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시대: 기독교는 어떤 사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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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환영
할렐루야~ 서로 앞 뒤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옆에 앉게 되어 영광입니다. 은혜 많이 받으세요.”
도입
오늘 우리는 '이미지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보기 전에, 먼저 이미지로 판단합니다.
'무엇이 진짜인가'보다 '무엇처럼 보이는가'가 중요해진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서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진리로 평가받기 전에,
'어떤 이미지'로 보이는가에 따라 판단받습니다.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도, 기독교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 이미지' 때문입니다.
뉴스, 미디어, SNS 속 기독교는
종종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비춰집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점점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서론
오늘날 기독교가 위기를 겪는 이유는 진리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진리는 여전히 살아있고 능력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진리를 보기 전에,
‘진짜’와 다른 ‘가짜 이미지’에 막혀버립니다.
우리는 진리를 가리는 외식을 벗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받는 박수, 인정, 칭찬이 그들의 전부’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의 눈으로 상을 다 받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공허한 성공일 뿐입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짜 변화’보다는 ‘보이는 모습’에 집착합니다.
SNS 속 신앙 콘텐츠, 영상 속 감동의 장면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해주진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연출하는 데에 익숙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가짜 이미지가 진짜인 줄 착각합니다.
이번 3분기 추천도서인 “넷플릭스가 삼켜버린 기독교”라는 책은
이 지점을 정확하게 찌릅니다.
우리는 신앙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경험'이 아니라 '이미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영상 콘텐츠처럼 감동받고, 다음 콘텐츠로 넘기는 신앙.
그건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 ‘소비’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묻습니다. “기독교는 지금 어떤 사건인가?”
복음은 한 번도 콘텐츠였던 적이 없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
죄인이 용서받고 삶이 뒤집히는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사건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경험하기 전에,
‘기독교스럽다’는 이미지를 먼저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는 기독교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요?
위선, 권위, 낡은 교리, 감동 강요…
이런 것들이 기독교 이미지의 선입견이 되어버렸습니다.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이미 등을 돌렸습니다.
이건 단순한 이미지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나는 복음을 사건이 되게 만들고 있는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살아계시다면,
우리의 공동체와 삶에서 어떤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는가?
초대교회는 사건이었습니다.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이방인과 귀부인들이 회심했습니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이 이에 질투심을 느끼고,
불량배들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키며 바울 일행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끝내 바울 일행을 찾지 못한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을 도와준 야손과 몇 형제들을 붙잡아 로마에 고발했습니다.
그 때 고발한 죄명이 “천하를 어지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천하’는 로마 전체를 의미하고, ‘어지럽게 하다’는 말은
헬라어 ‘아나스타토오’로 ‘혼란케 하다, 체계를 뒤흔들다’는 뜻입니다.
즉,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는
바울 일행이 단순히 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세계관, 질서, 권력 구조를 무너뜨리는 존재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 말은 비난이었지만 동시에 최고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기존의 이미지를 흔드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복음은 보여지는 신앙이 아니라,
잘못된 세상을 새롭게 뒤집는 능력의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은 원래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건입니다.
그 어지러움은 혼란이 아니라,
거짓된 이미지를 허무는 진리의 충격입니다.
이 충격을 오늘날 기독교는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건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다시 사건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선 우리 이룸청년부가 바로 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단지 기독교 이미지를 소비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기독교 이미지를 다시 디자인하는 세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시대 속에서
과연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요?
세 가지 개념으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미지에 압도된 신앙을 살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미지에 압도된 신앙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진 한 장, 영상 한 컷이 그 사람의 인생을 규정합니다.
신앙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도하는 모습, 말씀 묵상하는 장면,
찬양하는 순간이 SNS에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 장면들이 진짜 신앙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콘텐츠화된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느끼고 감동받지만, 소비하고 지나갑니다.
신앙이 ‘경험’이 아닌 ‘장면’이 되면,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전 세대는 복음 앞에서 무너졌지만,
지금 세대는 복음을 감상합니다.
이제는 예배도, 간증도, 설교도
‘잘 편집된 이미지’가 되어야 주목을 받습니다.
조회수와 감동의 크기가 복음의 진정성을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복음은 예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끔찍한 사건이었고,
그 속에 담긴 고통과 은혜는 쉽게 편집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감동적인 순간에 익숙하지만,
정작 그 감동 뒤에 따라야 할 순종은 꺼려합니다.
이것이 이미지 시대의 위기입니다.
신앙은 무대가 아니라 현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더 ‘기독교 무대’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깊은 경고를 줍니다.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 한마디는, ‘진짜 신앙’과 ‘보이기 위한 신앙’을 날카롭게 구분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 '외식하는 자'는 그저 가식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헬라어 ‘휘포크리테스’는 본래 '가면을 쓴 배우'를 의미합니다.
즉, 신앙을 연기하는 사람,
진짜 속마음과는 다른 겉모습을 연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기도를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라 '관객'이 존재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나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지금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인가, 사람을 의식한 신앙 퍼포먼스인가?”
교회, 예배, 기도, 설교 모두가 영상과 콘텐츠로 전환되는 시대,
우리는 언제든지 ‘휘포크리테스’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미지에 압도된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런 신앙은 처음엔 감동을 주지만, 결국엔 허무함만 남깁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과의 실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동은 있었지만, 변화는 없었다”는 고백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를 잃고, 가짜를 예쁘게 꾸미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신앙도, 예배도, 삶도
깊이 없는 루틴, 감정의 기승전결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이런 현상을 잘 나타내는 표현 중 하나가 “회빙환”입니다.
회귀, 빙의, 환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나 영화들이 ‘회빙환’ 컨텐츠에 속합니다.
이는 현실을 벗어나고, 새로운 자아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감정 소비 패턴이 신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회귀, 회개와 성장이 없는 신앙을 반복합니다.
빙의,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연기하는 신앙을 추구합니다.
환생, 복음이 아닌 내 욕망을 쫓는 가짜 새 삶을 기대합니다.
혹시 우리도 감정적 루틴에 갇혀, 감동만 받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신앙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은 반복되는 감상이 아니라, 인생을 꺾는 충돌입니다.
예수님은 외식을 경고하셨지만,
동시에 진짜 은밀한 신앙을 강조하셨습니다.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이미지가 아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의
실체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교회 이미지는 늘 위선, 욕망, 피해자 외면 등 부정적으로 소비됩니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부정하지만,
이미 예측 가능하고, 진부한 이미지로 낙인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이미지에는 생명력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 복음은 전혀 예측되지 않았고,
그래서 충격이었고, 생동감 넘치는 생명이 역사했습니다.
지금 우리 청년부를 구성하는 20-30대를 원나블 세대라고 합니다.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를 보며 자란 세대라는 뜻이죠.
그래서 우리는 계속 성장하는 주인공 버프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뒤흔듭니다.
복음은 주인공 버프로 스스로 성장하는 영웅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내가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깨뜨리고 다시 빚어가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이미지가 아닌 충돌로 경험해야 합니다.
이미지 중심 신앙은 결국 위선을 강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앞에선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식적 신앙을 완강히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외식하는 이미지가 천국 문을 막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이미지의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신앙을 위해 살고 있진 않은가?”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서 드리는 진짜 기도를 듣기 원하십니다.
이미지 시대 속에서 진짜 신앙은 사라지지 않고,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숨어 있는 자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어둠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기도가 없었다면, 십자가도 없었습니다.
진짜 신앙은 무대 위가 아닌, 어두운 골방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세상의 비난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잡은 가짜 신앙의 이미지입니다.
둘째, 우리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기독교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어도,
이미 ‘기독교는 이런 거야’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상의 출처는 대부분 미디어입니다.
뉴스, 영화, 드라마, 예능에서 비춰지는 기독교는 부정적입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진짜 복음을 가리고 있습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등장하는 전도사는
위로보다는 정죄의 메시지를 반복합니다.
그 장면에서 주인공 금자는 “너나 잘하세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한마디는 한국 사회가 기독교에게 품고 있던 이미지였습니다.
‘너희가 말하는 건 맞을지 몰라도, 너희 삶은 틀렸잖아.’
이것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입니다.
기독교가 진리를 말하면서 동시에 위선을 보일 때,
세상은 진리를 외면하고 위선만 기억합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진리는 설득력을 잃고,
'위선적인 종교'라는 이미지만 더 강화됩니다.
지금 우리는 복음이 미디어에 의해 역전되는
아이러니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왜곡은 단지 잘못된 콘텐츠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세상과 똑같이 욕하고 차별하고 미워합니다.
그 결과 미디어는 그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콘텐츠로 만들어 확산시킵니다.
드라마 <수리남>에서 기독교는 마약과 돈을 감추는
범죄조직으로 등장합다.
주인공은 목사의 탈을 쓰고 범죄를 저지릅니다.
물론 허구이지만, 대중은 그것을 '충분히 현실적'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종종 신앙의 이름으로 가면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복음은 다시 한 번 이미지에 짓눌립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심으로 끝나선 안 됩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질문해야죠.
“왜 세상이 그렇게 비추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이미지에 어떤 책임이 있는가?”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을 밝히고, 길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히려 빛을 가리는 그림자가 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위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바로 그 지점을 꿰뚫습니다.
그리고 미디어는 그 모순을 극대화합니다.
그 결과, 복음은 사라지고 기독교의 껍데기만 소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살아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미디어에 편집된 이미지일 뿐이다.”
이 말이 아프게 들리는 이유는,
그 안에 부정한 수 없는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디어를 탓하기 전에,
우리가 진짜 복음을 살고 있는지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경 속 바리새인들도 '거룩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 부르셨습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가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겉모습만 다듬고, 속은 방치합니다.
미디어는 이 겉과 속의 차이를 정확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거울이 됩니다.
세상이 교회를 조롱할 때, 우리는 억울해하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 조롱 안에 우리가 버려야 할 거짓이 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세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실체입니다.
그 실체가 살아나면, 이미지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결국 진짜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그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살아 있는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기독교는 다 똑같아.”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을 진짜 사건으로 살아낸다.”
미디어는 이미지를 만들지만, 우리는 사건을 살아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곧 예수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진짜 복음은 어떤 사건이 되어야 할까요?
셋째, 진짜 복음은 어떤 사건이 되어야 할까요?
복음은 단순한 이미지나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를 바꿨고,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복음이 다시 이미지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의 중심이 아니라 부활절 콘텐츠가 되었고,
십자가는 사건이 아니라 교회 장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실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복음이 진짜 사건이라는 말은,
지금도 우리의 삶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진리로 존재하고, 삶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복음이 아니라, 단지 이미지일 뿐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복음은 예쁘게 포장된 말이 아니라
혼란을 뚫고 들어오는 진짜 이야기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정치적 메시야 이미지로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미지들을 다 깨고
자신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복음을 콘텐츠처럼 소비하지 말고,
그 복음을 내 삶 속에서 살아내야 합니다.
용서, 사랑, 십자가, 부활이 내 일상 속에서 실제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디지털 천국’으로 오해합니다.
다 잘되고, 감동 있고, 평안한 느낌만 주는 종교이지,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천국을 추구하는 집단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진짜 복음은 먼저 십자가를 지나야 합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이 없습니다.
사건이 일어나려면, 부서짐이 먼저 와야 합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음이 있어야 열매가 있습니다.
진짜 복음은 죽는 사건이고, 그래서 사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미디어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빠르게 넘기고, 선택하고, 취향에 따라 소비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선택의 콘텐츠가 아닙니다.
복음은 나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나를 바꿔버리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한 번 믿으면 끝’이라는 사고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매일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고,
어제보다 오늘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지속적인 사건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이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복음은 강력한 충돌이었고,
그들이 말하는 건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도시를 흔들 만큼의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친구 관계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살아있는 사건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저 사람 안에 뭔가 다르다”고 말하게 됩니다.
디지털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사건은 빠르게 사라지지만,
진짜 복음의 사건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집니다.
그건 한 장의 이미지로는 담을 수 없는
삶 전체를 뒤흔드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이 사건이 되려면,
우리는 먼저 사건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은 나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오늘, 이미지가 넘실거리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보다 그 사람의 사진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교회 안에서의 언어로만 머물 수 없습니다.
복음은 세상 한복판에서 몸으로 살아지는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멋진 포스터, 영상, 문장에 갇혀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이미지’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동행하며 살아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곧 “내 삶의 사건 속으로 들어와라”는 초대입니다.
복음을 이미지로만 믿는 사람은 세상이 흔들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복음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은 흔들려도 다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 삶은 진짜 ‘하나님의 이야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경험한 복음은 하나의 콘텐츠였는가,
아니면 실제 사건이었는가?”
세상은 기독교를 이미지로 소비합니다.
좋아 보이면 클릭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넘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야기는 넘겨지는 콘텐츠가 아니라,
사람의 심장을 움직이는 진실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영상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사람의 마음에 이야기를 새기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 그것을 진짜 사건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실제로 사람을 바꿉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하며, 이웃을 섬기게 합니다.
그 복음을 산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의 다음 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주님의 이야기 안에 계속 머무는 것입니다.
한 번의 이미지보다, 꾸준한 이야기가 더 깊은 감동을 줍니다.
우리가 그 꾸준한 이야기를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다시 복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요즘 기독교는 다 위선 같아.”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잘못된 이미지로 오해하는
세상에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했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정직한 고백과 진실한 회개에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살아내는 첫 걸음일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하나님의 세계”라는 찬양을 함께 고백하기 원합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위선과 독선의 종교라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굳이 왜 그 길을 가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를 위해 죽으셨고 지금도 살아계심을.
그러므로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그 길을 걷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나 혼자 걷게 그냥 두지 않으셔요.
함께 걸어가셔요. 이미 무거운 십자가는 예수님이 다 지셨어요.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따라가다보면, 처음에는 많이 힘든데… 하면 할 수록 더 힘든데...
그 힘든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계속 주셔요.
헬스 PT 시작하면 언제가 제일 힘들어요?
첫날이 제일 힘들죠? 왜 첫날이 가장 힘들까요?
운동을 많이 시켜서 그럴까요?
왜 그래요? 근육이 없으니까. 처음 쓰는 근육을 사용하니까.
복음을 살아내는 일도 그렇습니다.
처음이 가장 어렵습니다.
아직 영적 근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한 걸음씩 걸어가다 보면,
점차 사람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우리의 삶은 진짜 예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다른 길을 가더라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좁은 길을 걷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내가 솔직해질 수 있는 곳이고,
내 의로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주님이 보여주신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다함께 일어나셔서 “하나님의 세계” 찬양하시면서
준비하신 예물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겠습니다.
찬양 - 하나님의 세계
기도제목
이미지에 갇힌 신앙에서 벗어나, 은밀한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 이룸청년부가 보여지는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변화되고 자라나는 진짜 복음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세상 속에서 기독교가 오해받고 조롱받을 때,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의 진실함이 드러나게 하소서
다가오는 청년부 수련회가 감동적인 이벤트가 아닌, 실제 복음의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통성기도
하나님, 저희가 이미지에 속지 않고 진실을 바라보게 하소서.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 살게 하소서.
위선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은밀한 자리에서 주님을 예배하게 하소서.
저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주께 드립니다.
주님, 저의 내면을 비추시고 거룩하게 빚어주소서.
복음을 콘텐츠처럼 소비하지 않고, 삶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보여지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세상에 영향받지 않고, 복음으로 세상을 흔드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의 삶 속에서 복음이 실제로 역사하게 하소서.
주님, 저의 기도를 듣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이 청년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 일어나는 터전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장이 되게 하소서.
위선과 거짓된 이미지가 무너지게 하시고, 진실이 회복되게 하소서.
주님, 저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복음을 살아내게 하소서.
은밀한 기도의 골방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게 하소서.
나의 말과 행동, 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드러나게 하소서.
세상은 기독교를 조롱하지만,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게 하소서.
수련회를 통해 복음의 실체를 만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이 세대가 다시 복음으로 숨 쉬고, 다시 예수님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 이 시간, 저의 삶에 복음이 ‘사건’으로 새겨지게 하소서.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귀한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다시 점검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미지에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진짜 예배자로 부르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저희가 외식의 가면을 쓰는 신앙이 아니라,
골방에서 주님을 찾는 자 진실한 예배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복음이 사건으로 일어나게 하시고,
그 사건이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이웃에게도 확장되게 하소서.
오늘 결단한 마음을 지키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매일 걸어가게 하소서.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경험한 복음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헌금기도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
물질과 마음을 허락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의 정성과 사랑을 담아 예물을 올려드립니다.
이 예물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믿음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 받은 은혜를 세어보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모든 손길 위에
더 큰 하늘의 복과 은혜를 부어주시고,
이 예물이 교회와 다음세대를 세우고,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데 아름답게 쓰임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일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광고
축도
이제는 우리를 죄와 어둠에서 건지시고 중생케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우리를 거룩함과 성결의 삶으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우리의 영혼과 육체 가운데 임재하셔서
신유의 은혜로 회복케 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미지 시대 속에서도 복음을 실제 사건으로 살아내며
위선과 독선의 이미지로 오해하는 이 세대 가운데
진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며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는
여기 모인 모든 청년들과 그들의 가정과 일터와 미래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그 날까지
영원토록 항상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