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마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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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우리의 이마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습니까?
[서론]
1954년 윌리엄 골딩이 쓴 ‘파리대왕’이라는 고전소설이 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서 영화로도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먼저 영화를 보고 너무 인상적이어서 소설까지 읽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어린 소년들이 탑승한 비행기가 격추되어 무인도에 불시착합니다.
어른들이 전혀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공동체를 조직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리더를 뽑는데, 이성적이고 질서를 중시하는 랄프가 선출됩니다.
그는 불을 피워 구조 신호를 보내자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곧 잭이라는 소년이 등장합니다.
그는 리더인 랄프에 맞서는 세력을 형성합니다.
그는 랄프와 달리 힘과 사냥을 중시하며 아이들을 선동해 점점 야만적인 무리를 형성합니다.
아이들은 점차 랄프의 지도에서 이탈하고, 잭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섬에 괴물, 짐승이 있다는 소문이 퍼집니다.
정체도 모르는 그 짐승에 대한 공포가 아이들을 지배합니다.
잭은 그 짐승을 달래기 위해 돼지머리를 바치며 제사까지 드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잭을 숭배하듯 따릅니다.
그러나 원래 그 섬에는 그런 괴물이 없습니다.
단지 몇몇 아이들이 낙하산에 메달려죽은 사람을 괴물로 착각한 것뿐입니다.
공포와 소문 그리고 조작된 권위는 아이들의 눈과 마음을 가려버립니다.
결국 그들은 랄프 편에 있던 피그미와 사이먼을 죽이고, 리더인 랄프마저 죽이려고 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점점 짐승처럼 변해가는지 보게 됩니다.
가장 소름끼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짐승은 외부에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짐승은 바로 그들 마음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요한계시록 13장도 바로 어떤 ‘짐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짐승이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 본론]
저는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며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왜 용이나 짐승들이 이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왜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존재들을 굳이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배경은 로마 제국입니다.
로마 제국이 어떤 곳입니까?
당시 가장 큰 영토와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까지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또한 각종 쾌락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제국, 힘과 폭력이 주도하던 나라가 바로 로마입니다.
그런 세상 한복판에서 요한은 용과 짐승들을 본 것입니다.
용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용을 따르는 두 마리의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이고, 또다른 하나는 땅에서 올라오는 둘째 짐승입니다.
이 짐승들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당시 현실 속에서 존재했던 구체적인 인물들을 의미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은 로마 황제를 의미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만드는 종교 지도자, 즉 거짓 예언자를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해서 볼 짐승은 둘째 짐승입니다.
먼저 이 짐승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겉은 어린 양처럼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지만 말은 용처럼 합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어린 양 예수님처럼 보이지만, 속은 사탄을 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럴듯한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봐서는 딱 속기 좋은 존재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짐승이 기적도 행합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불을 내렸던 구약의 엘리야도 흉내냅니다.
얼마나 대단하던지 사람들은 이런 기적을 보며 감동하며 그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을 경배하게 만드는 미혹의 도구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그 짐승은 첫째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말도 하게 만듭니다.
마치 자신이 생명을 주는 창조주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겉모습과 능력은 너무나 주님을 흉내내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의 목적은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왜 일까요?
우상화는 백성들을 통제하고 충성심을 이끌어낼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우상화하는 것만큼 사람들을 통제하고 조종하기 좋은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 예언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말로 사람들을 미혹했을 것입니다.
“황제 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가에 대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이 놀라운 기적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둘째 짐승과 같은 일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독일이 나찌즘에 빠졌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독일 교회와 지도자들이 히틀러와 나찌 정권에 협조하거나 침묵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은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게 만들며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한국 교회들이 이에 동조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나라가 군부 정권하에 있었을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는 군부정권의 독재와 압제에 침묵하거나 동조했습니다.
그때 만들어진게 바로 국가조찬기도회와 군목 제도입니다.
이렇게 군부정권에 침묵하고 협조하며 한국교회는 성장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역사가 바로 짐승을 따랐던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달라졌을까요?
한국 교회 안에는 여전히 둘째 짐승같은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 이념을 하나님의 뜻인양 포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마치 특정 정치인이 자신들의 메시아인양 선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짐승을 경배하게 만드는 종교적 미혹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교회를 분별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일지 모릅니다.
심지어 놀라운 기적도 행해 수많은 사람들의 열광을 얻을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하지만 그 열광이 과연 하나님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짐승을 숭배하게 만드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짐승을 숭배하게 만드는 자들, 그런 교회들은 절대로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배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실상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본론]
지금까지 우리는 짐승이 사람들을 미혹하여 우상숭배로 이끄는 전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짐승의 전략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짐승의 또다른 무기는 폭력과 억압입니다.
특히 경제적 통제를 통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전략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을 경배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이 등장합니다.
그 자체로도 두렵지만 사실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움켜 쥐고 뒤흔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그토록 유명한 숫자 666입니다.
짐승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이 표를 받게 합니다.
이 표가 없으면 경제활동 자체를 할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666은 어떤 의미일까요?
666은 777이라는 세개의 완전수에서 모두 1을 뺀 불완전 숫자들의 조합입니다.
세번이나 반복하는 이유는 용과 첫째 짐승, 둘째 짐승, 즉 사탄의 삼위일체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는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의 이마에 찍힌 하나님의 도장을 모방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이듯, 666을 받으면 짐승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666을 게마트리아 방식으로 계산하여 ‘네로’황제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로마 황제 숭배를 강요했기에 이 해석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666이 누군가의 음모론처럼 특정한 바코드나 베리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적 표시일 뿐입니다.
또한 666 표식을 받는 곳이 오른손이나 이마라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쉐마를 적어 작은 통에 담아 손과 이마에 지니고 다닙니다.
아마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할때 사진으로 본적 있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겠다는 충성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받는다는 것은 짐승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겠다는 충성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제국의 통치에 복종하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당시 성도들에게 이것은 실질적인 공포였습니다.
짐승을 경배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수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물건을 매매할수 조차 없습니다.
그러면 가족 모두가 굶어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혼자 순교하면 괜찮은데 가족들 모두 굶어 죽기 때문에 더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먹고 사는 일은 우리의 제 1의 관심사입니다.
먹고 사는 일때문에 사람들이 죽기도하고 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회사를 위해 충성과 헌신을 다합니다.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양심을 팔아먹기도 합니다.
돈과 권력 앞에서 신앙을 타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일이 결코 우리의 우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충성과 헌신의 대상은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분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짐승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일뿐 아니라 인류 전체가 걸어온 짐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노예제도를 들수 있습니다.
돈과 노동력을 위해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한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조선시대까지도 물건으로 취급받던 노예가 존재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인류는 수많은 전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죽고 죽이던 매우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던 식민지 패권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70여년 전에 일어난 1, 2차 세계 대전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우리나라 역시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짐승이 만든 세상의 질서였습니다.
공장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사망하는 사건도 매년 수십건씩 일어납니다.
최근에도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돌아가신 50대 분이 계셨습니다.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엄마였던 분이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회사가 돈의 논리로 노동자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니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분노해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이 무시되고 생명보다 경제논리가 우선되는 곳에는 언제나 666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짐승은 단순히 종말에 등장할 괴물이 아닙니다.
이미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짐승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어린 양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도장을 이마에 새기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요한계시록 13장을 통해 짐승의 전략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미혹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해보이고, 능력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말은 속이는 용의 말이고, 그 능력은 하나님을 흉내낸 미혹일 뿐입니다.
둘째, 폭력과 억압입니다.
특히 경제적 억압, 즉 먹고 사는 문제를 쥐고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짐승은 666의 표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조종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짐승은 밖에 있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을수 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파리대왕’이야기처럼 섬에 있는 짐승은 결국 마음 속에 존재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언제든지 마음 속 짐승의 지배를 받을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경배하고 있습니까?
어린 양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짐승의 통치 아래 놓을수 밖에 없습니다.
짐승은 오늘, 우리 안에도, 우리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짐승이 아닌 어린 양의 승리를 말하는 요한계시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밥줄을 쥔 세상이 우리의 생명줄 같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근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짐승의 질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냉혹한 경제논리가 아닌 인간을 무엇보다 인간답게 대하는 것이 어린 양을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내가 따르는 이념이나 인물보다 더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과 태도가 곧 어린양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짐승으로 변하지 않게 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피흘린 어린 양을 따릅시다.
성경 말씀을 통해 세상 속에 감춰진 짐승의 얼굴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어 나갑시다.
어린 양을 따르겠다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사람에게만 이러한 분별력이 생깁니다.
그 사람이 곧 요한계시록이 반복해서 말하는 이기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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