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난 사람들_마르다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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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_마르다와 마리아
본문: 요 11:32-35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서론
문제하나 낼게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몇번 우실까요?
정답은 세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딱 세번만 우십니다.
첫번째는, 누가복음 19장 41절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고,
두번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다는 이야기가 히브리서 5장 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오늘 본문 속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의 눈물입니다.
본론
베다니라는 동네에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 둘째는 마르다, 그리고 막내 마리아.
보통 신약 성경에서 누군가를 소개할 때는,
누구 누구의 아들, 혹은 어느 동네의 누구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세 남매를 소개하면서 부모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대 가정에서 장례가 있을 경우 부모가 장례를 주도해야 하지만,
요한복음 11장에서 세 남매의 부모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세 남매는 부모님을 일찍 떠나보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남매에게 남아있는 형제 한 사람 한사람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고, 소중한 존재일 것입니다.
이들이 살았던 곳은 “베다니”라는 동네입니다.
베다니라는 뜻은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다니라는 동네는 역사적으로 나병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으로 알려져 있어요.
즉, 베다니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는 것이죠.
정리해보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베다니라는 동네에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라는 세 남매가 살고 있었어요.
아마 이들은 일찍부터 부모님을 떠나보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던 어느날, 첫째 오빠, 어쩌면 가장의 역할을 감당했을 나사로의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요. 좋아질 기미가 안보여요.
그러던 중, 믿기 힘든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가 세상을 떠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했던 남매에게 큰 오빠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두 자매의 멘탈이 완전히 산산조각납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나사로가 죽은 현장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세요.
사실요.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가 죽기 며칠 전,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전달해요.
“오빠가 많이 아프니 얼른 와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기를 원했던 것이죠.
그런데, 두 자매의 바람과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날은 오빠가 죽고 나서 나흘이라는 시간이 더 흐른 뒤였습니다.
여기서 나흘이라는 개념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죽고 그 사람의 영혼이 시신 근처를 머무는데, 그 기간이 사흘까지, 3일은 시신 근처를 머문다고 믿었어요.
사람이 죽고 사흘까지는 시신 근처에 영혼이 머문다고 믿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 3일이 지나기 전 까지는 이 사람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어요.
3일째까지는 조금의 소망이 있는거에요.
그런데 4일이 지나고,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 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나흘이 지나면 영혼이 더 이상 몸에 돌아올 수 없고,
이 사람이 완전히 죽었구나. 죽음이 확정이구나.
이제 더이상 돌이킬 수 없구나.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오빠 나사로가 죽고 나흘이 흘렀다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의미해요. 더이상 돌이킬 수 없고,
일말의 희망도 소망도 없는 상태.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사건이죠.
어쩌면 가정이었던 큰 오빠.
이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많은 생각들이 이 두 자매를 꽁꽁 묶고 있는 그때,
이 사건을 대하는 두 여인의 태도가 다릅니다.
언니 마르다와 동생 마리아,
그들은 이 사건 앞에 각각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언니 마르다입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났기에 밤새 펑펑 울었을거에요.
눈은 팅팅 붓고, 울부짖은 탓에 목소리는 다 쉬었을거에요.
그때 예수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지금 동생 마리아를 보니까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그래도 내가 언니니까,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눈물을 닦고,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갑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위문하러 오신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해요.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정말 좋은 신앙인같아요.
분명 마르다도 예수님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모든 아쉬움을 삼키고 이 한 마디로 표현하는거에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런데 이 다음 구절 22절에서 마르다가 이런말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비록 오빠가 죽었지만,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마르다는 정말 좋은 믿음을 가졌어요.
어렵고 힘든 중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져버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힘든 감정을 예수님 앞에 숨기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아주 훌륭한 믿음을 가진거 같아요.
그녀는 우리가 본 받아야하는 믿음의 소유자인 것은 확실해요.
그녀는 형제의 죽음도 이겨낼 만한 믿음을 가진 여인이이에요.
오빠가 죽었음에도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아마도, 부모님을 일찍 여이고, 오빠가 아프기 시작할 때부터, 큰 언니의 책임감 때문에,
이런 씩씩한 모습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아픈 오빠와 철없는 동생 사이에서 엄마 노릇을 하며, 눈물을 삼키는 삶.
그리고 믿음으로 견디는 삶.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긴채 씩씩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오늘 마르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온전히 다 알지 못한거 같아요.
마르다는 믿었어요.
오빠 나사로가 이 세상의 마지막 날 모든 성도가 부활할 때,
오빠 나사로도 함께 부활할 것은 믿었어요.
그런데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오빠의 시신이 부활한다는 믿음은 없었던 거에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믿음의 고백을 했던 마르다. 어쩌면 그것이 좋은 신앙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마르다는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어요.
정작 오늘 예수님께서 내삶에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거에요.
자신의 감정을 숨긴채, 좋은 고백을 했지만,
정작 오늘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죠.
이것이 마르다의 신앙의 현주소였어요.
그렇다면 막내 마리아는 어땠을까요?
마르다와 이야기를 마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마르다가 마리아를 불러와요.
마리아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나아가요.
그리고 이렇게 행동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도 마르다와 같은 말을 해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슬픈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감정을 쏟아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것은 누구의 믿음이 더 좋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마리아는 언니와 달리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더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언니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꾹 참았다면,
동생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다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런 태도를 보시고
예수님도 함께 아픈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오늘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우셨던 세번의 이야기 중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결론
(영상시청)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인데요.
드라마 속 성동일 아저씨의 어머니의 장례식 날 가장의 책임감으로 가족들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줘요.
그런데 외국에서 뒤늦게 온 큰형을 만나니 참고 있던 눈물이 터집니다.
옆에 있던 다른 형제들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보면,
오늘 본문 속 마르다처럼 행동을 하게끔 학습이 돼요.
누군가에게 나의 약함을 보여주기 싫고,
나의 감정 드러내는 것을 피하게 되고,
힘들어도 괜찮은 척,
아파도 안 아픈척 할때
또는 책임감 때문에 모른척하고 살아갈때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에게만은 우리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럽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그것이 믿음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인 것이죠.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는거에요.
숨기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거에요.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울어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씩씩한척 하지 않을게요.
하나님 앞에서 쎈척하지 않을게요.
하나님 앞에서는 솔직해지고 싶어요.
하나님 저의 마음을 살펴주시고, 저를 위로해주세요.
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 내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저의 상황과 아픔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예수님 저를 만나주세요.
2. 수련회를 통해서 예수님 만나고 싶어요.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싶어요.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주세요.
예수님 저를 만나주세요.
성령님 저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세요.
그래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듯,
잠들었던 나의 영혼이 깨어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