨겨진 실체를 깨닫고 돌아서야 합니다.
바벨론에서 도망쳐 어린 양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의 실체가 용이며 괴물임을 드러내는 책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라고 요구하는 책이 아닙니다.
미래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예언하며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라고 주신 책이 아닙니다.
주님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던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기에 끝까지 어린 양을 붙들고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큰 박해와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여전히 바벨론의 시험과 유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소비주의, 성공주의, 쾌락주의들이 우리를 어린 양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어린 양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바벨론을 따를 것이냐?
우리의 마음과 생각, 돈과 시간은 과연 누구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냐?
우리는 이제 바벨론의 강력한 물살에 떠밀려가지 않도록 어린 양 예수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바벨론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거창한 순교가 아니라 매일의 작은 순종과 거부가 곧 바벨론을 향한 저항의 몸부림입니다.
이 세상의 바벨론은 결국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 무너질 바벨론에 인생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삶 속 모든 영역에서 그 분의 통치를 인정하며 바벨론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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