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11. 사울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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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무엘상 15장 22~23절(구약 433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11. 사울 왕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계속해서 이 시간을 통해 성경인물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제 나름대로는 계획을 가지고 가고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가능하면 올해 말까지는 인물 시리즈 설교를 마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남은 설교 횟수를 계산해서 신약성경의 인물까지 갈 수 있도록 계획을 하는데요.
그런데 성경인물이 매우 많잖아요. 그러다보니 아쉽게도 모두를 다룰 수는 없고요. 또 그것을 계속 이어나가기에도 제가 힘에 부치는 면이 좀 있고 해서요. 시대별로 대표격을 지닌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데요. 앞서는 사사 시대를 중심으로 유명한 사사들의 이야기를 했다면요.
오늘부터는 왕국 시대를 중심으로 해서요. 고대 이스라엘의 왕들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해요. 이스라엘의 왕들 또한 40명에 이를 정도로 많기 때문에요. 좀 유명하고 대표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얘기할 건데요.
오늘은 사울 왕에 관한 얘기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지요. 이는 그가 마치 지방 사람이라거나 시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사 시대를 거치면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12개의 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주목받았는데요. 왜냐하면, 그가 준수한 외모를 가졌고 키가 컸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그의 외모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삼상 9:2).’ 이러한 사울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호했고, 그를 왕으로 세우는 것에도 한마음이 되었습니다(삼상 10:24).
또한,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예언자를 통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이 대단한 가문의 사람도 아니고 그 일을 맡기에 부족한 사람임을 얘기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왕으로 추대될 때에도 조금 우습게도 짐 꾸러미 사이에 숨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러한 모습을 통해 사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워집니다. 그가 왕으로 세워진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요.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요. 그는 남다른 리더십을 발휘해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 왕은 그의 외모뿐만 아니라 능력도 백성들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삼상 11:12~15).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여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왕이 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인데요. 사무엘상 15장 22~23절을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구약 433쪽)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을 통해 사무엘 예언자는 사울 왕에게 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사무엘 예언자가 이러한 말을 하는 까닭은 이러한데요.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어떠한 전리품도 취하지 말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사울 왕은 자신의 임의대로 양과 소를 비롯한 전리품을 남겨둡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해 봅니다. 그러자 사무엘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얘기하는 것이죠.
이 일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대체 순종이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순종’이라는 단어의 본래적인 뜻은요. ‘듣다, 경청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깐 순종은 상대의 소리를 잘 듣는 것을 말합니다. 주로 성경에서는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용하였는데요. 단순히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을 넘어서서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관해 예수님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가 첫째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거라’ 첫째 아들은 ‘가겠습니다’ 하고서는 포도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또 둘째 아들에게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싫다고 말하고서는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갑니다. 과연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른 아들입니까? 정답은 둘째 아들입니다.
이를 통해서 순종의 의미를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순종은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마치 둘째 아들이 자신의 뜻과 달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한 것처럼요. 순종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인물들의 순종은 이렇게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노년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고요. 노아는 약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방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제게는 정말로 잘 믿고 따르는 존재가 있어요.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아내보다 더 잘 믿고 따르는 존재가 있죠. 그것은 바로 네비게이션입니다. 언젠가 고백했지만 사실 저는 심한 길치라서요. 여기 황등에서 익산 시내로 갈 때도 네비에 의존합니다. 한동안은 익산병원이나 롯데마트도 네비 없이는 가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제가 실수로 네비를 잘못 보아서 네비를 따르지 않는 때는 있어도요. 그러나 그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전적으로 네비가 시키는 것을 무조건 따릅니다. 여기에는 제 생각이나 판단이 절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언젠가는 네비를 따라가보니 실제로는 더 먼길로 돌아오는 결과가 됐는데요. 그래도 저는 네비를 의심하거나 네비를 원망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철저하게 따라갑니다.
저는 순종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이와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네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른 것과 같은 것 말이지요. 그런데 이는 사실 쉽지 않지요. 사람마다 각자의 생각이 있죠. 삶의 경험치가 많이 쌓일수록 나만의 확고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다른 의견을 수용하기가 어려워요. 내 경험이라는 통로를 통과해서 내 기준과 판단이라는 렌즈로 다른 의견을 비교하여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죠. 전적으로 당신이 옳아요. 당신만 믿고 따를게요 하는 방식으로 반응하기가 사실 참 어려운 것이죠. 그러니 사실 순종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 감각으로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요. 상당히 어렵거나 때로는 거북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 점에서 오늘 성경에 나타나는 사울 왕의 입장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지 모릅니다. 내 생각에 이해가 되고 내 판단에 옳다고 좋다고 여겨지는 것은 거리낌 없이 따를 수 있지만요. 그렇지 않은 것에서는 언제나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울 왕이 하나님께 받은 명령은 아무것도 취하지 말고 모두 멸하라는 거였어요. 사울 왕의 처지에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첫째로는 잔인하다 느껴질 수 있죠. 한 성읍의 남녀노소 모두를 없애는 것이니까요. 또 경제적으로 따져보면 그 일은 얼마나 손해이고 아까울까요? 그 성읍에 있는 가축이나 값비싼 물건들을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니까요.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계속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지 못한 것을 이렇게 변명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다 없애지 않고 남겨두었다’라고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였다고 말하는 것인데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죠. ‘나를 위해’라고 말하는 것이 옳죠. 그런데 결국 문제는 그것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원하시는 순종은 내 생각을 앞세우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희석하는 순종이 아니지요.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죠.
일전에 유튜브에서 한 바가지에 5억짜리 물에 관한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대체 무슨 물이길래 그렇게 비싼 것일까요? 그래서 그 영상을 시청하였는데요. 사실 그건 물이 아니었고요. 금을 녹여 놓은 액체였어요. 그 한 바가지의 액체에는 약 5kg 정도의 금이 녹아 있다고 하니까요. 대략 4~5억 사이에 해당하는 물이라는 거에요.
그 영상에서 골드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요. 액체로 있던 금을 고체로 만들어서요. 그것을 또 강한 불로 녹여서 골드바로 만드는데요. 골드바 하나 만들어져서 무게를 재는데요. 1kg이 조금 안 되는 거예요. 정확히는 0.7그램 정도가 부족했죠. 그래서 어,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요. 부족한 금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요. 액체였던 금을 고체로 만드는 과정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진 것이죠. 그래서 다시 만들어진 골드바를 녹여서 그 알갱이 금을 더해서요. 완전한 1kg의 골드바를 만들어요. 이게 금이다 보니까요. 정말 미미한 몇 그램의 금도 꼼꼼하게 찾아서요. 그렇게 정확하게 1kg 골드바를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가 순종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어서요. 내 생각이 불순물처럼 들어오게 된다면요. 그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되지 못하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어 몇 그램의 모자람이 있다면 그 또한 온전한 순종이 되지 못하는 것이죠. 마치 몇 그램의 금이 모자라면 온전한 골드바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요. 백 퍼센트의 순종이 아니면, 그것이 온전한 순종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인간이잖아요. 실수도 있고 부족함도 있는데 어떻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백 퍼센트의 순종을 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죠. 인간에 백 퍼센트를 기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러면 애초부터 순종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순종을 행동적인 면에서만 생각하면 그럴 거예요. 하지만 순종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보다 태도와 마음에 있어요. 그렇다고 행동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요. 마음이 없는 순종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 것이지요.
앞서 예수님께서 두 형제를 비유로 삼아 순종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는데요. 그 비유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오셔서 이른바 성전청결을 하세요. 성전에서 장사하던 이들을 내쫓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는 어찌 보면 난동을 피우셨죠. 이에 당시 성전의 관리자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묻죠. 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냐고요. 그때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고발하고 있어요. 그들은 첫째 아들과 같이 순종하는 척하고 있어요.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지요.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들이었어요. 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어요. 그것이 당시에 사람들에게 존경받게 되는 것이 거룩하고 신실한 사람들로 여겨졌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실상 그들의 모습은 회칠한 무덤 같아서요. 속은 썩었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것으로 그들의 실상을 들춰내셨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되어버렸거든요.
마찬가지로요.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이요. 예배 안 빠지고 헌금 잘하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는 등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열심히 행하는 신앙생활이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썩어있는 것이라면요. 오히려 그와 같은 열심을 통해 나를 자랑삼고자 한다면요.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은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성경은 말하잖아요.
교회에서 종종 마주하는 안타까운 분들이 있어요. 정말 남다른 열심으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주변에서도 대단하다고 평가하시는 분들이지요. 그런데 그 열심이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독이 되어서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서시는 분이 있어요.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과 내 기준을 앞세우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지 못하면 결국 이런 문제에 빠지기 쉬운데요. 예수님도 이러한 얘기를 해주세요.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어요. 한 사람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종교지도자였고요. 다른 사람은 사람들의 경멸을 받는 세리였어요. 종교지도자였던 그 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신앙의 열심을 가졌는지를 이렇게 기도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저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정말 그 종교지도자는 이와 같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러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세요. 세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어요. 또한, 자신을 겸손히 하나님께 낮추고 있어요. 반면에 종교지도자였던 사람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통해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있지요.
오늘 우리가 이야기 나누는 사울 왕도 그랬어요. 그도 처음부터 나빴던 사람은 아니지요. 그 역시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을 앞세우기 시작해요. 사무엘 예언자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했고,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기 좋을 대로 임의로 판단해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따르지 않았어요. 이와 같은 겸손함을 잃어버릴 때,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의지하게 됐는지도 몰라요.
그와 같은 인생의 마지막은 어땠을까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은요. 다윗을 평생에 시기 질투했고요. 전쟁 중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요.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실패한 왕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죠. 그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라는 소중한 타이틀을 얻었음에도요.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함으로 인해서요. 그의 삶은 불행과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요. 그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 어겼기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한다고 해서 그것을 매몰차게 벌하시는 분은 아니시니까요. 심지어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셨잖아요. 오히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요.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태도가 변화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지요.
끝으로 얘기하나만 드리고 마칠게요. 에필로그라는 찬양사역팀이 있습니다. 이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과 사모님은 모두 어릴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로 인해서 참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어려운 시간이 많이 있었지만요. 그 시간을 뒤로하고 찬양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귀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간증을 방송을 통해 듣게 되었는데요. 제가 특별히 감명 깊었던 것은 두 분의 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날 딸이 그러더라는 거에요. ‘엄마 아빠는 왜 눈이 안 보여’ 그래서 이렇게 답을 했데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거야, 그 덕분에 불이 꺼져 있어도 딸에게 책도 읽어 줄 수 있잖아.’ 또 언젠가는 딸이 밤에 외출하고 싶은데 딸이 엄마가 아빠가 그것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이 마음이 상했는지 이렇게 말하더래요. ‘엄마 아빠는 눈이 안 보여서 이런 것도 못하지’ 딸이 아직 어리다보니 부모에게 상처가 될 말을 깊이 생각지 못하고 한 거예요.
그러자 엄마인 그 사모님이 그랬데요. ‘그래, 맞아 엄마는 눈이 안 보여서 딸이 말한 것처럼 그런 걸 못해서 속상해. 하지만 하나님은 엄마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셔서 그것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게 하셨고 그래서 엄마와 더불어서 딸도 많은 삼촌과 이모들의 사랑을 받게 해주셨어.’
이렇게 엄마 아빠의 장애를 콕콕 찌르던 딸이 언젠가는 학교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해요. 그날은 체육대회가 있던 날인데요. 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데요. ‘우리 엄마 아빠는 눈이 안 보여서 저랑 함께 이런 체육활동을 할 순 없지만요. 항상 뒤에서 저를 지켜줘요. 그래서 저는 엄마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저는 그 목사님과 사모님 간증을 들으면서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고요. 시각장애라는 요소가 삶에 큰 문제 일 수도 있지만요. 이것 역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믿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요.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이룰 수 있지요.
저는 오늘 함께 나눈 사울 왕의 이야기를 통해 더 분명하게 깨닫게 돼요. 그가 실패한 왕이 된 것은요. 단지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오히려 그가 하나님께 보인 태도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여겨져요. 만약 그가 하나님을 향한 겸손하고 바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면, 어쩌면 그는 버림받고 실패한 왕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자신의 판단과 뜻을 더 따르게 됐을 때요. 그는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과 경험에 의지해서 세상을 바라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라건대,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내 생각과 내 뜻이라는 불순물을 하나님의 뜻에 첨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매 순간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께 겸손히 나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