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1~8) 믿음 좋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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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어려운 질문들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고백하면서도, 왜 내 삶은 그 고백에 미치지 못할까?' '이렇게 부족하고 흔들리는 나의 모습이 혹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망가뜨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고민들은 때로 우리를 깊은 자책과 무력감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질문은 2천 년 전 로마교회 성도들도 똑같이 품었던 고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정면으로 다루는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당시 하나님의 율법을 직접 받았던 유대인들조차 그 말씀 앞에서 신실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실패가, 아니 우리의 실패가 과연 하나님의 신실하심마저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바울은 단호하게 외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바로 그 지점, 인간의 한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곳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불신실함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미쁘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는 감동적인 사실입니다. 마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별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듯이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깊이 깨닫고, 그 은혜 안에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 말씀을 맡은 특권, 그리고 그 묵직한 책임

바울은 먼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롬 3:1) 이는 단순한 수사적 질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종교적 정체성의 뿌리를 흔드는 도전적인 물음입니다.
바울이 이런 질문을 던진 배경을 이해하려면 로마서 2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 오히려 그 율법대로 살지 못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롬 2:17-24). 심지어 "네가 유대인이라 불리며...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나...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 2:17,23)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렇다면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나은 게 뭐가 있냐?"는 반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착각했습니다. 할례의 흔적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영원한 보증서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율법의 참된 정신은 외면한 채, 껍데기만을 움켜쥐고 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하며 살아갔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위선적인 신앙의 민낯을 가차 없이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이 받은 특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2)
여기서 '맡았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거룩한 청지기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받은 말씀은 온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담긴 보배로운 계시였습니다. 그들은 이 귀한 진리를 세상에 전달하고 증거해야 할 신성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고 선포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 부르심의 참된 목적을 완전히 망각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삶으로 생생하게 증거하는 대신, 말씀을 자기들만의 전유물로 삼아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선민사상은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아니라, 배타적 우월감을 정당화하는 변명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자문해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과연 그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성경을 언제든 펼쳐볼 수 있고,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피 흘려 지켜낸 고귀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특권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믿지 않는 이들을 무시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2천 년 전 유대인들의 실패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권은 언제나 책임과 함께 옵니다. 말씀을 아는 자는 말씀대로 살아야 할 거룩한 의무가 있습니다. 복음의 청지기로 부름받은 우리는 그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2. 인간의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흔들림 없는 신실하심

바울은 이어서 더욱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롬 3:3) 만약 유대인 중 일부가, 아니 대다수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불신앙의 길을 걸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무효로 만들 수 있을까요? 바울은 천둥같은 목소리로 외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롬 3:4)
여기서 바울은 언약의 본질, 그 깊은 신비를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인간의 반응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장구한 역사가 이를 웅변으로 증명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직후부터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도 끊임없이 바알과 아세라를 좇았으며, 예언자들의 피맺힌 경고에도 귀를 막았습니다. 심지어 거룩한 율법을 손에 쥐고도 그것을 자기 의를 세우는 도구로 왜곡시켜버렸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언약을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해 가장 귀한 것, 자기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얼마나 깊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까!
디모데후서 2장 13절은 이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본질적 속성입니다. 마치 태양이 빛을 내는 것이 태양의 본성인 것처럼,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본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처참한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반석은 흔들리기 쉬운 우리의 성실함 위에가 아니라, 영원토록 변치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굳건히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3. 은혜를 방종의 구실로 삼으려는 교묘한 유혹

그런데 여기서 인간의 교활한 본성이 고개를 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차피 신실하시니, 우리가 죄를 지어도 결국 구원은 보장되는 것 아닌가? 오히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 아닌가?"
바울은 이런 궤변을 예견하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어떤 이들이 '우리가 악을 행하자 선이 이루어진다'고 비방하듯이 말하니, 그들이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8)
이것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바울 시대의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퍼뜨렸던 위험한 주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죄악을 통해 더욱 찬란하게 드러난다면, 죄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였습니다. 이는 복음의 정수를 완전히 뒤틀어버리고, 거룩한 은혜를 저급한 방종으로 전락시키는 치명적인 독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태도가 교회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어차피 회개하면 용서받을 테니, 지금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거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어떻게 살든 천국은 보장되어 있다'는 식의 안일한 생각들입니다. 이는 값싼 은혜, 본회퍼가 경고했던 그 위험한 함정에 빠진 모습입니다.
참된 은혜는 결코 우리를 죄의 수렁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단지 죄를 덮어주는 소극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거룩한 삶으로 이끄는 적극적이고 변혁적인 능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은 이를 명확히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
진정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사랑의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죄 가운데 머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빛을 본 사람이 다시 어둠을 사랑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4. 신실하신 하나님께 신실한 삶으로 응답하는 거룩한 부르심

이제 오늘 말씀을 우리 삶의 거울로 삼아 깊이 묵상해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바울이 날카롭게 지적했던 유대인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소유했지만, 그것을 삶으로 육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맡은 특권이 오히려 더 큰 정죄의 근거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고의 나팔이 울립니다. 복음을 머리로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이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하며, 우리의 가치관을 뒤바꾸어야 합니다. 복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 때조차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한 번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며, 연약한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방황하는 양을 찾아 산과 골짜기를 헤매는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십니다.
그러나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이 우리에게 더 큰 책임감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은 우리가 죄에 안주할 핑계가 아니라, 더욱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가장 강력한 동기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능력이요,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진솔하게 물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청지기로서, 그 말씀에 합당한 삶으로 응답하고 있는가?'
'나의 연약함과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은혜를 값싸게 만들지 않고, 그 은혜에 합당한 거룩함을 추구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이 우리를 무거운 죄책감으로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고 넓은 은혜의 바다로 인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 전체가 향기로운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은 우리를 능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오늘도 새롭게 시작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다시 한 번 복음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순종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읍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연약함보다 크다는 것을 기억하며, 담대히 나아갑시다. 그분이 시작하신 선한 일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을 믿으며, 오늘도 믿음의 경주를 계속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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