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죽고 함께 살고
Notes
Transcript
<새벽설교>
고린도후서 7:2-4
“함께 죽고 함께 살고”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2025. 7. 18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함께 죽고 함께 살고”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 6장 13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인데요. 지난 시간 본문이었던 6장 14절부터 7장 1절의 내용이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13절에서 곧바로 7장 2절로 이어서 보면, 문맥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실 6장 14절부터 7장 1절까지의 내용이 문맥상 조금 생뚱맞은 내용이에요. 13절에서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했는데, 갑자기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그러고나서 7장 2절에서 다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는 말이 나와요. 이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13절에서 마음을 넓히라고 한 뒤에 곧바로 그 넓어진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해야 보다 자연스럽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사이에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을 집어넣어 놨어요.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14절부터 7장 1절까지의 이 내용이 바울이 쓴 내용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누군가가 추가로 써서 집어넣은 내용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이고요. 고린도후서 모든 내용은 다 바울이 쓴 게 맞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했죠. 그 뒤에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하지 말라고 했어요. 언뜻 보기에는 바울이 갑자기 딴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두 내용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을 넓히라. 여러분, 예를 들어서 지금 내가 사는 집이 좁아요. 이 집을 좀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공사를 해서 집을 더 넓게 만들어야 됩니까?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은 집 안에 있는 짐을 정리하는 겁니다. 쓸모 없는 것은 다 갖다 버리고, 안 입는 옷도 정리하고, 그렇게 짐을 정리하고나면 집이 넓어지는 거예요. 온갖 잡동사니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확보하는 거죠.
마음을 넓히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의 크기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할 일은, 마음 속에 있는 쓸데없는 것들을 정리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거예요. 믿지 않는 자들, 우상숭배자들과 교제하면서 마음에 쌓인 모든 더러운 것들을 비워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공간이 확보돼요. 그 확보된 공간으로 바울을 영접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6장 11절부터 쭉 이어지는 내용이 언뜻 보기에는 부자연스럽지만, 자세히 보면 굉장히 자연스럽고 논리적이라는 것이죠.
마음을 넓히라. 그러기 위해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 그리고 그 넓어진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죠?
자, 이제 오늘 본문으로 가서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아멘.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불의를 행하지 않고, 누구를 해롭게 하지도 않고, 속여서 빼앗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를 영접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너희 마음에 들어있는 더러운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까 속히 더러운 것 다 비워내고 우리를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우리를 너희 마음에 영접하라.
바울은 지금 자기 자신을 변호하면서 특별히 자신이 불의와 해롭게 함과 속여 빼앗는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가, 아마도 바울이 돈을 착복한 것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로부터 사례비를 안 받았거든요. 그런데 앞에서는 안 받으면서 뒤에서 몰래 성도들을 속이고 돈을 취하고 있다, 라고 의심을 했습니다.
고린도가 속한 헬라 문화권에서는 철학자가 지혜를 나눠주는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사회거든요. 그런데 바울은 교회로부터 그 대가를 받지 않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해서 충당을 한단 말이죠. 이것이 고린도인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고대 기록에 따르면, 헬라 철학자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번째는 스폰서로부터 후원을 받는 것이고, 두번째는 강연을 해서 그 대가로 기부금을 받는 것이고, 세번째는 구걸을 하는 것, 그리고 네 번째가 직접 일을 하는 겁니다.
이 중에 뭐가 가장 천한 방법일까요? 우리 상식에는 세번째, 구걸을 하는 것이 가장 천한 방법인 것 같죠. 하지만 아닙니다. 네번째, 직접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천한 방법이에요.
차라리 구걸을 하면 했지, 자기가 일을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로 벌어먹지 못하고 직접 일을 하느냐?’ 이것이 헬라 문화권 사람들의 인식이거든요. 일을 한다는 것은 자기 지혜에 자신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로 자기가 일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바울에 대해서 인식이 안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바울은 자신이 다른 철학자들과 같은 단순한 일개 철학자로 취급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비량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직접 일을 하는 건데, 성도들은 이것 때문에 바울을 의심해요. ‘왜 돈을 안 받지? 복음에 그만한 가치가 없나? 아니면 뒤에서 몰래 따로 돈을 챙기나?’
이런 의심을 하니까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부터 계속 자기변호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또 하는 거예요. “내가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이 뒤에 고린도후서 11장 12장에 가면 또 합니다. 특히 12장 18절에 이런 말을 해요.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바울이 직접 돈을 안 받고 디도를 통해서 대신 받았다는 의심이 있었다는 것이죠. 앞에서는 안 그런 척~ 하면서 뒤에서는 디도를 통해서 몰래 돈을 빼돌리는, 그런 사람으로 바울을 의심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바울이 여러 차례 돈문제를 가지고 변호를 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바울을 못살게 굴었던 것 같아요. 징글징글하게, 아니 내가 돈을 안 받겠다는데, 뒤에서 따로 받은 것도 없는데, 자기들 상식과 판단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의심하고… 사람이 노이로제 걸리기 딱 좋죠.
그래도 바울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라” 자, 3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3절 시작,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아멘.
바울이 의심을 받고 너무나 억울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성도들을 정죄하지 않아요. ‘너희 왜 그렇게 나를 못 믿고, 의심하고, 자꾸 그렇게 나올래?’ 이렇게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계속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성도들을 권면하는가? 그 이유를 바울은 우리가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설명합니다. 함께 죽자, 그리고 함께 살자.
이 말은 곧 바울이 이미 성도들을 마음에 품고, 한 몸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6장 14절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했었는데, 바울은 성도들을 한 멍에를 멘 자들로 여기고 있는 겁니다. 멍에를 함께 멨기 때문에 한쪽이 개울에 빠지면 다른쪽도 같이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겁니다.
특별히 이 ‘함께 죽고 함께 살고’ 라는 말이, 본래 순서가 ‘함께 살고 함께 죽고’가 맞아요. 먼저 살고 그 뒤에 죽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순서를 바꿨죠. 먼저 죽고 그 뒤에 사는 것으로 말을 해요.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앞서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이 이 말을 했었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
함께 죽는다는 것은 곧 예수의 죽음, 그 고난에 우리가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산다는 것은 곧 예수의 생명, 그 부활의 영광에 또한 동참하는 거예요. 그래서 함께 죽고 함께 살자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고난과 죽음의 시련 앞에서도 물러서지 말고, 함께 담대히 예수의 생명을 기대하며 믿는 자의 삶을 살아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바울은 이미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고린도 성도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바울이 ‘너희도 나와 함께 이렇게 살기를 바란다’고 지금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살아라. 나와 함께 그렇게 좀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옆사람과 이렇게 인사합니다. “그렇게 좀 살아봅시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내 마음 속에 헛된 것 다 비워내고, 우리 마음을 좀 넓혀서 그 안에 그리스도를 채우고, 말씀을 채우고, 사랑을 채워야 됩니다. 또 같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받아들여야죠. 옆에 있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다 마음에 품고, 그래서 우리가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