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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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교회 금요기도회

시편 1:1–6 NKRV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사랑합니다! 금요기도회에 나온 낙원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다. 진정으로 행복하고 싶은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고 싶은 사람이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에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있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말아야 할 권리는 없고, 종교와 인종을 떠나서 모두가 행복을 추구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은 부자가 되는 것,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과 병 없이 오래 사는 것, 좋은 학교와 직장과 높은 지위나 명예,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고 존경받는 것, 좋은 부모님, 형제와 친구, 결혼과 자녀 등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마지막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해서 고생 없이 사는 삶으로 불안이나 걱정이 없이 사는 것을 소망하고 바라며 살아간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우리가 시편 1편을 읽을 때 ‘복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말하는 복들로 성경을 읽는다면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실제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주시는 복과 오래 살게 허락하시는 복을 주신다. 그러나 이러한 복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하고 잘 알고 많은 성도들이 암송하는 구절 중 하나이다. 시편의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어는 ‘복 있는 사람’이다. 1편을 자세히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보아하니, 복 있는 사람과 반대되는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악인이다. 1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순종하는 사람, 율법을 즐거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악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복 있는 사람은 의인이라는 것으로 큰 축복과 연결시키고, 악인은 비참한 결과와 연결시키면서 의인과 악인을 엄격하게 구분하며 묘사한다는 것이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의로운 자에게 올 축복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4절부터 5절까지는 악인의 대조되는 운명과 징벌에 대해서 말하며, 6절에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요약을 말해준다. 1절을 보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3가지 동사가 등장한다. 이 동사를 유심히 봐야한다. ‘따라 걷다, 서다, 앉다’이다.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귀를 기울이며 따라 걷다보면 그게 점점 내 가치관이 되어버리고 점점 생각이 굳어져 습관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시편 기자는 죄가 한 사람이 한번 해 보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지고 마지막에는 습관이나 생활방식이 되는 유혹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도 동사도 있지만, 명사도 잘 보아야 한다. 꾀, 길, 자리라고 말하는 모임이다. 이것 또한 죄의 영역이 점점 확장되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명사들에는 각각 적어도 다른 한 사람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누군가 말해주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의인의 길이든 악인의 길이든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믿음은 무엇으로부터 난다고 성경에서 말하는가? 들음으로 나는 것이다. 그래서 악인은 듣지 절대 듣지 않는 것이 2절에 나타난다.
시편 1:2 NKRV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뭔가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는데, 토라는 십계명과 그 뒤에 오는 613가지의 법일 수도 있고, 모세 오경 또는 오경 중에 특별히 신명기서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개역개정에서는 율법이라고 번역한 것 같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교훈”이다. 토라는 단지 어떤 교훈이 아니라 특별히 여호와의 교훈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1절하고 대조해볼 때 메시지가 명확하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미심쩍은 인간의 권고가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의 교훈을 따라야 하는 길임을 말해준다. 여호와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서 3절에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등장하면서 은유적으로 악을 피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의 생기 넘치는 상태를 묘사한다. 말씀에 순종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인생의 기준이 여호와의 교훈에 기반과 기준을 두었기 때문에 생명을 주는 강바닥의 토양에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생명력 넘치는 나무와 같다. 그 나무는 시냇가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악기후로 인해 이스라엘의 뜨겁고 건조한 기후에 살아갈 지라도 악조건을 견뎌 결코 시들지 않고 추수 때에 충실히 열매를 맺을 정도로 나무를 강하게 하는 데 충분한 것이다.
여러분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을 생각해보라. 그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그가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왔는데, 그 삶이 어떻게 형통한 삶이겠는가? 정말 나였으면, 형들에 대한 배신감과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귀한 막내 아들에서 노예가 되어버린 삶이 화가 날 것 같다. 그러나 창세기에 요셉의 삶이 왜 형통한지를 분명하게 창세기 39장 2절에서 말해주고 있다. 함께 읽어보자.
창세기 39:2 NKRV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래서 3절에서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는 성경에 나타나있지 않지만, 그의 주인 보디발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요셉의 모든 일에 형통하게 하심을 본 것이다. 그래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가정 총무로 모든 소유를 다 그에게 맡기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보디발의 집이 어떻게 되는가? 여호와께서 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려서 너무나도 잘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뿌리치고 도망쳤더니, 그녀가 고발하는 이야기를 듣고 보디발의 분노로 그만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또한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무고죄로 옥에 갇힌 삶이 어떻게 형통의 삶이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그가 감옥에서도 형통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세기 39:23 NKRV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여기서 계속 반복되는 어구가 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이다. 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가? 요셉이 노예로 팔려서 보디발 집에 있을 때에도, 죄수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그와 그 자리에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요셉이 꿈을 해석한대로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요셉이 머문 장소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복내려주시어 풍요로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시편 1편 2절에 “그가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에게 유혹을 받을 때 그가 어떻게 보디발 집에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고, 성실했으며 정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살았기에 보디발도 남들처럼 속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는 모습에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가 그러한 성품으로 감옥에 있을 때에도 간수장이 모든 죄수를 요셉에 손에 맡겨 모든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 앞에 충성할 때, 나에게 맡겨진 일에도 충성을 다하며 주께하듯 최선을 다한다. 여호와 앞에 정직할 때, 사람들 앞에서도 정직할 수 있다. 여호와 앞에서 성실해야 주어진 작은 일에도 성실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디에 있든지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과 함께함과 형통함을 경험하는 축복이다.
그러나 반대로 시편 1편 4절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편 1:4 NKRV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여기서 주어는 이제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 등장한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더운 바람이 부는 뜨겁고 건조한 악기후에 버티고 그 잎을 유지하는 것과는 반대로 악인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피해를 입는 겨와 같다고 말한다. 겨는 나무와 정반대이다. 나무는 생명을 주는 물이 풍부하지만, 겨는 말랐다. 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리고 풍요롭지만, 겨는 땅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바람이 불 때에 날리고 쓸모가 없다. 1-3절까지 의인의 축복이 쭉 나열된다면, 악인은 단지 4절의 한 줄로 이야기한다. 악인들에게는 어려움을 견딜 내부적 강건함이 없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악인들이 심판받을 시간이 가까이 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5절에 결과적으로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의인들의 모임,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임에 들지 못할 것이다. 왜 하필 겨인가? 악인들은 자신의 모든 죄의 책임을 누가 져야하기 때문인가? 자신들이 마땅이 죄에 대한 책임을 받아야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누가 죄에 대한 책임을 져주시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다 십자가에서 받으셨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임에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 아시는 사실은 우리 중에서도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있을 수 있다. 참 신자는 삼위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택한 백성을 위해 구원하시려 작정하여 구약백성들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어 예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저주신 은혜로 구원받음을 고백하고 감사한다. 그러나 거짓 신자는 내가 얼마나 교회에서 열심히 사역했는지, 내가 교회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내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은혜의 반댓말이 무엇인가? 자기 공로이다.
자기 공로로 살아가는 사람은 너무나 안쓰럽다. 연예인 유재석씨가 한국에서 정말 유명한 MC 아닌가? 그가 어떻게 하면 국민 MC가 될 수 있는지를 인터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가 했던 대답은 이러했다. 이번에 대상을 탔으면 내년에는 두 배로 더 잘해야 인기가 겨우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후년에는 그보다 두 배를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인기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점점 사람들에게 잊혀지면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하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부자이든지 명예로운 자리에 있든지 높은 자리를 지키는 것은 참으로 힘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믿음이 좋아보이는 척을 잘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 신선한 것에 초점을 맞춰서 뭔가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어야 좋은 간증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칭찬해주지 않거나 내가 열심히 교회 일을 한 것을 알아봐주지 않을 때 얼마나 낙심되고 괴롭겠는가? 그러나 반대로 은혜로 사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고, 내 안에 있는 죄악은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이 없으면 안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높은 자리에 있든지, 낮은 자리에 있든지 높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낮추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며 감사로 살아간다. 또 당장 가지고 있는 소유에 대해서도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감사한다.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은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이 바로 은혜로 살아가는 자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푸시고,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날마다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찬양하다’의 히브리어 어원은 ‘자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나를 자랑하는 분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자랑하는 분인가? 우리 낙원의 가족들의 입술에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랑하기를 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십자가 공로를 자랑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시편 1:6 NKRV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마지막으로 6절은 두 가지의 ‘길’이 등장한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는 이 단어는 야다라고 불리는 ‘알다’라는 뜻을 가진다. 보통은 ‘보호하다’라고 번역되지만, 개역개정에서는 ‘인정하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악인들의 길은 어떻다고 말하는가? ‘망한다’고 말한다. 시편 기자가 말하고자는 바는 요즘 말로 쉽게 말해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핸들을 잡고 가는 것과 같다.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 망하는 길을 열심히 빠르게 달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그들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죽음과 심판을 향해 스스로 전진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결정하고 내가 알아서 개척해 나갈 것이라는 말이 멋진 말 같지만, 이것은 안타깝지만 멸망의 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모습이 마치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차에 라이트를 켜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미래의 일을 한치 앞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길을 다 아시는 주님이 내 인생에 핸들을 잡아주시면 얼마나 평안하겠는가? 그래서 우리 인생에 빛이신 예수님이 함께하실 때 우리는 진정한 형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출애굽 1세대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출애굽의 시간을 지내다가 결국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 죽게 되었다. 그 다음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끄는 출애굽 2세대가 광야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들은 정복 전쟁에서 승리를 맛보게 되고, 그 끝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출애굽 2세대의 이야기가 끝나고 사사시대가 들어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점점 불순종의 삶으로 살아간다. 가나안의 민족을 모두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일 잘할 것 같은 좋은 일꾼들을 남겨 놓아버렸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풍요롭게 사는 것 같아 보이는 가나안의 사람들의 관습을 배워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누구를 숭배하게 되는가? 바알을 섬기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풍요를 상징하는 바알을 숭배하면서 여호와를 버리게 된다.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과 안정감이 자신에게 있어서 큰 만족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에 만족을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빌립보서 3:19 NKRV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창세기에서 노아의 시대를 바라보아도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바다가 아닌 산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보고 조롱하고 그들은 시집가고 장가들면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은 없고, 오로지 이 땅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까만 생각하다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하고 모두 물로 심판을 받았다. 사사시대 때도 마찬가지고, 바울이 사역했던 때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배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며, 그렇게 불순종하는 일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인생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까를 고민하고 살아가는 것이 시대를 불문하고 이러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는 우상을 돌이나 나무로 깎아서 숭배하는 것은 없지만, 어떤 모습이든지 물질적인 풍요를 얻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다 모양만 다르지 바알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물질을 최고라고 여기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은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 분별력을 갖게 하는 것이 시편 1편 2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속에서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려고 하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감정이 무엇인가?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든다. 뭔가 막막한 것 같고, 사람들에게 뒤쳐질까봐 아니면 실패할까봐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책하고 상처받을까봐 여러 복잡한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럴 때 우리가 분명하게 우리가 마음 깊이 고백해야 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말이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두려워하지 말라, 겁내지 말라, 놀래지 말라,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이 말씀을 성경에서몇번을 말씀하시는가? 무려 365번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하나님 없으면 안되는 존재인지 깨닫고 주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할 수록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더 진하고 선명하게 우리에게 비춰진다. 마치 짙은 어둠 속에 한 줄기의 빛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그 상황은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기 가장 최고의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누렸던 시대가 언제인지 아는가? 바로 출애굽하여 광야생활 할 때이다. 생각해보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시겠다고 부르신 장소가 황량한 광야였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얼마나 최악인가? 당시에 에어컨도 스타렉스도 없으니 중동의 뜨거운 햇살을 버티며 걸어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그렇다. 광야에서의 삶이 가장 복되고 좋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광야로 걸으면 망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이끄심과 도우심을 분명하게 경험하고 옷과 신발도 헤지지 않는 놀라운 일들을 맛보기 때문이다.
광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미드바르”라고 한다. “민”이라고 하는 전치사와 “다바르”라고 하는 명사의 합성어이다. “민”은 ‘~으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다바르는 ‘말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미드바르라고 말하는 광야는 직역하면 무엇인가? “말씀으로”이다. 그렇다. 말씀으로 걸어가는 길은 매우 광야와 같이 우리가 마치 힘든 길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다.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에 내던져버리는 분이 아니라, 그 길에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하나님 말씀 의지하여 순종하며 따라갈 때 모든 걸음을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함께 걸어가신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걸어가는지가 중요하다. 재밌고 유머러스한 사람과 군생활을 하면 그 안에서 추억이 되고 둘만의 재밌는 이야기가 된다. 고생길도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그 길에 대한 기억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너무나 좋은 여행과 아름다운 꽃길을 걸어가는데, 불평하고 짜증내고 삐지고 화내고 툴툴거리면 그 사람과 걸어가는 길은 좋은 여행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때 가장 행복한 인생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으셨다. 장로교 표준문서로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에는 이렇게 시작한다. 제가 질문하면 답을 읽어주시라.
Q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A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신 목적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 우리는 영혼 깊은 곳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처음으로 했던 첫 설교 바로 산상수훈에서 팔복 중 첫 번째 복을 이렇게 우리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5:3 NKRV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없으면 안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는 행복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과 이끄심, 일하심을 경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편 1편에서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도 마찬가지로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한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지 않으면 성경 전체를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시편의 1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지 않으면 이후에 등장하는 시편의 고백을 할 수 없다. 팔복에서 마음이 가난하지 않을 때 다음에 나타나는 나머지 약속된 복들을 누릴 수 없는 처럼 말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최고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말씀에 목숨을 걸고, 생명을 걸고 늘 성경을 가까이 함으로 날마다 예수님으로 행복한 성도들 되시기를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누리시는 저와 낙원의 모든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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